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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비유는 일상적 언어 규범에서 일탈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언어 용법이다. 은유·직유·제유·환유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라는 뜻을 가진 ‘유’(兪)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는 일상 언어를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보자. 이 ‘병아리 부리’ 속에는 노란 색깔 이외에도 개나리꽃의 모양, 꽃잎의 연약함, 봄의 이미지 등이 첨가된다. ‘노랗다’는 일상 언어의 평이함이 전면 확장되어 의미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과 대상 연결하는 ‘은유'〉
〈비틀고 꼬며 덧칠해야 할까〉
여러 가지 비유 중에 은유는 차별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 중의 하나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대립적인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선언한다”(<활과 리라>)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시는 은유의 덩어리다. 은유적 표현을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양식이 은유에 기대어 태어났고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때로 은유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도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구모룡의 <제유의 시학>에 따르면 시는 근대적 개념인 세계의 자아화나 동일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다. 다시 말해서 은유는 대상과 대상을 강제적으로 연결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은유적 욕망이 근대에 와서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타자에게 폭력적”인 은유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유 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말을 비틀고 교묘한 표현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일찍이 허균도 가세했다. “<서경>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명문장을 보라. 모두 문장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어려운 말로 교묘하게 꾸민 구절이 있는가? (중략) 제자백가서만 보더라도 모두 자신들의 도리를 논했기 때문에 그 글은 쉽고 간결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는 문장과 도리가 둘로 쪼개져 마침내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이야말로 문장의 재앙이다.”(허균 <성소부부고>)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
수원 근처에 오천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
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천상병의 시 <땅>이다. 시인은 가진 땅이 한 평도 없어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땅을 가지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소유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 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런 게 무슨 시인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이 시에는 시적인 비유도 없고 시적인 발견도 없다고, 이런 시라면 하룻밤에도 수십 편을 쓰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천상병이라는 유명한 시인이 쓴 것이니까 좋은 시라고 추어올리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는 아주 작지만 근원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땅을 가진 뒤에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거나 거기에 부동산을 짓겠다는 투기 욕망 따위는 일절 없다. 오히려 그런 심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인은 그저 초목과 꽃을 심겠다고 한다(그러다 보면 땅값이 오르겠지, 하고 의심한다면 당신은 정말 속물이다). 이러한 단순성의 미학이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만들었다.
이 시에서 무욕의 욕망을 읽고 은유 아닌 은유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은유의 성채 입구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져 은유를 배우지 마라. 은유를 잘못 배우면 말을 요리조리 비틀고 무슨 문장이든 꾸미려 하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 시의 전부인 줄 알게 된다. 나는 그것을 ‘비유의 덧칠’이라고 부른다. 비유를 덧칠하지 않고 단순한 상상력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저녁에 술 마시러 나갈 때 천상병의 이런 시 구절을 흥얼거릴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주막에서> 일부분)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미당이 작고하기 두 해 전, <현대문학> 1998년 1월호에 발표한 시 <내 늙은 아내>다. 그 한 해 전에 나온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도 그렇지만 말년에 미당은 여든을 훨씬 넘은 나이에 놀랍게도 소년의 목소리를 얻었다. 어른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년은 단순하게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삶의 갈등과 고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에 나타나는 이 단순성은 이 세상을 한 바퀴 휘휘 돌아본 뒤에 마침내 다다른 시선(詩仙)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인생의 산전수전 끝에 미당은 천진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특정한 틀에 갇히지 말고〉
〈천진난만한 상상 표현하길〉
내 아내는 여기 등장하는 ‘늙은 아내’와 달리 내 담배 재떨이를 아침저녁으로 비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내 재떨이는 담배꽁초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버린 휴지 조각, 방바닥에서 집어낸 머리카락, 손톱 따위들을 담는 쓰레기통쯤으로 취급되어 왔었다. 나는 이 시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보고 뭔가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날부터는 정말 내 재떨이도 확연히 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담뱃재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재떨이를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담배 재떨이는 대체로 둥글다. 그 둥근 모양과 부부 관계가 알맞게 버무려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름달을 떠올린다. 모자라는 것도, 더 채워야 할 것도 없는 보름달의 원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사랑의 종착지를 상징한다. “아 내곁에 누어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戀人(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눈 오시는 날〉 일부분) 그동안 미당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던 초생달의 이미지는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환한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다. 미당은 자연스럽게 보름달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단순함의 힘이다.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이다. 근래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행복했다. 특정한 개념과 틀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이 이런 유쾌한 시를 생산했다. 엉뚱함의 힘이다. 꽃이 소를 웃겼다고, 소의 발바닥을 간질였다고, 연약한 꽃이 육중한 소를 살짝 들어 올렸다고 한다.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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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여우난골족 / 백석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벌 : 매우 넓고 평평한 땅
고무 : 고모, 아버지의 누이
매감탕 :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혹은 메주를 쑤어낸 솥에 남아 있는 진한 갈색의 물.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오리치 : 평북지방의 토속적인 사냥용구로 동그란 갈고리 모양으로 된 야생오리를 잡는 도구.
