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등장하는 드라마에는 비슷한 줄거리와 결말이 있다. 대체로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힘 있는 누군가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을 경험할지라도 결국은 갚아줄 것을 시청자는 이미 알고 있다. 관심은 얼마나 적법하고 기발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가이다. 주인공이 지금 당하고 있는 부당한 폭력은 때가 되면 되돌려줄 응징의 명분이 되는 셈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가정 폭력을 심하게 받은 아이가 부모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겉돌거나 관계를 끊고 살기도 한다. 지켜보는 이들도 “안타깝지만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며 공감하고 응원하기도 한다. 그 길이 최선일까?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아들러는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과거의 상처를 되풀이해서 말하는 이유는 관계 회복을 원하지 않아서다. 화해할 의도가 없기 때문에 ‘원인’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관계 회복이라는 ‘목적’에 집중한다면 상처의 깊고 얕고를 떠나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사람처럼 가능한 길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원인에 주목하여 살아가면 와신상담하듯, 자신만의 감옥, 곧 상자 속에서 살아간다. 상대방을 향한 최대한의 자비란 피차 상관하지 않고 남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보란듯한 성공이나 성취도 복수심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목적에 주목하여 살아가면 어떻게든 관계를 개선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과거의 상처는 괴롭고 아프지만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찾을 것이다. 안 당해 봐서 속편한 소리를 한다고 말할지라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상대방의 필요를 찾고 채우려고 할 것이다.
원인에 집중하는 삶은 과거에 매인다. 과거에 산다. 자기 기만을 강화시키며, 복수심을 키우며, 상자 속에서 살아간다. 목적에 집중하는 삶은 미래 지향적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한다. 타인을 위해 공헌하는 길을 찾고, 배려심을 키우며, 상자 밖에서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인에 집중하여 살고 있을 수 있다. 의지를 가지고 목적에 집중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분별은 더 좋은 편을 구별하는 일이다. 좋은 방향 위해 용기를 낼 때, 삶은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된다.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이 우리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묶임을 완전하게 푸셨다는 표지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용서를 흐르게 하는 삶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방향인 것을 보여주는 표지다.
그 표지는 우리가 복되게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인도를 따라 가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미래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믿음은 그 삶을 향한 작은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