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세월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고 가끔씩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하교길 학교 앞에는 어른 팔뚝이나 다리 두께의 칡을 리어카에 가져와 조금씩 썰어서 파는 아저씨가 자주 보였던 때다. 군것질할 것이 많지 않았던 그 시대에 칡은 친구들 사이에 제법 인기가 있었던 메뉴였다. 나무칡은 씹어도 단물이 조금 나오다 말지만 밥칡은 마치 흰 밥알이 들어있는 것 같았고, 한번 씹으면 단물과 함께 칡 고유의 향이 입안 가득찼다. 그때의 추억으로 훗날에도 찻집에 가면 칡차를 주문하곤 했다.
한 날은 깨복쟁이 친구 5명이 그 칡을 캐볼 거라고 수원지 근처 산자락을 올랐다. 각자 칡이파리를 찾아 줄기를 파보았으나 기대했던 칡뿌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친구만은 예외였다. 파면 팔수록 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팔 같던 칡이 어른 팔처럼 굵어지더니 어른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사이즈가 굵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각자 파던 것을 포기하고 그 구덩이 주변에 몰려 앉아 “와, 저것 봐. 엄청나다~”하며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친구들이 돕겠다며 거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 친구는 정색을 하고 군인처럼 명령했다. '손대지 마!’ 갑자기 무안해진 우리는 친구의 명령에 복종이나 하듯 아무도 칡 주변의 흙에도, 돌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변변치 않은 도구로 지치지 않고 구덩이를 파던 그 친구는 마침내 자기 키만 한 칡뿌리 하나를 캐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 맛을 볼 차례라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나, 먼저 갈게!”라는 짤막한 말 한마디를 남기더니 칡을 어깨에 지고 혼자 산을 내려가 버렸다. 네 사람은 멋적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흥도 힘도 다 빠져서 그대로 터벅터벅 돌아오고 말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커다란 칡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던 것 같다. 크고 탐스러운 칡을 발견했으니 그럴만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예리한 면도칼에 배인 듯했고, 나무칡을 씹은 듯한 씁쓸함으로 남았다.
혼자 발견하고, 혼자 캐내고, 혼자 가져간 것에 대해 남이 뭐라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함께 캐고, 함께 땀 흘린 후, 함께 씹어먹으며, 함께 헤헤 히히거리며, 함께 산을 내려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곤 하는지 모르겠다. 칡 한 뿌리를 취하고 네 명의 친구를 뒤에 두다니… 대학을 졸업한 후 그 친구는 증권사에 취직했는데 나중에는 대표이사가 됐다는 뉴스를 보았다. 죽마고우이니 언젠가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 칡도 함께 떠오르는지.ㅎㅎ
신앙 생활하면서 대학이나 대학원, 직장이나 결혼 등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선물을 받는 친구들을 보는 때가 있다. 교회가 함께 기도해 온 일이니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어서 함께 내 일처럼 기뻐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선물을 즐기기 위해 주님과 동행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말씀 앞으로 나오는 것을 멈추고 혈육 이상으로 끈끈했던 친구들과 연락을 끊기도 한다. 당장은 커 보일 수 있으나 주님과의 관계나 계획에 비하면 일시적이고 소소하기까지 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도 작고 작은 지파의 작고 작은 사람인 사울이 왕이 되자 보이는 것이 없어졌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이 보내신 종도 보이지 않았다. 왕이라는 자리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바로 그 선물에 취해 그 선물을 주신 분과의 관계를 내려놓은 것이다. 꼭 들어야 하는 말씀도 가볍게 듣거나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신앙 훈련은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때로는 너무 혹독하지 않은가,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신앙적인 훈련을 시켜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순간에도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을 내려놓는 일이 없도록, 아무리 강하게 책망해 오셔도 그분을 떠나는 대신에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