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길 권두칼럼 07>
견자(見者)의 대응과 사물시(事物詩)의 차별화
- 정계원 시인, 그 감성의 울림과 자존감의 눈부심
엄창섭(가톨릭관동대학 명예교수, 김동명학회 회장)
1. 채색어의 식별력과 매혹적 특이성
월간 『禪으로 가는 길』 권두칼럼의 글머리에서 눈부신 삶의 일상을 절제된 감정으로 적확하게 풀어쓴 「채색어의 식별력과 매혹적 특이성」의 구도적 해법은 신선한 감동을 회복시켜줄 심적 치유의 생명감에 맞물려있다.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일상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때로는 운명적이다. 사적으로 현재 평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김동명학회의 간사와 김동명문학관의 상주작가로 활동 중임에도 그 자신의 제3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純粹文學, 2022)를 출간해서 평자의 생일에 직접 전해준 정계원 시인의 따뜻한 손길도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또 한편 일반적으로 사물시(事物詩)의 개념은 미국의 비평가 랜섬(John Crowe Ransom)이 체계화시킨 관념시와는 별개로 차별성을 지닌 이미지즘적 일면은 한번쯤 되 뇌일 바다.
소소한 일상의 삶에서 애매모호함으로 그 의도하는 지향성이 다소 불확실할 때 간혹 갈등의 퇴행적 양상이 동시대의 대다수 독자들에게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정황에서도 짐짓 묵시적으로 관망할 점이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시집 『밀랍물고기』간행이후에 다시 묶어낸 시집의 자서(自序)인 「시인의 말」에서 “꽃을 열매로 바꾸어 보려고 두 무릎을 꿇고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의 발아래에서 잠을 잔다.”는 시적 해명은 자못 처연(悽然)해 느꺼운 심사(心事)다. 일단 시집의 편집구성은 「1부 목마른 건기의 내 손금(15편), 2부 꽃으로 피지 못한 채(15편), 3부 징으로 어둠을 깨다(15편), 4부 시간의 태엽을 풀며(15편)」의 보기처럼 총 60편의 시편은 결(結)고운 옷감처럼 섬세한 기승전결 구조로 짜임새 있게 직조(織造)된 모양새다. 차제에 서정성의 결핍으로 미적 주권의 확립이 힘겨운 한국현대시단의 현상이지만 일관된 집념과 주의집중으로 불멸의 시혼을 마그마(Magma)처럼 분출시켜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피워내며 ‘육체를 찢어 피를 흘리는 긋다(文)’에 기인(起因)한 충격적인 정신작업은 심리적 응축의 결과물이다. 앞서 영국의셰익스피어가 『사랑의 헛수고』(4막 3장)에서 “사랑이 말을 할 땐 천상의 모든 신들이 소리를 맞춰 합창하며 온 하늘 전체가 황홀해진다.”고 역설하였듯 새로운 시문학지형도를 펼쳐 보이며 비록 불자(佛者)임을 자처하지 않아도 그 자신의 차별화된 이미지의 형상화는 시적인 여과과정을 걸쳐 말끔히 칙칙함마저 씻겨내었기에 담채색의 수묵화에 견주어진다.
각론하고 그 자신의 내면의식과 기법, 그리고 담백한 시격을 삶의 공간에서 각별한 관심으로 다독이며 예리한 시선으로 응시한 끝에 「미의식의 지평을 여는 언어 아티스트」로 구도 처리한 심은섭 문학평론가의 “정계원 시인은 매우 조용한 어조로 시의 정서를 자아낸다. 어조가 조용한 반면에 작품이 전하는 의미는 매우 강렬하게 증폭되어 전달된다. 부드러우면서 강한 면모를 들러내는 시편들이 시집 속에 실려 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 역시 독자들로부터 많이 애송되리라는 기대를 해보는 이유다.”는 친근한 시집해설은 의미와 육성, 느낌을 분할․통합하는 차별성의 동기부여에 의한 모더니티한 키워드이며 존재감의 빛남이다.
