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요약 소개한 짧은 영상 하나를 보았다. 일본 영화였는데 제목은 [렌털 친구]였던 것 같다. 상사의 프레젠테이션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한 여인이 있다.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상사가 고맙다고 하며, 사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지를 묻지만 여자는 거절한다. 그 여자는 남자가 자신감을 갖기 위해 돈을 주고 빌린, 렌털 친구였던 것이다.
나중에 길을 지나다가 마주친 그 남자는 회사원이 아니라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이 이야기를 여자 친구에게 나누며 깔깔대며 즐거워한다. 그런데 그 여자 친구도 사실은 돈을 주고 빌린 렌탈 친구였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대화 상대마저 돈을 주고 빌려야할만큼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AI가 모든 것을 대신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멈출 수도 없고 돌아나갈 길은 더욱 없다. 고속도로에 일단 진입한 차처럼 계속 나아가야 한다. 역주행을 생각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시대다.
멈추지 않는 하차는 없다. 고장나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판기 시대, 무인 판매기 시대, 키오스크 시대가 왔다. 자전거도, 전동기도, 차도 다 빌려서 사용하는 시대다. 사람이라고 안 될까?
돈이나 집, 땅만이 아니라 아내나 남편의 역할을 해주는 일, 친구 역할을 해주는 일도 이미 퍼지고 있는 시대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이용하면서 살아내면 되는 것일까? 사람이 사라져도 ’삶‘은 있는 것일까? 시리나 빅스비와 같은 앱이 있으면 충분할까?
렌털 부모, 렌털 자녀, 렌털 가족의 시대는 먼 얘기일까? 밀키트처럼 먹는 일은 있으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생략된 사회다. 분명 사람과 대화하는 중이나 관계는 없다. 이런 시대의 목회는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관계부터 배우고 회복하지 않으면 원치 않게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처럼 괴로운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화목케 하는 일로 오셨다. 깨어진 관계의 회복자로 오셨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웃이 있는 삶, 사랑의 관계가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우리가 선택한 길이다.
그 길을 가는 자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 약속이 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5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