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가이타이에 있는 식당이름이 특이했다. "RUINED PROJECT?" 정상영업 중인 식당 이름이 "망한 프로젝트"라니. 그러나 그 이름 끝에 붙은 물음표가 질문하고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냐? 철저히 망했다고? 살다 보면 그렇게 느끼는 때가 왜 없을까? 흰 재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목조건축물 앞에 선 느낌으로 다 끝났다, 망했다 생각하는 때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의 마음이 그랬지 않았을까?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의 가슴에는 작은 소망의 불씨라도 남아 있었을까? 그들에게 천사는 말한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눅 24:6)
여기 무덤 말고, 갈릴리를 생각해 보라. 너희 생각 말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봐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천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기시켜 줄 수 있었다. 지금도 천사의 일은 이것이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 24:7)
'기억한다'는 헬라어 '메노'에서 유래했다. 기억하는 상태 속에 머무는 것, 또는 어느 정도 잃어버린 사실이 마음 속에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그들은 몸은 빈 무덤 앞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갈릴리에서 예수님께 듣던 말씀 속에 들어가 머물게 된다.
갈릴리는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약속을 받던 곳이다. 여인들은 기억을 통해 그분의 말씀 안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기억하면 즉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기억에는 이런 힘이 있다. 오스 기니스는 말한다. "믿음의 사람은 기억의 사람이다. 기억의 사람은 감사의 사람이다." 믿음은 기억이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이다.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 머무는 것이 믿음이다.
기억하지 못하면 무덤에 간 세 여자들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사도들처럼 자신들의 이성적 판단을 따라 예수님의 부활을 허탄한 이야기쯤으로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머물라고 하신 곳을 떠나버린다. 약속을 가볍게 여긴 결과다.
지금 무덤 같은 현실을 ‘보고’ 있을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묘를 찾은 것처럼, 납골당에서 사진을 보는 것처럼 슬퍼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시는 만날 길 없어 근심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잊어버린 말씀을 천사들을 통해서라도 상기시켜 주신다. 주변 사람들이나, 일들을 통해 기억나게 하신다. 그럼에도 믿고 안 믿고는 여전히 듣는 사람의 몫이다. 사도들처럼 허탄한 듯 보여 믿지 않든지, 여자들처럼 믿든지.
상실은 사실이어도 "다 끝났다. 망했다."는 것은 우리의 판단과 생각일 뿐이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막 13:31)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 약속 가운데 머무는 사람들이 항상 경험하는 기적이다. "아, 그때 말씀하신 그 일이 일어난 것이네!"
전도서 마지막 장의 시작이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신약성경의 첫 책인 마태복음 1장도 이렇게 기록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마 1:22)
일이 거꾸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 때가 차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다.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무덤에서 갈릴리로, 근심과 슬픔에서 평안과 기쁨으로, 보이는 이 땅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로 즉각 옮겨지는 길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