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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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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글 스크랩 徐渭 - 紹興 - 李可染
송현 추천 0 조회 63 08.03.13 09: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가위가 눈앞이다. 햇살도 따사하게 느껴진다. 들녘에는 누런 벼이삭이 여물고 있다. 풍요로움의 계절이다. 연휴를 앞두고 그동안 매달려 왔던 중국여행기를 다 마쳤다. 교정 등의 작업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짐을 벗은 것 같다. 다른 쓸 것이 많았는데도 여행기가 걸려 있어 손을 대지 못한 터다.

 

지금 올리는 것은 절강성 소흥을 방문하며 쓴 서위 부분이다. 소흥의 물의 도시다. 풍광이 꿈에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한 세상을 살다 간 서위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우리는 소흥까지 발길을 옮겼던 터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위대한 화가 서위를 기리며 쓴 글이다. 서두르느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다음 기회를 생각하며 글을 매듭짓는다.

 

이 블로그를 찾는 모든 이들이 한가위를 즐겁게 보내시기 바라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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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徐渭 -  청등서옥靑藤書屋과 묘墓 , 그리고 난정蘭亭 ]

 

 

 

 

서위(1521-1593)가 살던 청등서옥은 성내에 있었다. 심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택시를 탔더니 금방 우리를 골목 앞에 내려놓는다. 이 번 여행에서 소흥을 찾은 가장 커다란 이유는 노신이 아니라 서위였다.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의 묘소에 참배를 하기 위함이었다. 빨래가 널려 있는 후미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자 곧바로 청등서옥이 나온다. 주위의 집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비슷비슷한 담장의 한 군데가 청등서옥이다. 다른 점이라고는 직사각형 돌로 테를 두른 듯한 문 옆에 벽을 파고 그 안에 청등서옥이라는 표시를 해놓았다는 점이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왼쪽 귀퉁이에서 입장료도 팔고 간단한 기념품도 판다. 가게라 할 수도 없고 그저 조그만 점방이다. 관람객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앞에 펼쳐지는 정경이 고즈넉하다. 마당 한 가운데 보도가 깔려 있다. 강남의 정원에서 보아온 무늬 보도다. 부채살 모양으로 돌들이 박혀 있다.

 

세 그루의 커다란 석류나무가 인사를 한다. 백년도 더 된 성싶은 나무들이다. 꽃이 지고 돌배 크기만 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다. 서위는 터지는 석류를 얼마나 그렸던가. 그냥 밋밋한 열매가 아니고 껍질이 부서지며 파열되는 그런 석류만 그렸다. 오른 쪽 담벽을 따라 대나무가 무성하다. 방죽들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서옥의 담벼락으로 다가서니 자재암自在岩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서위가 붙인 이름이다. 석벽 아래 막돌을 둥그렇게 쌓아올리고 그 안에 회양목을 심었다. 옆으로 사람 키를 넘기는 파초가 몇 그루 심겨 있다. 모두 서위의 그림들에 즐겨 나오는 대상들이다. 

 

