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시흥 배곧에 머물던 때의 일이다. 낮의 열기가 썰물처럼 빠져갈 즈음에 우리 세 식구는 소래포구로 산책을 나갔다. 바다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두 마리의 귀여운 애완견을 산책시키러 나온 부부가 우리 앞을 막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목줄이 없는 개 한마리가 반가운 친구라도 본 듯 두 마리를 향해 돌진했다.
놀란 견주가 본능적으로 목줄을 잡아 끌며 보호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때 천천히 걸어온 목줄 없는 개 주인은 마치 남의 일처럼 평상적인 톤으로 말했다. 아니 물었다. “(당신)개, 사나워요?”
목줄없는 개가 달려들 때보다 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줄 있는 개 주인이 말을 받았다. “아니요!” 그 다음 순간, 상황을 파악한 목줄 있는 개 주인이 쏘아붙이며 말했다. “목줄을 하셔야죠!” 그리고는 낮으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기분 나쁘게…”
목줄 없는 개 주인이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말을 삼키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목줄있는 개 주인이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자기 길을 갔다.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의도한 연출처럼 10초 남짓한 시간에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도 목줄 있는 개 주인은 많이 놀라고, 당황스럽고, 자신의 말대로 기분이 몹씨 나빠졌을 것이다.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말, 곧 뼈때리는 말을 고스란히 들은 목줄 없는 개 주인도 적지 않게 놀라고, 당황스럽고,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일을 보며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뭘까?
문제의 시작은 목줄 없는 개와 견주였다. 아니 개가 아니라 개에게 목줄을 채우지 않은 견주였다. 목줄을 채우고 산책을 나왔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개의 안부나 특성을 물으며 정담을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먹만 오고가지 않았지 투견장처럼 긴장감 도는 싸움이 한 바탕 벌어진 것이다.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고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무안해진 일이 일어난 것이다. 목줄을 채우지 않아서, 그 간단한 규정을 지키기 않아서.
그녀는 자신이 지키지 않은 규정을 얼버무리기 위해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을 건넸는데 이런 식의 화법은 규정을 따라 목줄을 채운 견주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녀는 규정을 상기시키며 날카롭게 나무랬던 것이다. “목줄 하셔야죠!” 이어서 개가 아니라 사람의 태도 문제인 것을 자기 감정을 표현함으로 지적한 것이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기분 나쁘게…”
개가 무슨 잘못인가? 어떻게 규정을 알 수 있으며, 안다고 해서 스스로 목줄을 찰 수 있는가? 규정을 알고도 어긴 사람의 질못이다. “놀라셨죠. 아이구, 죄송해요…” 라고 말했으면 될 일이었다. 규정을 어겼음에도 규정을 지킨 사람을 대하는 대면대면함과 부정직한 태도가 문제였다. 적반하장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향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하나님이 주신 지침을 소홀히 해놓고서도 왜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빠졌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