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동안 친구처럼 지내던 소를 묻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몸이 아픈 남편을 보고 고장 난 라디오 같다며 호쾌하게 웃던 아내도 얼마 뒤 그 뒤를 따랐다. 돌볼 소가 세상을 떠나면서 할아버지는 기운을 잃어갔고, 돌볼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 또한 기운을 잃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 14:4) 두 부부가 소를 통해 얻은 유익은 다만 경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도, 내일에 향한 꿈도,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도, 관계를 통한 넉넉함도 얻었다. 돌봤던 것에서부터 죽지 않고 살 힘이 흘러나왔다.
공헌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그 대상으로부터 얻는 것이 많다. 부모의 자리가 복된 이유다. 누가 누굴 섬긴다는 얘기 너머,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줌으로써 얻게 하시는 것이다. 자신에게 세팅된 마음이 이웃을 향해 전환될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랑, 섬김, 돌봄, 헌신, 공헌이 그렇다.
공헌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따른다. 하나님이 두신 이치다. 나무를 돌보는 일이어도 마찬가지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잠 27:18) 공헌을 모르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은 유익이 없다. 이기심에 충만한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을까?
공헌에 세팅된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 13:4,5) 그 마음일 때,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살만해진다. 공헌이 사라지면 향기도, 힘도, 삶도 사라지고 공헌이 나타나면 한 겨울 눈 밭의 복수초와 같은 꽃이 핀다. 공헌이 없는 자기 계발은 공허하다. 향기 없는 꽃 같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다.
열쇠를 넣어야 문이 열리듯, 공헌해야 길이 열린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주고 또 주려는 마음에 길이 있다. 참되게 살 길이 있다.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길이다. 자신을 내어주신 아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길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위한 아버지와 아들의 공헌이다. 그 공헌이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지를 안다. 공헌에 세팅된 마음으로 살도록 돕고 계시다. 더욱 풍성한 삶을 얻는 비밀을 배우게 하신다.
공헌은 주님의 마음이다. 생명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따라 이 세상에 치유와 회복, 소생과 부활의 강이 만들어진다. 그 삶을 사는 자들이 교회다. 그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그 생명의 강이 흐른다. 그 양이 더욱 증가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