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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처럼 살다 간 서양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 출생 : 1756년 01월 27일 |
* 사망 : 1791년 12월 05일 |
* 국적 : 오스트리아 |
* 대표작 :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피아노 소나타 제11번〉, 〈클라리넷 5중주〉 등 |
서양 음악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등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이다.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합창곡, 성악곡 등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오로지 아들의 음악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건반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6살 무렵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건반악기 주자가 되었으며, 오르간과 바이올린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작곡에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해 6살 때 미뉴에트, 8살 때 교향곡, 11살 때 오라토리오, 12살 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기록을 세웠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나이 6살이 되던 1762년,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를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이 모차르트 일가의 첫 번째 연주 여행이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을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썼다.
연주 중인 모차르트와 누나 나넬, 아버지 레오폴트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했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으며, 여기서 쇼베르트의 건반음악과 글룩의 오페라를 감상했다.
1764년, 모차르트 일행은 프랑스 칼레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와 그의 동료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모차르트 가족은 1765년 겨울은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인 길, 겐트, 로테르담, 헤이그를 여행했으며, 1766년에는 프랑스의 파리, 디종, 스위스의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빈터투르, 딜링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그해 11월,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1768년,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빈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바보 아가씨(La Finta Semplice)〉와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를 작곡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다. 빈에서는 오페라 외에 바이젠호이스 성당의 헌당식을 위한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769년 말부터 1773년까지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사마르티니를 비롯해 이탈리아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여행했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밀라노에서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를 초연했으며, 파도바에서 오라토리오 〈풀려난 베툴리아(La Betulia Liberata)〉의 작곡을 위촉받았다.
1773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가 되었다.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 현악 4중주, 소나타, 미사곡, 세레나데, 오페라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그는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했다. 1년에 150플로린밖에 되지 않는 낮은 보수와 오페라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뮌헨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1777년 8월, 그는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가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 뮌헨 등을 방문했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에서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여행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을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이려고 애썼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연봉은 450플로린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를 마지못해 수락했으며,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에도 만하임과 뮌헨에 들러 다른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할 수 없이 1779년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 후로도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1781년,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가 뮌헨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해 3월,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과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에 머물고 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소환을 받았다. 대주교의 부름을 받고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그가 자기를 종처럼 취급하는 것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툰 백작부인이 그에게 연주회를 제안했다. 잘츠부르크에서 그가 받던 보수의 절반이 넘는 연주료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대주교가 이것을 금지했다. 이 일로 불만이 극에 달한 모차르트는 대주교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자신을 해고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대주교는 매우 모욕적인 방식으로 그를 해고했다.
이렇게 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결별한 모차르트는 그 길로 빈으로 갔다. 대주교와 화해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강요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무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다. 고용주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차르트는 마음껏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수없이 많은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1782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독일 오페라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의뢰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Die Entfuhrung aus dem Serail)〉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전까지 오페라는 대개 이탈리아어로 쓰였는데,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독일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오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와 더불어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이해에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
1786년과 1787년,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과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런 걸작들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으면서 모차르트는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는 안정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실 가족이나 귀족 앞에서 연주를 하거나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터키 간의 전쟁으로 귀족과 왕실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수입이 줄었다.
1787년 12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빈에 잡아 두기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제안했다. 리도우텐 홀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무도회를 위한 춤곡을 작곡하고 일 년에 800플로린을 받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모차르트에게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788년, 모차르트 가족은 빈 근교로 이사를 갔다. 집세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아주 비굴한 어조로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도 썼다. 1789년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재정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포츠담,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지를 방문했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극심한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었다.
그해 6월, 빈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왕실로부터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것이 1790년에 초연된 〈여자는 다 그래(Così fan tutte)〉이다. 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발표한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ote)〉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 익명의 사람에게 〈레퀴엠(Requiem)〉 작곡을 의뢰받고 곡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791년 12월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여흥을 위한 가벼운 음악부터 본격적인 연주회용 음악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가 여흥을 위해 작곡한 음악에는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가 있다. 이 중 세레나데는 본래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였는데, 나중에는 기악으로 연주하는 모음곡 형태로 발전했다. 모차르트는 주로 귀족들의 오락이나 축제, 사교 모임을 위한 가벼운 음악으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 Musik)〉인데, 이것은 독일어로 '작은 밤음악(小夜曲)'이라는 뜻이다. 1787년 작으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느린 로망스, 3악장 독일 민속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활발한 분위기의 론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1776년 잘츠부르크 시장 하프너의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쓴 세레나데 제7번 '하프너(Haffner)', 우편마차나 역마차에서 사용하는 나팔을 6악장에 도입한 세레나데 제9번 '포스트호른(Posthorn)'이 있다.