중국의 회화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화가 세 사람만 꼽아라 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택하겠는가. 기라성 같이 수 없이 많은 화가들 중에서 누구를 고를 것인가. 우문 우답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연 서위, 팔대산인 그리고 석도石濤를 거론하고 싶다. 모두 16세기 17세기 이백 년 동안에 살았던 천재들이다. 명말 청초는 위대한 시기다. 그림 양식과 주제의 다양성에서는 팔대산인과 석도가 서위를 능가할 것이다. 서위는 산수화가 거의 없다. 주로 화훼에 집중하였던 탓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서위는 나중의 두 사람과 격을 달리한다. 서위는 시, 문, 서, 화에 모두 능통하였지만 무엇보다 그는 음악에서도 한 획을 긋는 인물이었다. '남사서록南詞敍錄'이라는 음악평론을 집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사성원四聲猿'이라는 희곡을 짓기도 하였다. 남사서록은 지금도 중국음악사에서 귀중한 자료이며 그의 작품집 사성원은 희곡발달사에서 탕현조보다 앞선 시대의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중국 희곡에서 불세출의 걸작 모란정을 쓴 탕현조는 서위보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한 때 서위와 시문을 주고받는다. 1591년 탕현조가 42세였을 때 그는 젊어서 만든 시집 '문극당집問棘堂集'과 함께 시 '기월중서천지위寄越中徐天池渭'를 보낸다. 감탄을 한 서위는 '여탕의잉서與湯義仍書'라는 그림을 그리고 '독문극당집의기탕군讀問棘堂集擬寄湯君'이라는 시를 보내 화답한다. 1593년 절강성 수창현遂昌縣으로 부임한 탕현조는 그때서야 서위의 사성원을 접하고 탄식한다. "이는 문단의 최고라. 내가 어찌 그에게 미치겠는가" 그러나 서위는 같은 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생전에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작품을 최고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니 인물은 서로를 알아주는가. 1593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왜군을 패주시키고 있었다. 이여송은 서위와도 각별한 사이였으며 둘째 아들 서지徐枳는 이여송의 막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서위는 이여송의 승전보를 접하고 흥분하여 '춘흥春興'이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타계하고 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서위을 글씨로 집자集子하여 '천한분원天漢分源'이라고 쓴 원형의 문을 지난다. 하늘의 은하수와 나눈 수원水源이라는 의미다. 집이 좁으니 눈앞에 연못과 청등서옥 서실이다. 정원이라고도 할 수 없는조그만 공간이 나온다. 들어선 왼쪽 담장 옆으로 '女貞'이라는 별명이 붙은 거목이 솟아있다. 기둥과 밑둥에는 온통 이끼다. 이백 년이 넘었다 했다. 돌난간을 사각형으로 두른 연못도 있다. 바로 은하수와 물을 공유하는 천한분원이다. 맞은 편으로 등나무가 보인다. '수등아漱藤阿'라는 글씨가 보인다. 등나무를 씻는 곳이다. 건물은 세칸 일자집이다. 홑처마의 단순구조다. 벽은 격선문으로 되어 있지만 지금껏 보아온 문들에 비해 아무런 장식도 없이 소박하기 짝이 없다. 기둥 위에는 대련이 붙어 있다. "一池金玉如如化, 滿眼靑黃色色眞 작은 연못 금과 옥은 여래께서 나타나심이고, 눈 안 가득히 푸르고 누런 색은 세상의 진실이로다" 모든 글씨와 제호가 서위가 생전에 쓴 글들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그린 청등서옥을 보면 초가가 세 채 나온다. 그것도 방향이 일정하지 않게 얽혀 있다. 대나무도 있고 파초도 있다. 그러고 보면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집과 정원들은 모두 후인들이 그의 집터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조성한 것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서위는 그가 살던 이 집을 젊어서 떠난 이후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다만 어렸을 적 이 집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여 그의 호를 청등거사 또는 천지도인 등으로 사용한다. 일생을 불우하게 지낸 그로서는 어렸을 때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하였을 것이다.

 

 

북경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그림 '사시화훼권四時花卉券'은 폭이 32.5cm 이고 길이는 795.5cm에 이르는 두루마리 그림이다. 진본을 보지 못하고 오직 화첩으로만 보는데도 그의 그림은 우리의 숨을 멎게 만든다. 눈을 맞은 매화와 소나무, 눈이 수북히 쌓인 대나무, 여름의 파초, 포도나무와 가을의 국화 등이 그려져 있다. 오로지 수묵으로만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 중에서 온전하게 전체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가로로 화폭이 기다랗기 때문은 아니다. 의도적인 것이다. 아니 작가가 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모두 그려내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서위는 사형이전신舍形而傳神이라 하지 않았는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화가의 의경을 더 중시하는 중국 화풍의 대표적인 그림들이 바로 서위의 작품들이다. 소위 말하는 사의화寫意畵다. 문인화 범주에 넣을 수 있겠으나 엄밀히 말해서 그 범주가 다르다. 사시화훼권에 나오는 사물들은 모두가 허리를 잘리거나 가지들이 떨어져서 나온다. 일부분만 보여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눈을 맞은 대나무 잎은 날카롭고 섬세하다. 붓도 거침이 없이 순식간에 그어진 것이다. 대나무 그림을 이렇게 바짝 마른 듯이 건필로 그려낸 사람은 과거에 없다. 눈이 부분적으로 덮인 소나무를 보자. 옆으로 삐져 나온 부러진 소나무 가지는 그 생김새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붓의 자국이 상상을 절한다. 강렬하다. 단단한 얼음이 쪼개지는 것 같다. 듬성 듬성 그려낸 파초의 중량감은 또 어떤가. 포도넝쿨은 왜 마구 얽히듯 그렸을까. 묵의 농담이 종횡무진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있다.

