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버지가 화분에 있던 나무를 정원에 옮겨 심은 뒤, 장성한 아들에게 그 경험을 들려주었다. "저 나무를 옮겨주려고 할 때, 나무뿌리가 화분에 꼭 붙어 저항하더구나. 그래도 힘을 써서 뽑아내어 옮겨 심었단다." 아들이 말했다. “더 잘 자라라고 옮겨주셨군요.” 아버지가 말했다. “아니다. 잘 자라지 못할까 봐 옮겨주었다.”
화분에 그대로 둔다고 해서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자라고 말 것이다. 그대로 두면 크게 자라나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껏 자라날 수 없는 환경에서 마음껏 자라날 수 있는 환경으로 옮겨준 나무는 화분에서와 달리 더욱 힘 있고 자유롭게 자랄 것이다.
농부는 나무에게 더 좋은 환경이 무엇인지 알지만 화분 속의 나무는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오래 살아온 곳,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하고 편안한 그곳을 떠날 마음이 없다. 그래서 ‘떠남에 대한 저항’을 한다.
하지만 농부는 포기하지 않는다. 힘을 주어서라도 뽑아낸다. 뿌리째 뽑히면서 나무는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항의했을 수 있다. 하지만 농부는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의 환경이 나무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는 들어도 자라지 못해 왜소한 모습으로 남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본토 아비집을 떠나가는 야곱을 보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화분에서 정원으로 나무를 옮겨 심는 농부처럼 일하고 계시다. 자녀들을 적당한 곳, 최선의 장소로 옮기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움직임을 통해 시작된다. 하나님은 그 걸음을 앞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신 1:33)
더 나은 성장을 위한다는 목표는 두 번째다. 야곱처럼, 요셉처럼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거처를 옮겨주시는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느 곳이 가장 좋은지를 아신다.
매우 이상한 곳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그곳이 사실은 맑은 물 흐르는 시냇가다. 지금은 모르지만 알게 되는 때가 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 당시에는 더 좋은 곳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오해한 적이 많았지만 지나온 곳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