모차르트는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41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 피아노는 여성의 악기로 널리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가볍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며, 대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서정적인 아다지오나 안단테, 3악장 카덴차가 있는 경쾌한 론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악장에 '터키 행진곡(Turkischer Marsch)'이 나오는 제11번이다. 대개의 소나타는 1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곡은 1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악장은 미뉴에트이며, 3악장이 행진곡풍의 론도로 작곡된 '터키 행진곡'이다.
실내악에서는 현악 4중주, 피아노 5중주, 현악 5중주, 클라리넷 5중주, 플루트 4중주, 오보에 4중주, 혼 5중주 등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남겼다. 대개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다. 이 장르의 대표곡으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89년에 작곡한 〈클라리넷 5중주〉가 있다. 악기 편성은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현악 4중주 편성에 클라리넷 한 대가 추가된 형태이다.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목가적인 분위기의 느린 악장, 3악장 우아한 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변주곡 형식의 경쾌한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클라리넷과 현악 4중주가 서로 대응 관계를 이루며 음악을 이끌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모차르트는 근대적인 의미의 협주곡 양식을 처음으로 완성시킨 작곡가로 꼽힌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45곡이나 작곡했는데, 독주 악기의 종류도 피아노, 바이올린,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보에, 혼, 클라리넷, 바순, 플루트, 플루트와 하프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바이올린 협주곡은 대부분 20세 때 작곡한 것으로 아름다움과 예술적 완성도에서 있어서 나이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여 준다. 한편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25곡으로 대부분 장조로 작곡되었다. 하지만 1785년에 쓴 제20번만은 이례적으로 단조로 되어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은 고전주의를 넘어 낭만주의를 예고하는 협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극적인 내용과 스케일의 방대함이 가히 교향곡에 비견할 만하다. 1악장 교향곡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소나타 형식, 2악장 노래하듯 연주하는 로망스, 3악장 활달한 론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역시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모차르트는 8살 때인 1764년에 처음 교향곡을 쓰기 시작해 1788년까지 24년 동안 모두 41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은 대체로 하이든이 세운 교향곡의 틀, 즉 빠른 템포의 1악장과 4악장 사이에 느린 2악장과 미뉴에트풍의 3악장이 들어가는 고전주의 교향곡의 모범을 따르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이탈리아풍과 규모가 큰 빈풍으로 대별된다. 대부분의 교향곡이 장조이며, 25번과 40번만 단조로 작곡되었다. 41곡 중 마지막에 작곡한 〈교향곡 제39번〉, 〈교향곡 제40번〉, 〈교향곡 제41번 '주피터'〉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중에서 1788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40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1악장은 서주 없이 곧바로 제1주제로 들어가는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율이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분위기가 고조된다. 3악장은 소박한 민요풍의 미뉴에트 악장이며, 4악장은 높은 음역의 경쾌한 동기와 격렬하고 극적인 모티브가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썼는데, 독일어 오페라로는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마술피리〉가 있고, 이탈리아어 오페라로는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는 다 그래〉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는 1786년에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이다. 이 작품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하나로 줄거리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후편에 해당된다. 사랑하는 로지나와 결혼한 알마비바 백작은 결혼 후에도 천성적인 바람기를 버리지 못하고 피가로와의 결혼을 앞둔 하녀 수잔나를 차지하려 한다. 이런 백작의 마음을 알아챈 백작부인과 수잔나, 피가로가 서로 짜고 백작을 골려 준다는 것이 오페라의 줄거리이다. 1막에서 피가로가 부르는 〈더 이상 못 나르리(Non piu andrai)〉, 2막에서 백작부인이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부르는 〈사랑을 돌려주오(Porgi amor)〉, 사랑에 눈뜬 소년 케르비노가 부르는 〈사랑의 괴로움 그대 아나(Voi che sapete)〉, 3막에서 백작부인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어디로 갔나 그 시절은(Dove sono)〉,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편지를 쓰면서 부르는 편지의 이중창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Che soave zefiretto)〉가 유명하다.