 

서양의 회화에서 19세기 말 빈센트 반 고흐가 억한 심정을 나타내기 위해 보이는 사물 즉 밀밭이나 나무들을 변형시켜 그려내고, 세잔느는 바라보이는 경치를 그릴 때나 정물화를 그릴 때 사물을 임의로 자기 주관에 의해 새롭게 해석하여 표현하였고, 더 진전하여 표현주의자들이 인간의 내면을 자연 사물에 투영시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서구회화는 결국 입체주의와 추상주의로 나가더니 결국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의도적이어서 인간이나 사물이 철저히 분해되어 그림을 그리는 주체나 대상들이 모두 부서지게 된다. 파멸인 셈이다. 서구회화가 기독교에 머무르다 겨우 르네상스로 인해 기지개를 피고 있을 무렵 서위는 이미 서양화의 발전 양상을 수백년 먼저 드러낸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물에 인간이 투영되더라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사물과 더불어 자연 질서 내에 공존을 한다. 한 주체에 의해 분해되거나 파괴되지는 않는다. 온전함을 유지한다. 아픔을 보여주되 치유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각 안으로 들어선다. 공간 분할을 이루는 어떠한 칸막이도 없이 그냥 휑하니 뚫려 있는 공간이다. 격선문 앞에 의자와 탁자들이 놓여 있다. 벽 위에 '일진부도一塵不到'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아래에는 未必玄關別名敎, 須知書戶孕江山이라는 대련이 붙어 있다. 먼지하나 티끌 하나도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고, 또 이 곳이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는 문턱과 같지만 굳이 세상 이치를 멀리할 이유도 없고 다만 멀리 강과 산이 다 보이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서위다운 문구다. 한편에는 문방사우들이 놓여 있다. 그가 쓰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벽에는 유리로 방벽을 쳐놓고 그 안에 서위의 그림들이 진열되어 있다. 화첩에서 익숙한 그림들이다. '모란초석도牧丹蕉石圖'도 있고 '유실도榴實圖'와 '포도도葡萄圖' 등이 보인다. 아마 모두 사본일 것이다. 뒤편에는 조그만 후원이 있다. 우물도 있다. 공간이 너무 좁고 쓸쓸하다.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나오면서 우리는 이백의 시를 쓴 탁본을 하나 구입한다. 기념품이다. 살아 생전에 그는 스스로 그의 글씨를 첫손으로 꼽고 다음을 시와 문이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림이나 음악 등은 별로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았다. 참으로 모순이 느껴진다. 지금은 단연 그의 그림들을 첫손에 꼽고 희곡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시대의 비극인가.

 

 

서위의 묘는 회계산 자락 목책산木柵山이라 불리는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가는 길목에 그 유명한 난정이 있어 잠깐 둘러보기로 한다. 관광지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너른 주차장도 만들어 놓았고 주위에 상가들이 조성되어 기념품을 팔며 호객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근래 정비를 해놓은 것이 틀림없다.