안간 : 안방.
저녁술 : 저녁밥. 저녁숟갈.
숨굴막질 : 숨바꼭질.
아릇간 : 아랫방.
조아질 :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해찰을 부리는 일. 평안도에서는 아이들의 공기놀이를 이렇게 부르기도 함.
쌈방이 : 주사위
바리깨돌림 : 주발 뚜껑을 돌리며 노는 아동들의 유희.
호박떼기 : 아이들의 놀이
제비손이구손이 : 다리를 마주끼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로 세며, '한알 때 두알 때 상사네 네비 오드득 뽀드득 제비손이 구손이 종제비 빠땅' 이라 부르는 유희
화디 : 등경. 등경걸이. 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 놓은 기구.
사기방등 : 흙으로 빚어서 구운 방에서 켜는 등.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처마의 안 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동세 : 동서(同壻).
무이징게국 : 징거미(민물새우)에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인 국
백석(白石) 연보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백시박과 이봉우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본명 :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 :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백용삼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적인 인물로<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침.
1918년(7세) 오산 소학교 입학.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 오산 학교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함.
1929년(18세) 오산 고등보통학교(오산학교의 바뀐이름)를 졸업.
1930년(19세)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등단.
이해 3월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 유학.
토오쿄오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 영문학 전공.
일본의 민중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문학에 심취하여,
자신의 필명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와 지음.
1934년(23세) 아오야마학원 졸업.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함.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잡지인 <여성(女性)>지의 편집을 맡음.
조선일보를 통해 외국문학 작품과 논문을 번역하여 실음.
1935년(24세) 8월31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시인으로도 등단.
이후 소설은 별로 쓰지 않고 시를 주로 창작함.
조선일보에서 그해 창간한 시사잡지 <조광(朝光)>지 편집일을 함.
1935년(24세) 6월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남을 '란(蘭)'을 만남.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통영 출신의 란은 백석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는다.)
1936년(25세)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
4월에 조선일보사 사직,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부임.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짐.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줌.)
1937년(26세)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러시아말을 배움.
고향에서 결혼하라는 독촉을 받고 혼례식을 했으나 초례만 치른 후, 다시 자야에게 돌아옴.
그러나 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 혼자 서울로 떠남.
1938년(27세)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 교사였던 백석은 전선(全鮮)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함.
이때 자야와의 재회. 그러나 축구부 선수들의 유흥장 출입으로 말썽이 나자,
함흥학원측으로부터 영생여고보로 문책 전보.
몇 달 후 영생여고보를 사임하고 다시 서울로 와서 <여성>지를 편집함.
1939년(28세) 다시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나 다시 혼자서 서울로 올라옴.
이 사실을 알 게 된 자야는 다시 백석 곁을 떠남.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
1939년(28세) 1월 26일 조선일보에 재 입사.
