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태어났던 시기가 박정희가 유신을
막 시작했을때였죠.
즉! 박정희가 죽을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던 시기였죠.
그리고 1979년 10월.
△박정희는 1979년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 시간 2시간 연장 등
8개항을 포고하였다.
부산.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박정희는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저 당시 저는 매우 어렸습니다.
얼마전까지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가 계셨기에 군인들에 대해
특별히 악감정이나 계엄을
못느꼈죠.
그런데 저 당시 신문기사처럼 부산.마산에
계엄령이 선포된것입니다.
△1979년 10월18일 부산 동아대 앞을 지키는
계엄군.
당시는 부마사태. 지금은 부마항쟁이라
불리는 이 민주항쟁은 곧 수그러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위험했죠.
당시에도 서울에 살았지만.
부산에 친척들이 대부분 살았는데
하마터면 부산이 광주의 몇배나 되는
학살이 있을뻔한거죠.
일부에서는 왜 김재규가 박정희를
쏴서 전두환을 등장시켰느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 알거나
앞뒤 모르고 이야기하는것이죠.
당시 박정희의 충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도 죽였는데
우리는 1~2백만 아무것도 아니다.
전차로 싹 깔아뭉개야한다"고 했고
박정희도
"자유당때는 최인규가 발포명령을 해서
사형당했지만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하면
누가 사형시키겠느냐"하면서
사태가 더 번지면 직접 발포명령하겠다고
하였죠.
그러던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박정희가 죽던 날 밤.어머니와 함께
명동 미도파와 생긴지 얼마 안된 롯데.
신세계를 갔습니다.
그리고 밤에 국제 극장 앞에서 버스를 탔죠.
국제극장이 당시 광화문쪽에 있었으니
종로구 궁정동에서 총성이 들리던
그 장소와 거리상 아주
멀지 않았던겁니다.
어머니 손잡고
버스타고 집으로 오는 그 시간에.
김재규는 삼일 고가도로를 타고
육군본부(현재 전쟁기념관 자리)로
가고 있었을겁니다.
지금이야 웬만한 소도시에도 백화점
있고 서울에도 곳곳에 백화점이 있지만
당시는 백화점 가려면 명동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다음날 토요일 학교에서 학교뒤
오패산 등산을
했습니다.(당시 국민학교 1학년.
요즘으로 말하면 초등학교1학년이었죠)
학교수업 끝나고 돌아오니까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TV방송이
계속나왔습니다.
초딩에게 어려운 서거,시해라는 단어가
계속 나왔죠.
장송곡이 계속 방송되고 있었구요.
그리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단.1980년 5월17일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제주도까지 포함된
비상계엄은 1980년 5월17일밤
선포되죠.
제주도까지 포함된 계엄령 선포.
그 이유는 계엄사령관이 국방부 장관의
통제를 안받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1980년 5월.
어느날 학교 등교길에 장갑차들이
줄줄이 지나가더군요.
이제 생각해보니 그 장갑차는
기계화사단인 20사단 .
또는 공수특전여단의 장갑차였고
(당시 기억으로는 베레모를 쓴 군인들이
줄줄이 탄 APC장갑차가 내려가고 있었죠.
그 베레모가 기갑부대병이 쓴 베레모인지
당시 공수부대가 쓴 베레모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서울 윗쪽에서 서울을 지나
전라도 광주로
내려가는 장갑차였습니다.
2018년 10월26일은 금요일.
그리고 1979년 10월26일도 금요일이었죠.
첫댓글 제가 79년 11월 30일 생입니다.
탕탕절 한달후 출생
한달 차이로 유신을 격지 못한 세대지요 ㅎㅎ
그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죠.
12.12 쿠데타가 벌어졌울때
막 아기셨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