 

난정은 동진의 왕희지王羲之(307-365)가 쓴 행서 난정서蘭亭序에 유래한다. 서예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가 우군 내사로 재직 중이던 영화 9년(353) 늦봄에 41명의 이름난 사람들이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철 따라 지내는 풍습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즐기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들이 지은 시들을 모아 왕희지는 서두에 서문을 쓰니 바로 난정서蘭亭序다. 내 서재에는 난정서 탁본이 하나 걸려 있다. 서체가 날아갈 듯 날렵하고 막힘이 없다.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넘쳐난다. 품격이 높게 느껴지는 그런 글씨다. 전서 예서 해서와 달리 행초에서 이런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껏 내려오는 난정서 글씨가 진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첫째로는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당태종이 살아 생전에 그의 글씨를 모조리 수집하고 죽을 때 무덤으로 함께 가져갔기 때문이다. 현재 내려오는 작품들은 대개 비문 등에 그의 글자를 집자한 것들이다. 둘째로는 난정서가 너무 유명한 나머지 후인들의 모작이 대단히 많다는 점이다. 명필로 손꼽히는 저수량 遂良(596-658)이나 우세남虞世南(558-638) 등을 포함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그대로 모방하여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눈길을 끄는 것은 팔각정 안에 거대한 비석이 보이는데 바로 청나라 강희제가 직접 쓴 난정서다. 황제도 그의 글씨를 흠모하여 임모臨模한 것이다. 건륭제의 활달한 글씨도 보인다. 한편에 글씨들을 모아놓은 서각이 나오는데 기다란 양쪽 벽이 온통 글씨들이다. 중국 여행을 하며 언제나 질리는 것이 석벽에 새겨놓은 글씨들이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글씨들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강희제의 글씨 말고도 앞서 말한 명필들의 난정서도 새겨져 있다. 서각 옆으로 더 올라가면 개울이 나오고 개울을 건너면 탁 트인 조그만 호수가 나온다. 초가집도 가운데에 떠 있다. 정경이 아름답다. 마음을 시원스럽게 하니 엉성하게 조성한 난정보다 훨씬 편하고 좋다.

 

 

서위의 묘소는 야트막한 구릉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타고 온 택시 기사는 서위의 묘를 처음 듣는다고 한다. 한참이나 헤맨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우리는 시골 좁은 길을 걸어간다. 돌아갈 길이 막막하니 기사에게 돈을 많이 얹어 줄 것을 약속한 터다. 조그만 산이라 할까 아니면 구릉이라 할까 주위에는 온통 차밭이다. 길은 마냥 울퉁불퉁하다. 도중에 수레를 끄는 남정네와 아낙을 만난다. 사람들이 수레를 끌다니. 수레 위에 옥수수 대와 나무들이 한껏 쌓여 있다. 움푹 패인 길에 빠지자 나오지를 못하고 쩔쩔 맨다. 우리가 도와준다. 고생에 찌든 얼굴들에 고맙다는 웃음이 환하다. 서위의 묘를 찾는 팻말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참을 걸으니 대나무 숲 안에 초라한 집이 하나 나타나고 표를 파는 곳이 나온다. 허허. 누가 찾아온다고 표를 파나. 인민복을 입은 영감이 조그만 걸상에 앉아 있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다. 묘역에는 무덤들이 여럿이다. 서위 집안 사람들이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서위의 묘는 제법 멋을 내며 포장된 길을 굽어 따라가면 나온다. 전면에 明徐文長先生墓라고 쓰인 비석이 나온다. 초라하다. 그래도 바닥은 석판을 깔아놓았다. 돌로 쌓은 사각 기단이 둘러치고 그 안과 위로 그의 봉분이 놓여 있다. 무덤 위에는 고사리, 조릿대 등 잡초들이 무성하다. 주위에는 방죽이 심어져 있고 파초도 보인다. 모두 그가 좋아하던 나무들이다.

 

 