〈피가로의 결혼〉 1막 중 한 장면을 그린 그림. 백작과 만나는 수잔나. 의자에는 케르비노가 숨어 있다.
1791년, 모차르트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로부터 〈레퀴엠〉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모차르트는 심신이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지만 적지 않은 보수를 준다는 말에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은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눈물의 날에(Lacrimosa dies illa)〉의 앞부분까지만 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머지는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가 남긴 초고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교회음악의 하나로 꼽힌다. 연주자로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자과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참여한다. 〈입제창(Requiem aeternam)〉,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진노의 날(Dies irae)〉, 〈놀라운 나팔소리(Tuba mirum)〉, 〈위엄과 공포의 왕(Rex tremendae majestatis)〉, 〈자비로운 예수(Recordare, Jesu Pie)〉, 〈꺼지지 않는 불길(Confutatis maledictis)〉, 〈눈물의 날에〉, 〈영광의 왕 예수 그리스도(Domine Jesu Christe)〉, 〈찬양과 기도의 제물(Hostias)〉, 〈거룩하시다(Sanctus)〉, 〈축복 있으라(Benedictus)〉, 〈신의 어린 양(Agnus Dei)〉, 〈영원한 빛(Lux aeternam)〉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도 교회음악으로 〈C단조 미사〉와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합창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모테트 〈춤추고 기뻐하라. 복된 영혼이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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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식 미사(Coronation Mass K.317)
(요약)
모차르트가 작곡한 20곡에 가까운 미사곡과 이 작품은 대부분 빈으로 이주하기 전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되었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콜로레도 대주교의 사원에서 일하는 동안 작곡된 곡이다.
1. 고전시대의 종교음악
고전시대의 작곡가들은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계몽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인류의 진보를 믿었던 이 시대 작곡가들은 교회음악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세속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종교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있어서도 작곡가들은 순수하게 교회의 전례를 위해 작곡하기 보다는 연주회용 교회음악을 창작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음악적인 특징에도 반영된다. 17세기에 오르간으로 연주하던 교회음악의 관습은 18세기 들어 기악으로 연주하는 신포니아나 현악합주를 작곡하는 관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전시대의 종교음악은 주로 가톨릭교회 행사를 위해 작곡되었는데, 이것은 개신교의 예배의식에서 ‘말씀’이 강조되었던 것에 비해, 가톨릭교회에서는 음악이 여전히 전례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의 마리아 플라인 교회
2. ‘대관식’이라는 부제
모차르트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만하임과 파리를 여행한 것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이 나자,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이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와 작곡가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시기,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한 〈대관식 미사〉는 1779년 3월 23일에 완성되어 그 다음 달인 4월 4일 부활절에 초연되었다. 이 작품에 ‘대관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은, 1751년, 잘츠부르크의 마리아 플라인(Maria Plain) 교회에 세워진 마리아상 기념을 위해 매년 행해지던 대관식 미사를 위해 작곡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이 추측보다는 19세기 초, 빈의 황실에서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라는 가설이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이 작품이 왕실의 대관식을 위한 음악으로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모차르트의 신앙심
모차르트는 그가 섬기던 콜로레도 대주교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이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을 온전히 신임할 수는 없다.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원치 않으며, 신앙이 없는 자들과 오랜 우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의 삶을 비출 때, 사치와 향락을 좋아했던 그의 화려한 면모가 주로 부각되곤 하지만, 모차르트가 미사와 오라토리오, 칸타타와 같은 종교음악을 60곡 이상 남겼다는 사실은 그가 종교적으로도 신앙이 있는 삶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대관식 미사〉는 콜로레도 대주교의 사원에서 일하는 동안 작곡된 곡으로, 이 시기에 작곡된 다른 종교음악과 마찬가지로, 콜로레도 대주교의 음악적인 선호도가 반영되었다. 그것은 C장조를 좋아했던 대주교의 선호가 반영된 것으로, 장식적인 것을 금하고 45분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주교의 명을 따랐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19곡의 미사곡 가운데 16번째 작품인 이 〈대관식 미사〉는 모차르트가 23세에 작곡했지만, 이미 음악적으로 성숙했던 시기에 작곡된,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잘츠부르크 교회음악의 전통을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콜로레도 대주교(1732~1812) - 그는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 모차르트의 첫 번째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이가 좋지 않아 모차르트와 수많은 다툼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4. 작품구성
1) 키리에(Kyrie)
‘자비송’이라고 하는 키리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신이나 황제 혹은 개선장군을 맞이할 때 군중이 외치던 환호의 외침이다. 이후 저녁기도와 미사에 도입된 이 키리에는 로마 전례의 미사 통상문 가운데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환호이자, 그리스도에게 자비를 간구하는 노래이다. 합창으로 시작되어 소프라노 독창, 4중창으로 이어지고 다시 합창으로 진행되는 이 키리에는 삼위일체를 반영한 3부분으로 구성된다.
