1. 시적 인식과 창작의 과정
열매 /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가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쪽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2. 문학과 자연
얼룩 / 강인한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가만히 돌 속으로 걸어가는 비의 혼,
보이지 않는 얼룩 하나, 햇볕 아래
마른 돌멩이 위에서 지워진다
어디서 왔을까, 네 이름은
내 가슴속에 젖어 물빛 반짝이다가
얼룩처럼 지워져 버린 네 이름은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내 한 생도 세상 속으로 떨어진다
마른 돌멩이 위에서
내 삶의 한 끝이 가만히 지워진다
點描 / 박용래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二重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 강희안
강에 나와 앉으니
돌이 되었구나
그을은 우리의 얼굴을
물살로 어루만져 주는
그대의 마음
어느 목숨의 서슬을 지우려 함인가
산의 등 뒤로
마음은 물결 따라 흐르나니
목이 긴 새들 날으듯
내 그대에게 닿으리라
강도 머지 않아
우리의 뜨락에 돌을 낳아
맑은 물길 휘감으며
저리 흐르려니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이른 봄 / 김광규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
다리 가느다란 여중생이
유진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쫙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 입었다
그리고 무릎이 나올 듯 말 듯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달란다
그렇다
몸이다
마음은 혼자 싹트지 못한다
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몰래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해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神들의 추억 / 오세영
한때는 초원이었다.
숲과 강이 있었고
짝지어 노니는 짐승과 새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들끓는 野性이 대지에 피를 뿌리자
인간은 화살을 날리고 사자는 늑대를,
늑대는 사슴을,
사람은 꽃잎을 물어뜯었다.
그리하여 神은
단 하나의 모델만을 남겨 놓고
그가 실수로 만든 세계를
지워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일체의 소리와
동작과
색깔이 지워진
그곳은 사막,
백색의 무거운 침묵만이 누워 있는
땅.
사막은 신의 추억을 위하여
창조의 모델, 오아시스를
먼 熱砂의 砂丘 속에 가두어 놓고
오늘도 알라신께
환상의 신기루로 펼쳐보인다.
신생아 1 / 김기택
저 혼자 열심히 바둥거리며 움직이는
아기의 작은 팔다리를 보니
아무래도 땅 위의 것 같지가 않다.
저 움직임은 무중력 속에서 살았었거나
바다 같은 부력을 타고 다니다 왔으리라.
양수가 출렁거리는 둥근 우주,
그 먼 곳에서 이 땅 위로 내려왔지만
아기는 아직도 여기가 땅인 줄 모르는 모양이다.
제 하늘에서 떠다니다 문득 딱딱한 방바닥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때때로 아기는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세상 밖 어딘가를 보고 있다.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여전히 몸이 생기기 전의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제 몸이 없는 줄 알고
크고 아득한 표정을 만들어
아기는 저 혼자 가만히 웃음 짓는다.
그러다 갑자기 제가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느끼고는
금방 사람의 얼굴이 되어 또 울음을 터뜨린다.
고추의 방 / 이정록
농약을 마신 막내 삼촌이 막 숨 몰아쉬던 안마당
그때 그 자리에서 할머니가 마른 고추를 가른다
삼촌도 견뎠으면 맵고 붉게 익었을 것이다 고추 가위는
입만 벌리면 아직도 멀었다고 가위표를 내보이는데
조카들도 장성했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삼십 년이면 충분하다고
숨 멈춘 뒤에도 솟구치던 게거품이 노란 씨앗으로 쏟아진다
붉고 매운 눈물의 나날이 배를 가르고 뛰쳐나오자
고추의 빈 뱃속으로 햇살 들이친다 삼십여 년이면 족하다고
재채기도 없이, 삼촌의 방에 불이 켜진다
고추를 가르던 손으로는 눈물을 훔칠 수 없다
눈길도 없이, 나와 할머니의 눈에 붉은 등이 켜진다
3. 문학과 문명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 같아서 뼈째 씹어야 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 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