서위는 서자 출생이다. 자는 문장文長이다. 태어나자마자 백일도 안되어 부친을 여윈다. 고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능을 나타낸다. 20세에 기초가 되는 과거에 합격하여 수재秀才가 되고 반씨潘氏와 결혼을 한다. 이때까지가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맏형이 죽자 가세는 몰락하고 불행하게도 26세 되던 해에는 사랑하던 처까지 잃는다. 과거에는 운이 없어 41세까지 무려 8번이나 응시하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한다. 37세에 왜구를 토벌하고 있던 호종헌胡宗憲의 막부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우고 신임을 얻는다. 호종헌 덕분에 이름도 날리게 되고 그의 배려로 새집도 장만한다. 그러나 호종헌이 1565년 권력의 다툼 중에 옥에 갇히고 자살까지 하게 되자 서위는 자기에게도 해가 닥칠까 두려워하여 정신 이상이 오게 된다. 스스로를 자해하여 죽음의 위기도 겪다가 급기야 후처인 장씨를 살해하게 된다. 이로 인해 7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이후 십여 년간은 유람이나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보내는 순탄한 생활을 한다. 나머지 십 년간은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 "그의 내심과 사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모순적이었으며, 이는 때때로 '제멋대로이면서 황당한' 그의 성격으로 표현되어 나타났다. 그는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하였으며, 자신의 재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가 하면, 상당히 괴팍하면서도 집요하여 좀처럼 예법에 구속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즐겼으며, 또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을 매우 싫어하였다고 전해진다"(서위 정품화집精品畵集, 서위의 삶과 예술, 단국강單國强, 천진인민출판사天津人民美術出版社)

 

 

현실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이 어떠하였든 간에 우리는 그의 그림들을 사랑한다. 반 고흐가 괴팍하여 고갱과 결별하고 스스로 그의 귀를 자르다 못해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해바라기를 사랑하며 그의 자화상을 이해한다. 서문장도 마찬가지다.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그는 광인에 가까웠으나 그가 보기에는 아마도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팔대산인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남경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또 다른 두루마리 그림인 '잡화권雜花券'을 보자. 포도열매가 달린 포도 줄기가 2미터도 넘게 그려져 있다. 마구 휘갈긴 붓인가. 아니면 미쳐서 휘두른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정신을 차렸으되 도저히 이렇게 밖에 그릴 수 없었던가. 적묵積墨으로 먹의 농담을 구별지었지만 바탕의 붓은 건필이다. 붓의 획 하나마다 강렬한 힘과 열정이 느껴진다. 무한대의 힘이 솟구치고 있는 것 같다. 파열된 석류도 마찬가지다. 선보다는 면으로 처리된 묵의 질펀함이 강한 생명력으로 넘쳐난다. 어디 그뿐인가. 고궁박물원 소장인 '묵화구단권墨花九段卷'의 그림들은 또 어떠한가. 세죽과 난 그리고 수선화, 바위에 걸터앉아 피어난 매화 등등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의 대상들은 그 섬세함에 가슴이 시릴 정도다. 섬세하면서도 매듭이 지어지는 강단이 보인다.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참게를 즐겨 그렸는데 붓 몇 점만 찍어놓은 것 같은데도 모양이 절묘하다. 천재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오로지 제백석만이 이 정도 수준으로 따라갈 수 있었던 그림들이다. 채색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흑과 백만이 어우러진 묵으로 이러한 형상들에 도달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정판교가 지적하였듯이 서문장선생은 "여윈 붓(수필瘦筆), 깨어진 붓(파필破筆), 마른 붓(조필燥筆), 끊어진 붓(단필斷筆)" 등으로 그렸다 하니 이미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디 기법만일까. 그의 붓 한 획마다 그의 삶이 아프게 묻어 있는 것을! 하늘이 가엾게 여겨 그에게 아프기만 삶을 곱게 씻어줄 솜씨를 베풀어주었을 것이다. 서위가 이룩한 사의화의 위대한 전통은 청초의 양주팔괴를 거쳐 근대 중국에 이르러 오창석吳昌碩(1844-1933)과 제백석齊白石(1864-1957)에 전해진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팔대산인을 쓰며 이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한 세기를 풍미한 제백석은 서위를 존숭한 나머지 죽어서라도 강아지가 되어 서위 집 앞을 왔다갔다 했으면 좋겠다 했다. 어찌 제백석만 그런 감정이겠는가. 

 

 

나는 오래 전에 그의 그림을 보고 시 두 수를 쓴 적이 있다.

    

 

[서위 - 1]

 

 

먹물이 흐르다 멈추면
억장이 무너졌다

 

 

한 이파리라도 살려야 되는데.....

