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돈과 그 소중한 티켓을 맞바꿀 셈이냐?" 로알드 달이 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챨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대사다.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초콜릿 속에 든 5장의 골든 티켓을 발견한 어린이들을 자신의 회사로 초대하겠다는 광고가 난 후, 초콜릿을 좋아하는 세계의 어린이들은 열광한다. 하지만 초청대상은 오직 5명뿐. 그야말로 세계적인 경쟁률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챨리는 그 회사를 꼭 방문해 보고 싶어 하지만 집은 일 년에 초콜릿 하나도 구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다. 지붕은 뚫려 밤하늘이 보이는 언제 무너져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허름한 판잣집에는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침대에 누워만 지내는 네 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밥벌이조차 버거운 꾀죄죄한 부모가 함께 산다.
챨리의 마음을 아는 할아버지가 초콜릿을 사라고 비상금을 주어 간신히 하나를 구입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꽝이다. 그러는 중에 벌써 4장의 황금 티켓이 발견되어 미디어가 대대적인 보도를 한다. 풀이 죽을 대로 죽은 챨리가 길을 걷다가 눈 속에서 주은 지폐로 구입한 초콜릿 속에서 황금 티켓을 발견한다. 가게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500달러에 팔라고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황금 티켓을 보여준다.
초청 조건을 따라 동행하는 한 사람의 보호자로 할아버지가 가겠다고 하자, 챨리는 500불에 사겠다는 사람을 만났다며 티켓을 팔기로 했다고 한다. 가정의 형편을 뻔히 아는데 500달러의 값어치나 되는 티켓을 주고 초콜릿 공장에 방문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말한다. “밖에 나가봐라. 세상에 흔한 것이 돈이다. 그런데 그 흔한 돈과 그 소중한 티켓을 맞바꿀 셈이냐?"
그 말에 챨리도, 가족들도 모두 환호하며 챨리와 할아버지가 초콜릿 공장에 방문하는데 합의한다. 가난의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할아버지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로알드 달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할아버지의 옷을 입고 작품에 참여한 듯 보인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한국을 비롯해 17개 선진국 성인 1만 9천 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는 무엇인지’를 물어본 결과, 응답자들이 첫째로 꼽은 가치는 가족(38%)이었다. 이어 직업(25%), 물질적 풍요(19%)가 2,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조사 대상국 중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삶의 가장 큰 의미로 꼽았다.
가족은 물질적 풍요, 건강에 이어 3위에 그쳤다. 통계 조사가 보여주는 한국은 사람도, 하나님도 삶의 중심이 아니다. 오직 돈이다. 돈은 당연한 듯 왕처럼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다. 가진 돈의 크기를 따라 자리가 정해진다.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신앙인 나라다.
가진 자는 으레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도 마땅한 일로 여긴다. 찢어지게 가난한 찰리의 할아버지는 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저 거지 행색의 할아버지가 당연히 돈 앞에 굴복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러한 예상과 달리 할아버지는 말한 것이다. “찰리야, 그깟 돈 때문에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놓친다니 말이 되느냐? “
그의 말이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모두가 다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연어처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 때문에 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가진 자들 앞에서 당당할 것이다. 물질을 사람보다, 사람의 추구하는 꿈보다 더 높게 두지 않을 것이다. 물질의 유혹에 휩쓸리는 사람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물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을 제자리에 두고 사용하는 사람으로 살 것이다. 많은 물질을 소유할지라도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고, 물질과 진정 소중한 가치를 맞바꾸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많은 물질을 물려주는 것보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줄 아는 관을 전해주는 윗 세대는 얼마나 존귀한가! 세월이 흐를수록 찰리 할아버지와 같은 그런 어른이, 그런 이웃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