일단 그 자신이 사변성(思辨性)에 힘입어 풀어쓴 <불영사 거북이>를 포함하여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리는 인력꾼을 위해/허기의 원을 헛도는 독수리를 위해,//썪어간다/모든 것이 다 비워진 들판을 걷는 그는 붓다다(붓다의 발자국)”의 보기나 또는 “108배를 끝낸 산제비가/절름거리는 벚나무를 데리고 온다(야단법석)”에서 절감되는 시적 정조는 지극히 선적(禪的)인 동시에부당한 구속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인임을 열망하는 것이다. 한편 “그 푸른 여승은 사라지고 이끼 낀 돌탑도 사라지고, 지천명의 강을 건너는 나도 사라지고 내장을 비운 목어만 말라가고 있다(소금강 금강사)”의 보기나 “그는 밤마다 잰걸음으로 마을로 내려와/개똥이 집에는 법문이 자비를 주었으리라(마애여래불상)”에서 확증되듯 맑은 목어(木魚)의 울림을 불심에 담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수긍하며 “산정에 올랐으면 뗏목이 필요 없거늘 어찌 사공에게 길을 묻는가?”라는 자기성찰로 수행자의 길을 걷는 소회는 그만의 특이성이다. 무엇보다 일관성을 지닌 시편 <빈 항아리>에서 “오랫동안 몸을 비우고 장독대에 앉아있는 그의 몸속을 들여다본다”의 서사적 구조를 통한 ‘비움과 내려놓음’의 일맥상통도 그렇지만 “연금술사가 되려고 어둠에 젖어 펄럭이는 밤/열두 시에 나는 시작법을 들고(불안시詩불안)”의 보기와 같이 “힘없이 대웅전으로 기어가는 지렁이에게 난, 그늘 한 조각 내주지 못했다(바위 속으로 들어가 보다”에서도 새삼 입증되고 있다. 이처럼 시 짓기에 몰두하며 높은 가지 끝에 차오르는 물의 강인성과 자연이법을 일체 거역하지 아니하고 겸허한 생리로 그 접점의 연계성을 건강한 생명의 기표로 평상심을 지켜내는 비법은 무위자연과의 합일이기에 보다 더 시사적(示唆的)이다.
2. 경계의 추이(推移)와 존재양식
누군가와의 내밀한 언약도 잠시 미루어놓고 겨울 나그네의 발걸음도 끊긴 적막한 산사(山寺)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며 헤집고 보아야 다시금 시적 교감을 체득할 것이나 그 같은 관심사(關心事)로 새로운 정신적 결과물에 관한 전의식(前意識)은 ‘가슴 설렘 뒤의 낯선 환경, 풍물, 느낌 등에서 비롯되는 기대․긴장감’에 의해 비로소 가슴 떨리는 전율로 가늠될 것이다. 응당 한편의 시는 ‘불멸의 혼이며 신념’이기에 ‘A=B’라는 은유적 수사처럼 “서산을 넘지 못한 낮달을 나눠 먹는다/다시 하늘이 텅 비어 간다(용궁벚꽃축제)”에서도 새삼 밝혀지듯 그 자신의 추상작업(object)은 고통과 저항을 실험의 시적 질료로 표출하지 아니하고 상상력의 획일적 처리이기에 언어의 식별력은 유형의 인상에 의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한편‘가장 지상적이며 여성상징인 꽃’과 총체적 의미로 비중 있게 관심을 기울인 시편의 일례로 “화려하게 살다 가는 순간의 몸짓, 짧고 굵은 생의 꽃이다(눈꽃)”을 포함하여 “한 여승이 오늘도 가사를 키운다//...생략...//관음보살이 물위에 앉아 기도하고 있다(빅토리아가시연꽃)”의 보기에서 날아오름이나 새로운 만남으로 낯설고 불투명한 소외감은 해소될 것이나 정계원 시인이 불성(佛性)을 꽃으로 형상화한 시편에서 자연의 이법을 묵언으로 관조(觀照)하며 불확실한 삶의 일면을 신선한 감동으로 안겨주는 현상은 못내 이채롭다.