 

 

잘린 잎은
발을 절룩거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아무도 듣지 않는 적막

 

 

잎새의 외마디
아미타불 미륵불 관세음보살

 

 

붓끝은 흰 종이를 채우며
머리가 하얗도록 보챘다

    

 

 

 

 [서위 - 2]

 

 

 

한 잎
정수리에 맺힌
고요를 절구로 찧는다

 

 

한 잎 건너 또 한 잎
세상이 한 잎인데

 

잎새마다 영혼마다
갈가리 쉰 목소리

 

 

하늘과 땅
흰 비단에 무겁게 번지는
저 불덩어리
그리고 빛나는 파열!

 

 

우리는 그의 위대한 예술정신을 기리고자 이곳까지 찾아온 나그네들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뜨거운 해만 내리쬐고 있다. 햇살이 아프다. 묘 앞에 갓 심은 소나무 두 그루도 지지목을 기대며 아픈 듯이 서 있다. 틀림없이 그의 육신이 눈앞에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파란 불꽃을 이글거리는 그의 영혼이 오래 만에 찾아온 후인들을 위해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져온 이과두주를 잔에 따르고 절을 올린다. 죽은 넋이라도 편안함을 빈다. 

 

 

 

 

 

[후산吼山  ]

 

 

 

여름도 길고 해도 길고 시간도 길어 우리는 시 외곽으로 한 곳을 더 찾아가기로 한다. 바로 후산이다. 이름난 명승지는 아니다. 당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채석장을 가꾸어 놓은 곳이라 한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 버스는 종점에 도착하고 바로 그곳이 후산이다. 길을 물었던 우리 나그네들에게 버스 기사가 언질을 준다. 다섯 시 정각이면 대문의 표를 파는 문지기가 퇴근을 할 것이며 문은 그대로 열려 있을 것이니 입장료를 아끼려면 조금 기다렸다가 들어가라고. 앉아서 담배를 한 대 물고 있는 동안 문지기는 정말로 정각에 퇴근을 한다. 어슬렁 걸어나와 인근의 관사로 사라진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였지만 재미가 있다. 입구부터 무성하게 키를 넘기는 인공 숲들이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공원이다. 사람들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다. 관광지인데도 썰렁하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껏 운치를 즐길 수 있으려니 잘 된 일이다. 운하를 건너 우리는 산으로 올라간다. 높지는 않지만 가파르다. 산을 깎아 내린 절벽들이 보이고 돌기둥 위에 거대한 암반이 얹혀져 있는 것도 있다. 모두가 채석장의 흔적이다. 중국의 관광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곳도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계단과 난간을 비롯하여 회랑까지 만들어져 있다. 정자도 있다. 꼭대기의 정자에 올라서니 드넓은 평야가 눈앞에 펼쳐진다. 멀리 물안개에 가려 지평선이 사라지고 있다. 끝이 안 보이는 벌판이다. 지도상으로야 전당강이 나오고 그 너머는 바다다. 말이 벌판이지 물 반 땅 반이다. 연못인가 호수인가 그리고 운하인가 아니면 강인가, 도처에 물들이 반짝이고 드문드문 버드나무 같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사람이 사는 취락들도 아스라이 보인다. 물의 고향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정말 이 고장 사람들은 물위에 떠서 지내는 것이다.

 

 

소흥에 와 실제로 아름다운 경치를 보니 이가염李可染(1907-1989)그린 그림들이 생각난다. 이가염은 중국이 자랑하는 현대 산수화가이다. 그의 그림 중에 '노신고향소흥성魯迅故鄕紹興城'(1962)라는 작품이 있는데 소흥의 풍경을 기가 막히게 잘 그려내었다. 화가가 그린 소흥의 풍경은 여러 작품인데 그 중의 하나다. 대단한 걸작으로 판단된다. 물의 동네를 정말 그럴듯하게 그려내었다. 상단에는 계속 연결되는 수로와 마을이 아련히 퍼져있어 이러한 풍경이 무한대로 넓음을 암시하고 있다. 동양 산수에서 보이는 통상적인 하늘이 아니라 풍경의 연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구도는 역시 종심縱深이었다.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구도다. 한 가운데 강물이 보이고 양안에 마을이 있다. 강에는 여섯 척의 배가 떠 있다. 맨 가장자리에는 숲이 보인다.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왼쪽 마을 길게 도로가 있고 무수한 사람들이 거닐고 있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다리는 두 개인데 그 위에도 삶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모두 점경點景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상이 모호하게 점으로 즉 대개의 인물들은 머리 몸 그리고 하반신 세 부분의 점으로 처리되는데 그런 간결 막연한 처리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생생하다.