2)글로리아(Gloria)
대영광송 ‘글로리아’는 축일을 맞아 성령 안의 공동체가 기쁨을 마련해주신 성부와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며 자비를 간청하는 축제의 노래이다. 이 대영광송은 축제의 노래이기 때문에 참회시기와 대림절 시기에는 노래되지 않는다. 서문인 천사의 노래와 본문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찬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광송으로 전개되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느님의 위엄이 장대한 선율 속에서 노래되며, 부드러운 선율로 하느님의 사랑이 묘사되는 부분을 지나 아멘으로 끝난다.
3)크레도(Credo)
‘신앙고백문’을 뜻하는 크레도는 줄여서 ‘신경’이라고도 한다. 세례를 받는 신도들이 물에 세 번 잠길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신앙을 고백하는 관습에서 비롯된 초기의 세례 신앙고백문은, 이후 지역과 전례에 따라 여러 양식으로 발전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크레도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인 하느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하느님의 아들인 주님이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 부활하신 것에 대한 고백이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4)상투스(Sanctus)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환호의 노래 ‘상투스’는 모든 관현악 반주와 합창이 함께 노래하는 장중한 음악으로 시작된다. 하느님의 권능을 강조하며 정적이고 웅장하게 시작되는 첫 부분은 빠르고 경쾌한 부분으로 이어진다.
5)베네딕투스(Benedictus)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뜻의 베네딕투스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외치던 환호를 의미한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수난과 부활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에 대해 다함께 환영하며 부르는 찬양의 노래이다. 전주 이후 4부분으로 이어진 이 곡은 4중창, 합창, 4중창, 그리고 다시 합창으로 이어진다.
6)아뉴스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뜻의 아뉴스 데이는 죽임을 당하고도 피로 값을 치러 만백성을 구원한 어린 양을 찬미하는 노래이다. 처음에 등장하는 소프라노 솔로는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 ‘그리운 시절은 가고(Dove sono)’와 선율이 유사하며, 그것은 이후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이 부분을 참고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러한 소프라노 솔로는 테너와 베이스의 노래로 이어지며, 마지막에 대합창이 이어지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후반부의 합창에서는 첫 곡 키리에와 유사한 선율이 노래되어 곡 전체에 통일성을 주고 있다.
〈십자가를 옮기는 예수〉(1526)
https://www.youtube.com/watch?v=Jfs4lTs3m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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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 c단조(Great Mass in c minor K.427)
(요약)
모차르트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했기 때문에 아마도 콘스탄체를 데리고 잘츠부르크에 갈 때 이 곡을 연주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모차르트만의 독창성과 독창과 합창, 대규모 편성으로 작곡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구분되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회음악 중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1. 모차르트와 슈비텐 남작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었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Gottfried van Swieten)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계몽사상을 지지했던 그는 요제프 2세가 주장한 혁신적인 정책을 지지한 것으로 유명하며, 황실의 도서관을 책임지는 사서로도 활동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음악을 사랑했던 슈비텐 남작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고전 시대의 작곡가들을 후원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빈에 정착한 후의 모차르트는 정기적으로 그를 만나며 남작이 소장하고 있던 바흐와 헨델의 악보를 보며 대위법을 공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가 작곡한 푸가를 기악 앙상블을 위한 악보로 편곡하는가 하면, 헨델의 오라토리오 총보를 건반악기로 연주하면서 대위법을 익혔던 것이다.
