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관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포도원 추수 때가 되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낸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일이 있다.
보낸 종들마다 맞아 죽거나 크게 상했다. 앞서간 종들이 죽은 것을 알고도 보냄 받은 종들은 간다. 마치 아무런 생각도 의견도 없는 사람들 같다. 마지막에 보낸 아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도 죽을 것이 뻔한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간다. 이들은 묻지 않는다. "아니, 뻔히 죽을 줄 아시면서도 가라고 하십니까?"
왜 그들은 묻지 않는가? 굳이 묻지 않아도 주인을 아는 것이다. 주인의 뜻은 다 몰라도 주인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여 가는가? 주인과의 관계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앞서 보내신 종들 모두 죽거나 다쳤음을 알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은 아무 말없이 그 악한 소작인들을 향해 간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관계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 사람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향해 목숨을 걸고 나아간다. 정확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모습이요, 그분을 대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다윗의 세 용사는 다윗이 명령하지도 않은 일을 한다.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물을 그리워하는 것을 무심코 듣고는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을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신하로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한 것인가? 그들은 대체 다윗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길래 이런 일도 하는가? 그들은 행동으로 이미 말한 셈이다. "당신을 위해서는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다윗과 맺어온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한 엄마가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6살 난 아들을 잃어버렸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하고 백방으로 그 아이를 찾아다녔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6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웃 마을에 들른 엄마는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을 보았으나 그 아이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고 보니 동창생 중 하나가 그 아이를 유괴해서 기르다가 먼저 죽고 그 남편이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집으로 데려왔으나 아이는 도무지 친부모에게 가까워지지 못하고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만 그리워했다. 부모는 하는 수 없이 그 아버지에게 아들을 돌려보냈다.
호적에 자녀의 이름을 올리면 자동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친밀관계도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하면 자동적으로 깊은 친밀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놀고, 수다를 떨며 이야기하고, 갈등하고, 먹고, 여행하고, 자는 가운데 관계는 친밀해진다. 서로를 돌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친밀감이 생겨난다.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낼수록 더욱 크고 튼튼하게 자란다.
한 순간의 영웅적인 결단에 의해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더러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에도 아버지의 뜻이 감지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종들에게는 매일 아버지와 맺고 있는 친밀한 관계가 있다. 순종은 일시적인 충동이나 헌신이 아니라 그 친밀 관계의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