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득환실(患得患失)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은 후에는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근심한다. 대체로 사람들의 얼굴이 밝기보다는 무겁고, 초조하고, 심각하고, 불안해하는 이유다.
근심은 '위험, 불행 또는 실수로 인한 불안, 불확실한 것에 대한 마음의 불안, 나쁜 것에 대한 조바심과 두려움'이다. 기본적으로 불안이 깔려있는 마음이다. 과거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미래 때문에 염려한다. 현재는 마치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숨조차 쉬기 어렵다.
근심은 번뇌의 원인이다. 번뇌는 "내리누르다. 기를 꺾다. 우울하게 하다. 저하시키다. 쇠약하게 하다."는 뜻이다. 불교는 그 번뇌를 108가지로 분류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수행한다.
사실 근심은 마치 싱크홀이나 도넛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난 보편적인 현상이다. 가인의 말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해결된다.
몸에 드나드는 공기처럼 사람의 생각 속을 드나드는 근심을 없앨 방도는 하나님께 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근심을 다만 사라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을 즐겁게 하는 길이다. 선한 말은 불안한 흐름을 바꾸어 즐거운 흐름이 되게 하는 말이다. 선한 말에는 그런 힘이 있다. 히브리어로 "다바르 토브"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잊을 수 없게 경험한 선한 말씀이 있다.
신학교 재학중이었다. 어머니 위암 말기 소식을 전화를 통해 들었다. "6개월 남았다."라고 했다. 내 마음에는 기도탑, 오직 그 한 곳이 떠올랐다. 좁고 어두운 방에서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마음에 또박또박 들려온 말씀이 있었다. 이사야 41:10이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말씀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자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때까지 나의 마음을 누르고, 기를 꺾고, 우울하게 하고, 쇠약하게 하던 불안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기도탑을 내려올 때는 날아갈 듯 가볍고 즐겁기까지 했다. 바로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나 전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하기까지 했다.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님, 누나, 동생 할 것 없이 안색이 흙빛이었고,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했다. 어느 정도 예상 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이 괴롭고 아팠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안방에 들어갔을 때다. 어머니 화장대 위로 작은 말씀 달력이 걸려있었는데 바로 이사야 41:10 말씀이었다. 기도탑에서 내 마음에 들려지던 바로 그 말씀! “아, 아버지!” 순식간에 즐거움이 점화되었다.
아버지에게 잠시 모였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가족을 안방으로 불러 모았다. 어머니도 함께 둥그렇게 돌아앉았으나 누구 하나 고개조차 들 힘이 없었다. 잠시 기도한 후에 기도탑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소개했다. 그리고는 화장대 위에 걸린 말씀 달력을 가리켰다. 바로 저 말씀이었다고. 그 말에 가족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함께 읽자고 했으나 처음에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읽었다. 소리가 더 뚜렷해졌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세 번째 읽을 때는 모두가 힘을 내어 또박또박 그 말씀을 읽었고, 마치 온 가족이 하나로 외치는 구호 같았다.
예배를 드리고 일어났을 때, 가족을 무겁게 짓누르던 근심, 불안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즐거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가족들의 얼굴은 언제 근심에 쌓여있었는지 싶게 밝고 환해져 있었고, 웃으면서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그제야 환영 인사를 건네오기도 했다. 우리에게 주신 다바르 토브였다. 선한 말씀은 실로 그런 힘이 있었다.
그 당시 하나님을 몰랐던 가족들 모두를 초청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말씀을 통해 임한 평안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 근심이나 불안이 슬그머니 찾아올라치면 서로 경계하며 엎드렸고 예배했다. 선한 말씀 외에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60 킬로그램이었던 체중이 39 킬로그램이 되셨으나 그 2년의 투병 기간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임종 예배를 위해 구역식구들이 함께 와 가족들과 예배하고 찬양할 때 어머니도 입을 움직여 찬양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평소에 어머니 곁에 나란히 누워 "무엇을 위해 기도해 줄까요?" 물으면, 늘 같은 대답이셨다. “감사할 것 밖에 없다.” 그 말씀을 묘비명으로 새겼다. "감사할 것 밖에 없다가 유일한 기도였던 어머니, 여기 잠드시다."
선한 말씀을 흘려보내면 하나님은 일하신다. 어떤 근심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그 말씀에 있다. 말씀을 통해 그 사랑과 능력으로 일하시는 아버지시다. 감사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