왕실의 티파티에서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모차르트
2. 콘스탄체와 잘츠부르크에 가기 위해 작곡한 미사곡
이처럼 모차르트가 학습한 대위법 서법이 녹아있는 이 작품은 1782년 혹은 1783년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 잘츠부르크의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절, 콜로레도 대주교를 위해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해야 했던 것과 다르게, 교회에 대한 의무가 없었던 빈에서는 종교곡을 작곡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아마도 아내 콘스탄체를 위해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한 모차르트는 아마도 콘스탄체를 데리고 잘츠부르크에 갈 때 이 곡을 연주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1783년 7월 아내를 데리고 잘츠부르크에 갈 때에도 이 곡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크레도’는 부분만 작곡되었기 때문에 기존에 작곡했던 음악을 이 곡에 덧붙여서 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모차르트가 전체 악곡을 완성하지 않았던 까닭에, 모차르트가 남겨둔 악상을 토대로 미완성 부분을 채운 편집본과 기존의 모차르트 작품에서 차용하여 편집한 출판본이 남아있다.
3. 대미사
어떤 기능적인 목적에서 작곡된 작품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모차르트만의 독창성이 담겼을 뿐만 아니라, 독창과 합창, 대규모 편성으로 작곡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구분되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대미사(Great Mass)’라는 별명을 지닌 만큼,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회음악 중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아드리엔 이센브란트, 〈성 그레고리오의 미사〉
1곡 ‘키리에’
c단조에서 여린 셈여림으로 장중하게 시작되는 첫 번째 곡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노래하는 비장한 악곡인 ‘키리에’로, 장엄한 합창 이후의 소프라노 솔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한 후에 다시 합창이 도입되면서 긴장감이 커지다가 셈여림이 작아지면서 고요하게 끝난다.
2곡 ‘글로리아’
C장조의 ‘글로리아’는 오케스트라의 반주 위에서 힘차게 합창이 시작된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Gloria in excelsis)’ 부분의 화려한 악상과 대조적으로, ‘땅에서는(Et in terra)’ 부분은 여린 셈여림으로 시작되어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고조되는 부분을 지나 여리게 끝난다. F장조의 ‘주를 찬양하나이다(Laudamus te)’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전주 후에 소프라노 독창이 도입되며, 이 경쾌한 독창은 현악기 반주와 서로 주고받으며 전개된다. 오라토리오 양식으로 작곡된 화려한 아리아 스타일의 선율이 돋보이는 곡이다.
12마디로 작곡된 ‘주의 영광 크시기에(Gratias)’는 곡의 처음부터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으로, 불안한 조성과 불협화음, 부점 리듬이 짧은 악곡에 급박함을 고조시킨다. 이어지는 ‘주 천주여(Domine deus)’는 d단조의 대위적인 악곡으로 시작되어, 두 명의 소프라노 중창과 현악 반주가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악곡을 이끌고 간다.
모레토 다 브레시아, 〈성 마르탱과 성 세실리아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영광〉
g단조의 현악기의 장중한 부점 리듬으로 시작되는 ‘세상 죄를 없애시는 주여(Qui tollis)’는 엄숙한 서주로 시작되어 8성부 합창이 도입되면서 장대함이 커지는 곡이다. 현악 반주의 부점 리듬이 좀처럼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며 합창이 길게 이어지는 엄숙한 악곡이다.
‘홀로 거룩하시고(Quoniam)’에서는 e단조로 전조되어 현악기와 오보에, 바순이 연주하는 전주를 거쳐 중창이 이어진다. 소프라노 2명과 테너 1명이 함께 하는 중창은 푸가 서법으로 도입되는 대위적인 부분을 지나 세 성부가 함께 노래하며 고조되는 부분을 거쳐 다시 e단조로 돌아온다. 전주를 연주했던 악기들이 다시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며 끝낸다.
다시 C장조로 돌아온 ‘주 예수 그리스도(Jesu Christe)’는 6마디의 짧은 악곡으로, 전체 성부와 악기가 다함께 장중한 음향을 들려준다.
‘성령과 함께(Cum Sancto Spiritu)’는 푸가로 진행되는 악곡으로, 베이스에서 시작되어 테너, 알토, 소프라노가 이어지며 점차 확대된다. 각 성부의 진행을 악기가 중복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팀파니의 사용으로 강렬함은 더욱 커진다. 긴장감이 커진 악곡은 다시 여리게 시작되어 아멘을 다함께 부르며 끝난다.
3곡 ‘크레도’
모차르트는 ‘한 분이신 천주를 믿나이다(Credo in unum Deum)’에서 모든 악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합창과 베이스 성부만 작곡했다. 소프라노가 2성부로 나뉜 5성부 합창이 박진감 넘치는 악곡을 노래한다.