어디까지나 ‘상징의 숲’을 거니는 존엄한 존재인 시인은, 푸른 생명의 언어로 죽어가는 대상도 사랑해야하고 또 생명적인 형상으로 빚어내는 막중한 소임을 담당해야 한다. 까닭에 사회적 생태론의 창시자인 머레이 북친(MurrayBookchin)이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무너트려야한다는 가르침의 일면에서 “하얀 핏빛의 둥근 우주도 빚어내고 있다(아라비카커피나무)”를 포함하여 즉물적 대상에 잇닿은 일련의 시편도 눈여겨 볼 바다. 또 한편 “그녀의 꽃잎 속에서/흰뼈를 드러낸 그가 서서히 저물어 간다(모가지가 긴 감자꽃)”의 예시나 “들짐승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힌 도시,/라일락꽃은 흔들리며 또 강철처럼 홀로 산다(도시의 라이락꽃)”는 무론하고 ”또 그렇게 사치스러울 수 없어요. 그래서/죄송하게도 할 수 없이 내 몸 어느 곳이든//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돋아나게 했어요(장미꽃의 고백)“의 상오관계에서 ‘하늘의 별, 땅위의 꽃, 마음에 詩’라는 상징적 의미의 투명성은 적조(寂照)해 눈물겹다. 차제에 철학자 뷔퐁(Buffon)이 문체론에서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역설처럼 지극선의 심성을 지닌 정계원 시인이 푸른 식물성인 꽃과 나무를 읊조린 ‘무심, 무욕의 경지에서 발현된 서정적 미감’은 관조와의 상통으로 자못 경이롭다. 이처럼 사물의 현상에 의한 당위성이 주어지기에 ‘그냥 봐라’라는 묵언의 가르침은 일체의 변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까닭에 지극히 개아의 일상화는 섬세함과 담백한 시격의 재창조와 잇닿아 ‘수행자로서의 본질적 집념은 생명경외심을 일깨워주기’에 그만의 존재감은 빛남이다. 그렇다. ‘언어의 연금술사’인 R. M 릴케의 “꿈을 지니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주장에 견주어 정신적으로 창조된 것은 물질보다 생명적이다.
특히 시적 상상력이 확장되어 생명의 교감을 일깨우는 행위가 스스럼없이 창조적 영혼과 결속되어 그만의 ‘육성과 체취, 느낌’이 또렷하게 형상화된 시편인 “동공이 풀린/눈동자 속에 천국의 문이 열려있다//살충제가 싸락눈처럼 쌓인 식탁,(침묵의 식탁)”의 보기나 또는 “슬픔의 그림자가 내 정수리로 몰려오고/푸른 눈물로 내가 나를 안고 밤을 지샙니다(번지 없는 둥근 집)”는 상이하게도 공해와 소음으로 찌든 사각형의 빌딩 숲에 자리한 도시공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행인들도 밤송이 같은 시선 한 덩어리를 던지고 간다 세느강은 침묵으로 진주목걸이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교각 사이로 빠져나간다(아프리카의 비가)”와 같이 ‘사넬가방 속에서 나온 화자가 거리를 활보하며’ 그 길 위에서 읊어낸 이국적인 정신풍경의 변주로 “암자의 목어소리가 잠든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블랙 롱코트)”는 시 심리의 반증으로‘네 속에 꽃이 있음’의 염화시중(拈花示衆)의 암유는 그 나름의 놀라운 충격이다. 까닭에 생명의 계절인 봄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의/촉감이다/모강으로 희귀하는 연어들의/눈빛이다 결코,/‘끝’을 모르며/‘시작’의 종소리일 뿐이다(봄)”의 보기나 “한 접시의 질긴 그리움을 발라내려는/이 봄밤,/한 여자가 해당화 빛 상사병을 알고 있어(또 봄밤)”에서처럼 ‘봄→또 봄밤’의 시적 발상의 이행은 삶의 일상화의 동질성으로 해명된다. 따라서 시각과 청각을 조화롭게 융합한 이미지의 형상화는 그 자신의 의식세계를 관통하는 지극히 감각적인 일깨움이다.