백석은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 감.
1940년(29세)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6개월 가량 근무, 창씨개명 강요로 곧 사직.
북만주의 산간오지를 기행함. 평론 <슬픔과 진실>을 만선일보에 발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를 서울 조광사에서 번역 출간.
1940년(29세) 40년도에 들어와서 백석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를 굳건히 함.
1941년(30세) 생계 유지를 위해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생활을 함.
1942년(31세)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 등을 번역.
1944년(33세)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의 광산에 숨어서 일함.
1945년(34세) 해방 후 귀국,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함.
1946년(35세)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에서, 고당 선생의 통역비서로 조선 민주당에서 일함.
백석은 평양 권번 동기 출신의 여성과 동거중이었다고 함.
1947년(36세) 시 <적막강산>을 <신천지>에 발표.
분단 이후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한국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매몰됨.
러시아 작가 씨모노프의 <낮과 밤>을 번역 출판.
1948년(37세) 김일성 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짐.
1949년(38세) 숄로호프의<고요한 돈강>과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 이사꼽쓰끼의 시집 번역 출판.
1950년(39세)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 군수로 추대했다고 전함.
1953년(42세) 파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
1954년(43세)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번역 출간.
1956년(45세) 아동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등의 평론 발표.
10월에 열린 제 2차 작가대회에서 <문학신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문학신문>에서 일함.
1957년(46세) 4월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출판.
<아동문학>4월호에 <멧되지>외 동시 3편을 발표하여 아동문학 논쟁을 촉발시킴.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논쟁을 함.)
1958년(47세) 8월에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
10월 이후 부르주아 잔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위축됨.
1959년 이전까지 평양 동대원구역에 살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창작실’에서
러시아 소설과 시 등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9년(48세) 시 <이른 봄> 등 7편을 <조선문학>에 발표함.
1월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함.
그 동안 전혀 발표하지 않았던 시를 쓰기 시작함.
1960년(50세) 이해 12월 북한의 <조선문학>지에 시 [전별] 등 2편을 발표함.
1961년(51세) 12월 그의 마지막 시작품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
그 이후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음. 아마도 숙청된 것으로 짐작됨.
1962년 10월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활동 중단.
1987년 첫 시집 <사슴> 이후에 발표된 시 작품 등 도합 94편을 정리한 <백석시전집(이동순 편)> 발간.
1987년 시집 <박각시 오는 저녁>과 <백석전집>이 새문사에서 출간.
1988년 김자야 여사의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창작과비평>지에 발표.
1988년 백석 전작시집 <가즈랑집할머니> (새문사) 간행.
1989년 백석 전작시집 <흰 바람벽이 있어> (고려원) 간행.
1990년 시선집 <멧새소리>가 미래사에서 출간.
1990년 백석에 관한 많은 자료가 수집되어 실린 <詩人 백석 일대기 1, 2권> 발간.
1994년 <백석일대기1·2>가 도서출판 지나에서 출간.
1995년 <백석시전집>이 학영사에서 출간.
1995년 {내 사랑 백석}(김자야 저)이 문학동네사에서 발간됨.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짐.
1996년 {백석}(정효구 편)이 문학세계사에서 간행됨.
1996년 백석시전집 {여우난골족}(이동순 편)이 솔출판사에서 간행됨.
1996년 백석문학론집 {백석}(고형진 엮음)이 도서출판 새미에서 출간됨.
199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가 도서출판 시와 사회에서 출간됨.
1997년 {백석전집}(김재용 엮음)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됨.
1998년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어 창작과비평사 주관으로 시행됨.
1998년 정본 백석시전집 {모닥불}(이동순 편)이 솔출판사에서 발간됨.
1999년 백석문학상 제정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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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흰 밤 / 백석
<백석이 사모한 사람 란 > <북한에서 새로 이룬 백석 가족>
<백석이 사모한 김지향>
흰 밤
백석
옛 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아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朝光> 1935년 11월 수록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