F장조의 느린 템포로 앞의 곡과 대조를 이루는 ‘육신을 취하시고(Et incarnatus)’에 대해서는 모차르트가 성악과 관파트, 베이스만 완성했다. 소프라노 독창이 노래하는 콜로라투라 아리아의 화려한 패시지는 오보에, 플루트, 바순과 호응하며 아름답게 노래된다. 이후 페르마타를 통한 늘임표 이후의 카덴차에서도 소프라노 솔로는 목관악기와 선율을 주고받으며 노래하고, 또 한 번의 페르마타 이후 고요한 후주를 지나 끝난다.
4곡 ‘상투스’
C장조의 상투스에서는 모든 성부와 악기가 ‘거룩하시도다(Sanctus)’를 세 번 함께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바이올린의 여린 셈여림 반주 위에서 시작된 합창이 점점 고조되었다가 페르마타 이후 베이스로부터 대위적인 주제가 시작되어, 테너, 소프라노가 차례로 도입되면서 호산나의 푸가를 노래하면서 열정적으로 끝난다.
5곡 ‘베네딕투스’
a단조로 시작되는 ‘축복 있을지어다(Benedictus)’는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서주로 시작된 이후 4성부 중창이 도입된다. 단조로 시작된 악곡은 C장조의 악곡으로 전조되며 다소 긍정적인 악상으로 변화되지만, 간주 이후의 중창은 다시 단조로 전조되면서 다소 어두운 분위기를 띤다. 이어지는 합창의 ‘호산나’는 C장조의 열정적인 악상을 전개하며 점차 고조되어 끝난다.
얀 반 에이크의 제단화의 일부인 〈하느님의 어린 양 숭배〉
https://www.youtube.com/watch?v=Ez0kqVShF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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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퀴엠 d단조(Requiem in d minor K.626)
(요약)
모차르트는 1791년 늦은 봄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레퀴엠 작곡을 의뢰 받는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작품은 유난히 판본이 많은 작품으로 꼽힌다.
1.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부탁으로...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받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레퀴엠... 병상에 있는 모차르트는 마지막까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악상을 떠올리는데... 영화에 그려진 이 이야기는 모차르트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관점으로 해석되어 많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 라이벌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한 끝에, 복면을 쓰고 모차르트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겪었던 이야기는 영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의 발제크 백작(Franz von Walsegg, 1763~1827)이 익명으로 이 작품을 청탁했다고 밝혀졌다. 발제크 백작이 그해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레퀴엠을 자신이 작곡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정체를 밝히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2.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는 모차르트
발제크 백작은 1791년 늦은 봄에 〈레퀴엠〉을 청탁했다고 하는데, 모차르트는 그가 세상을 떠난 12월까지도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해에 모차르트는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791년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27번〉을 완성했고,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 황제의 자비〉를 9월에 초연했으며, 그 다음 달에는 〈클라리넷 협주곡〉도 완성한다. 이처럼 큰 작품을 쓰는 중간에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작곡했는데, 그것은 모차르트가 작곡에 대한 사례의 절반을 미리 받은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페라가 초연된 9월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결국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3. 다급해진 콘스탄체의 부탁
이 〈레퀴엠〉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오늘날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에게도 애석한 일이지만, 당시 이 작품의 완성을 절실하게 바랐던 사람은 다름 아닌 콘스탄체였다. 홀로 남은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는 어떻게 해서든 이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탁 받을 당시, 대금의 절반을 미리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콘스탄체는 먼저 작곡가 아이블러(Joseph von Eybler, 1765~1846)를 떠올렸다. 남편이 생전에 높이 평가하던 아이블러라면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블러는 ‘세쿠엔치아’의 오케스트라 부분만을 손댔을 뿐, 그 역시도 크게 진전시키지 못했다. 다급해진 콘스탄체는 제자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 1766~1803)에게 악보를 넘겼고, 이렇게 해서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긴 악보를 완성하게 된다. 콘스탄체는 제자가 작품을 끝마쳤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남겨두고 발제크 백작에게 악보를 넘겨, 이 작품에 대한 나머지 대금도 받을 수 있었다.