3. 시의미의 확장과 화자(話者)의 좌표설정
모름지기 생명의 촛불이 연소(燃燒)되기 전에 ‘인간과 진리, 그리고 자신에 대해 열정을 태우던 젊은 날의 그 순수한 감동’을 다시 불러내는 그의 시혼은 더없이 투명하다. 보편적으로 20세기 모더니즘을 주도하고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방식의 시적 기교로 독창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엘리엇(T. S. Eliot)이 “예술가의 과정은 계속적인 자기희생의 과정, 즉 계속적인 개성소멸의 과정임”을 역설한 점에 견주어 관용성을 따뜻한 감성으로 적절히 배합시켜 눈부신 존재감으로 빚어낸 시편은 그 양상이 이채롭다. 까닭에 서정시를 쓰기가 힘겨운 현상에서 아름다운 동행이란, 함께 우산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방향을 주시하며 함께 비를 맞는 행위이다. 차제에 ‘낯익은 마당에 먹물 빛 어둠이 풀어지는 정황’에 맞물려 “그의 흔적이 선명한 사랑방 헛기침 소리가/천상에서 빗소리로 전송되고 있다(시간의 태엽을 풀며)”의 감응은 시적 상상력의 확장으로 봄날의 몽환처럼 아득하다.
이와 같이 정신적 피폐함으로 다소 궁핍한 삶일지라도 “그녀가 그림자를 버린 오월 스무 나흗날, 스머프 같은 풀씨들은 생의 풍향계를 잃어버린 채 회전로에서 서성거리고 있다(원앙금침)”의 예시나 ‘등잔 밑엔 늘 그림자가 있다는 불꽃의 손짓을 익히 알지 못한 사람들’을 눈물 묻은 눈으로 응시하며 “수분이 다 빠진 가랑잎 몇 장이/신발을 벗은 채/한 겹의 신문으로 낡은 몸을 감싸고 있다(입을 잃어버린 노숙자들)”에서 새삼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아니한 감정이 절제된 시편에 금화처럼 반짝이는 눈물이 묻어있다. 여기서 그 자신의 시편을 ‘가장 행복한 심성의 최고 열락을 눈부신 언어의 기록으로 평가’하여도 결코 거부감이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따뜻한 묵언의 응시를 통해 절절한 삶의 애환을 일깨워 혼돈에의 방황을 끝내는 역동성은 한층 음조가 낮고 정조가 한층 더 다정다감하다. 마치 그 같은 면면은 바슐라르적인 “상상력에 의한 식물의 불이다.”라는 생태시학의 기본패턴의 맥락을 지탱하기에 존재가치의 해명은 그 가능성이 점철(點綴)되는 현상일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권두칼럼의 말미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기상황은 도전․실험정신으로 적극 대응할 때야 극기할 수 있다. 아울러 인류의 역사는 혼돈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 왔기에 하찮은 즉물 대상도 분별력을 지니고 ‘상생을 전제로 공동체의식’을 배경지식으로 수용하되 존엄한 시대적 소임을 온전히 수행할 일이다. 모쪼록 정신세계를 빛나는 존재감과 감성의 융합을 위해 고뇌할지라도 푸른 생명의 언어를 조탁하는 엄숙한 시대적 소임을 각별히 기대하면서 정계원 시인의 제3시집 출간을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