 

 

그림은 분명히 수묵화다. 해서 전체적인 색조는 어둡다. 하지만 그림에는 생명 같은 빛이 철철 넘친다. 무슨 연유일까. 여백의 처리다. 과거 전통 산수의 여백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집 한 채를 그리면서 지붕은 먹으로 그리고 벽은 흰 여백으로 남겨놓는다. 집들이 연이어 있으니 하얀 부분은 훌륭하게도 여백이 아니라 대상의 선택된 색으로 그 생명력을 얻는다. 중앙에 흐르는 물도 결국은 양쪽이 어둡기에 자연스레 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상단 부분의 물과 마을이 연속되는 풍경도 여백이라는 흰 색 아니 건드리지 않은 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먹으로 칠하여 검은 색이 그림을 지배하고 있으나 화가는 흑색 대신에 분명 백색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어둠에서 흰 색으로 빛을 뿌리고 있다. 결국 사물은 어둠에서는 보이지 않고 광선 즉 빛이 있어야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풍경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림의 기법도 선은 거의 보이지 않고 면으로 처리되어 있다. 세잔느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면도 그냥 단순한 면이 아니다. 질감과 양감이 느껴진다. 입체감이 돋보인다. 여러 가지 색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흑백의 묵으로만 그렸는데도 그렇다. 묵의 농담 즉 진하고 여린 층차를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표현기법 탓이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풍경도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햇빛에 반사되는 하얀 물빛과 그 빛에 가려 구체적 대상을 상실한 드넓은 벌판이다. 서양의 예술처럼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분해하고 쪼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과 근원에 접근하여 합일한다. 그리고 편안함을 얻는다.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아닌가. 동양인의 시각은 어쩔 수가 없다. 이가염이 중년 시절 동독을 여행하며 그린 '드레스덴의 저물녘'(1957)을 보면 이러한 정황이 잘 드러난다. 사생화임에도 대상을 정통 수묵화로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세한 부분을 먹의 농담으로만 처리하는 것에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완성된 그림은 완벽하게 모든 대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앞부분 양쪽에는 나무들이 있고 하단에는 두 사람 그리고 네 사람이 서서 있다. 정면에는 물론 높은, 약 7/8층 건물로 짐작되는 석축건물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둡지만 농암의 차이로 창문과 기둥 그리고 벽이 그려지고 무엇보다 지붕의 뾰족한 첨탑 등이 여백의 하늘을 치솟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유일한 물체이다. 마른 건필乾筆로 처리하고 있다.

 

 

해가 긴 꼬리를 늘어뜨리자 우리는 내려와 운하의 둑을 걷는다. 무작정 걸어간다. 나무들이 우거진 운하길은 절경이다. 동네도 나타난다. 드문드문 아름다운 돌다리들이 운하를 가로지른다. 시골사람들도 보인다. 수초가 가득한 수로에는 거룻배가 나다닌다. 삿갓으로 해를 가린 여인과 남정네가 기다란 삿대로 운하 바닥을 밀어내며 배를 저어가고 있다. 한곳에는 아낙이 저녁쌀과 채소를 씻고 있다. 하얀 쌀뜨물을 보고 물고기떼가 몰려든다. 아랑곳하지 않고 아낙은 일을 계속한다. 자연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요, 우리 나라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풍경이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에 나서서도 우리는 버스가 올 때까지 걸어간다. 운하와 수초, 물고기들이 뛰어 노는 벌판 사이의 길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도심에서 퇴근하여 길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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