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축구에 매혹될까? 단순명쾌한 힘의 대결을 보는 기쁨이다. ‘슈팅’의 작가 전세훈은 이렇게 말한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흩어지는 흙먼지를 본다. 거친 호흡과 튀어나올 듯한 힘줄, 사방으로 뿌려지는 땀방울을 본다. 그리고 비로소 그물망에 꽂히는 공을 본다. 나는 가슴벅찬 결정의 그 순간이 좋다.”
‘슈팅’의 주인공은 나동태. 그의 강점은 정확한 슈팅이다. 그런데 공격이 어디 슈팅력만 가지고 되나. 드리블과 패스 능력을 갖춰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후반을 버틸 수 있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심폐기능이 약해 20분을 버티어 내기도 힘들다. 그걸 제일 잘 아는 아버지가 말한다. “난 네가 축구를 즐기길 원할 뿐 승부에 빠지질 않길 바란다. 축구에 승부를 걸게 되면 너무 많은 걸 잃게 된다.”
어디 축구뿐일까? 승부를 걸게 되면 어디서나 전부 아니면 전무가 된다. 그러니 즐기기 위해서는 승부사가 되면 안되지만, 즐기다 보면 승부를 걸게 되는 건 생의 숙명이다. 한 존재가 사라져가고 다른 존재가 우뚝 서는 승부의 세계는 빛과 그늘이 명확하지만, 그 곳에 다른 것이 개입되지 않고 순수한 힘의 대결만이 있을 때, 생사를 건 투쟁이 빚어내는 긴장감은 차라리 아름다움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대결을 왕좌를 놓고 다투는 수사자들에게서 보았다.
사자왕이 늙고 힘이 빠지자, 힘센 젊은 사자가 때를 맞았다. 젊은 사자가 힘으로서 사자왕을 이기던 날, 사자왕은 왕좌를 버리고 떠났다. 그 속에는 적자생존, 약육강식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승부엔 거짓이 없었다. 거기엔 무기도 없고 술수도 없고 위선도 없고 기교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옛날에 잃어버린 원초적인 힘의 대결, 바로 깨끗한 승부의 세계였다. 그리고 승부의 결과에 이의 없이 승복하는 비겁하지 않은 고독한 정신이었다.
승부의 세계는 분명하게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그렇지만 패자로서 많은 걸 잃어도 또 그 만큼 배우게 만드는 세계가 거짓없는 승부의 세계다. 그 세계는 그 자체로 생이기 때문이다.
‘슈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비어 있는 골대에 공을 넣는다는 건 쉽다. 그러나 수비와 골 키퍼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드리블이 있어야 하고 패스도 있어야 한다. 상대 수비의 태클도 뛰어 넘어야 한다. 슈팅의 순간까지 멀고 험난한 길이 된다.”
인생은 곳곳에 함정과 장애가 많은 경기라는 점에서 축구를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동태는 인생 그 자체를, 혹은 축구 그 자체를 닮았다. 동태는 축구를 하기에는 존재 자체가 장애고 함정이기 때문이다. 심폐기능이 약한 몸은 지구력이 떨어지고 193cm의 큰 키는 오히려 유연성을 방해한다. 그렇게 문제 많은 몸으로 동태는 왜 축구를 사랑하는가? 그의 축구인생은 그의 결정적인 약점 만큼이나 고달프다. 고달파도 그는 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원래 사랑은 지칠 수 없는 열정이니까. 그는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차도 오르기 힘든 급경사를 오르내리고, 새벽엔 달동네에서 신문을 돌린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마침내 성공하는 골. 그 때에는 함께 고백하게 된다. 그물망에 꽂히는 공이 아름다운 건 장애가 많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