4. 판본도 많고 논란도 많은, 모차르트의 미완성 작품
이처럼 모차르트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작품은 유난히 판본이 많은 작품으로 꼽힌다. 그의 천부적인 독창성이 돋보이는 음악임에도, 완성되지 못한 까닭에 연주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이블러가 추가한 판본이 출판되는가 하면, 쥐스마이어가 작곡한 악보도 출판되었지만, 모차르트가 남긴 스케치만으로 보정된 악보도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모차르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이 〈레퀴엠〉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중단된 노래, 그리고 이어지는 초연
모차르트는 인트로이투스와 키리에, 세쿠엔티아, 오퍼토리움까지 작곡했으나, 그마저도 모두 완성한 것이 아니라,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의 주요 음형만을 악보로 남겼으며, 유명한 ‘라크리모사’의 여덟 번째 마디에서 작곡은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1793년 1월 2일에 자선공연에서 연주되었으며, 이 곡을 청탁했던 발제크 백작은 그해 12월 14일에 이 곡을 지휘했다. 발제크 백작은 작곡자가 불분명한 이 곡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다.
Ⅰ.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인트로이투스는 레퀴엠의 장엄한 분위기를 암시하며, 특징적으로 사용된 단2도 음형이 이후 악상에서도 중요하게 전개된다.
Ⅱ. 키리에(Kyrie eleison)
2중 푸가로 시작되는 키리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에 붙여진 장대한 음악이다.
Ⅲ. 세쿠엔치아(Sequentia)
(1) 진노의 날(Dies irae)
“이 날이야말로 진노의 날이여, 다비드와 시빌이 예언한 대로 세상은 재로 화할 것이요. 사람들의 두려움은 어떠할 것인가. 심판의 날이 다가올 때” 두려움 속에 전개되는 진노의 날에는 끊임없는 긴장감이 이어진다.
(2) 놀라운 나팔소리(Tuba mirum)
“놀라운 나팔소리가 세상의 모든 무덤 위에 울리며 모든 이를 보좌 앞에 모으리라. 심판 주께 답변하러 모든 피조물이 깨어날 때 죽음이 엄습하고 만물은 진동하리.” 트롬본의 연주로 시작되는 선율에 베이스가 응답하며, 두 파트는 서로 대화하듯 전개된다.
(3) 전능하신 대왕이시여(Rex tremendae)
“위엄과 공포의 왕, 대가 없이 우리를 구하시니. 긍휼의 근원이시여, 그때에 우리를 도우소서.” 대왕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점음표 리듬으로 긴박감을 전한다.
(4) 헤아려 주소서(Recordare)
“거룩하신 예수여 기억하소서. 최후의 심판 날에 죄를 용서하소서.” 차분하게 시작된 이 곡은 레퀴엠 주제가 장조로 전개되면서도, 현악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긴 악곡이다.
(5) 심판으로 저주받은 자는(Confutatis)
“사악한 자들을 깨워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심판하실 때 나를 부르사, 주의 성자들로 둘러싸소서.” 격정적인 남성 합창과 구원을 비는 여성 합창의 대조가 돋보인다.
(6) 눈물의 날(Lacrimosa)
“아! 비탄의 날이여. 죄로부터 일어날 때 인간의 죄는 심판을 받고 거룩한 예수여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전체 악곡 중에 가장 애절하며 서정적인 이 부분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창작력이 돋보이는 악곡이다. 모차르트는 8마디에서 작곡을 중단했으며, 이후 제자 쥐스마이어가 나머지를 완성했다.
Ⅳ. 오퍼토리움(Offertorium)
(1) 주 예수 그리스도여(Domine Jesu)
모차르트는 눈물의 날(Lacrimosa)에서 작곡을 중단했던 악상을 오퍼토리움에서 이어나갔다. “영광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 죽은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지옥의 형벌과 깊은 구렁에서 구원하소서” 전체 합창이 같은 선율을 노래하는 이 부분은 어둠 속에서 구원하여 거룩한 빛의 세계로 이끌어달라는 가사를 묘사하고 있다.
(2) 제물과 봉헌(Hostias)
“주여, 찬양과 기도의 제물을 드리니. 오늘 우리가 추도하는 영혼들을 위해 받아주소서” 편안하고 단순한 느낌의 악상이 전개되는 악곡이다.
Ⅴ. 상투스(Sanctus)
이 부분부터 전적으로 쥐스마이어가 혼자 작곡하였다. “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주. 하늘과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도다. 높은 곳에서 호산나!” 진노의 날(Dies irae)에 사용된 주제가 사용되고 있다.
Ⅵ.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의 이름으로부터 오는 이에게 축복 있을 지어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1784년에 작곡한 선율을 사용하여 이 곡을 완성했다.
