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둔 작은 박스에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들어있다. 빈 박스를 본 길고양이가 어느새 들어와 새끼를 낳은 것이다.
저녁에 집을 나서면서 박스채 집 앞 빈집에 옮겨주려고 했으나 함께 있던 어미 고양이가 낮으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가만두라'는 위협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그 기세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아침에 다시 들여다보니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에 나오는 엄마꽃게처럼 새끼들을 품고 있는 엄마 고양이가 보인다. 아니 정확히는 엄마가 보인다.
최근에 본 짧은 영상이 있다. 흙탕물이 흐르는 강을 건너던 새끼 가젤 옆으로 엄마 가젤이 급히 뛰어들고 있었다. 확대된 화면에는 새끼 가젤을 향해 악어 한 마리가 맹렬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새끼가 잡아먹힐 상황인 것을 본 엄마가 새끼를 구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런데 달리는 방향이 묘했다. 그녀의 목표지점은 어쩔 줄 몰라하는 새끼 쪽도, 새끼를 향해 곧장 돌진하던 악어 쪽도 아니었다. 정확하게 악어와 새끼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가젤은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거기 서서 마지막 눈빛으로 새끼를 바라봤다. 다음 순간 악어는 그 큰 입으로 엄마 가젤의 목을 덥석 물었고 물보라와 함께 흙탕물에 붉은 선혈이 섞였다. 죽는 새끼를 보며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이 붉게 흘렀다.
감전된 듯 내 안에 전율이 일었다. 새끼는 그 사이에 강가로 빠져나와 젖은 몸으로 오들오들 떨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새끼가 처한 사정을 보며 무섭도록 냉철한 판단으로 새끼를 보호하는 자리로 달려가 대신하는 존재.
한자 한자가 생각난다. 恤(휼)이다. 해자하면 마음 '심'(心) 변에 피 '혈'(血) 자로 만들어진 글자다. 마음에서 피가 떨어지는 모습이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새끼가 당한 절체절명의 환난을 볼 때 엄마 가젤의 마음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을 것이다. 엄마 가젤이 한 일을 통해 현관 박스 속 엄마 고양이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고 느끼게 하셨다.
하나님은 바로 그 엄마보다도 더한 마음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시고, 직접 뛰어드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죄를 알지도 못한 아들이 진 십자가가 바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개입이었다. 로마 군인에 의해 찔린 예수님의 가슴에서 아무 소리없이 떨어진 피가 곧 아들을 통해 보이신 아버지의 휼이었다. 성경을 단 한 자로 표현한다면 바로 그 ‘휼’이 아닐까?
그 마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른 삶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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