Ⅶ.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 죄의 짐을 지신 신이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소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안식을 기원하는 경건한 노래이다.
Ⅷ. 코뮤니오(Communio)
“주여,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자애로운 주여.” 쥐스마이어는 텍스트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인트로이투스와 키리에의 일부를 사용했다. 느린 템포 속에서 엄숙하게 곡이 끝마쳐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coRf1n9Sr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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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가(Wiegenlied K.350)
(요약)
〈자장가〉는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유명한데, 고터의 시에 플리스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알려져 있다.
1.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자장가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알려진 이 곡은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는 이 한 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와 같은 가사로 노래된다. 이 곡이 탄생한 오스트리아(독일)에서도 민요처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본고장에서 노래되는 가사는 우리의 노랫말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래되는 가사는 독일어 가사의 1연을 옮긴 것으로, 2, 3연은 다른 가사로 노래된다. 온 세상이 잠드는 이 한밤에 아이에게도 잠을 권하는 내용의 가사이다.
2.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닌 모차르트의 작품?
이 음악은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의사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였던 플리스(Bernhard Flies)가 작곡한 음악으로 추정되었다. 모차르트의 이전 작품 목록에 350번으로 번호가 붙어있지만, 개정된 전집에 이 곡이 빠진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곡이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은 음악학자 프리트랜더(Max Friedlände)가 함부르크의 도서관에서 ‘고터 작사, 플리스 작곡’이라고 쓰인 초판을 발견함으로써 밝혀지기 시작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작곡가 요한 프리드리히 플라이쉬만(Johann Friedrich Fleischumann)이 이 곡을 작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곡의 가사를 붙인 작사가는 모차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고터(Friedrich Wilhelm Gotter)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Rzq_8bJ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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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나 첼리(Regina Coeli K.276)
(요약)
모차르트의 〈레지나 첼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의 성모 마리아의 기쁨을 기념하는 성가이다. 〈알마 레뎀프토리스 마테르〉, 〈아베 레지나 첼로룸〉, 〈살베 레지나〉와 함께 성모 4교송(交誦)을 이룬다.
1. 잘츠부르크 시대 후반의 교회 양식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악보의 원본이 없는 작품이다. 명확한 작곡연도와 작곡배경을 알 수 없으나, 아마도 1770년대 후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주 시간이 6~7분 정도 되는 단일 악장의 합창곡이며, 빈 시대가 시작되기 전,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한 교회양식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4성부 중창과 합창, 그리고 오보에와 트럼펫 각 2대, 팀파니, 현악기가 사용되었다.
2. 성모 마리아의 기쁨을 담은 노래
레지나 첼리(Regina Coeli)는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성모 마리아가 기뻐하는 성가로, 다음과 같은 가사에 선율이 붙여졌다.
Regina coeli, laetare, alleluia
Quia quem meruisti portare, alleluia
Ressurexit, sicut dixit, alleluia.
Ora pro nobis Deum, alleluia
하늘의 여왕이시여, 기뻐하라, 알렐루야
그 이유는 당신이 품으신 아들이, 알렐루야
부활하시었도다! 신이 약속하신 것처럼, 알렐루야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알렐루야
C장조의 4성부 합창이 기쁨에 가득한 음성으로 시작된 이 곡은 4성부 독창이 첫 번째 절의 가사를 반복하며 노래하고, ‘알렐루야’ 부분에 이르러 합창이 가세하며 음악은 고조된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결구를 지나, 두 번째 절은 G장조로 시작되며, 소프라노 독창이 그 가사를 노래한다. 이어 독창(중창) 4성부가 이어받는데, 뒤따르는 합창은 a단조에서 세 번째 절을 노래한다. 네 번째 절은 독창(중창) 4부에 의한 F장조의 악곡이다. 4성부가 감7화음의 섬세하고 내밀한 표현으로 ‘Ora pro nobis(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가사를 노래한다. 이어서 ‘알렐루야’ 가사를 노래할 때 G장조로 종지하며 다음 부분으로 전개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앞에서 전개된 가사와 음악적 내용이 반복되는데, 첫 부분은 생략되었으며 세 번째 절의 화음이 그대로 제시되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부분은 C장조로 재현된다. 모든 합창과 악기가 하나 되어 소리 내는 마지막 알렐루야로 환희 가득히 종결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QMBIthYFBk
https://www.youtube.com/watch?v=UAkCfGM1h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