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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후인이라고 하는 여진족은 한민족이 아니었을까?
여진족은 말갈족의 후인이지만 한민족과 단절된 역사를 이어왔고 주류가 흑수말갈이었기 때문에 한민족과 무관한 족적이었을까?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하였던 여진의 주체 세력은 고려와 조선과 접하였던 압록강 두만강 일원의 세력이었으므로 부여와 고구려 속의 말갈과 마찬가지로 발해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던 발해 후인은 아니었을까?
이번 장에서는 고려시대의 여진이라고 불리었던 금나라의 건국주체가 발해 유민인지 흑수말갈인인지 살펴 본다.
거란인이 흑수 말갈인을 여진으로 부르면서 말갈 후인 전체를 여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하였다.
길림 남서방면 : 숙여진(서여진)
두만강 북류 : 생여진(동여진) - 완완부 금나라 건국주체
서여진과 동여진을 구분하여 이들이 과연 흑수말갈인 인지 발해 유민인지를 살펴 보자.
994년 서희가 정벌한 압록강 연안의 숙여진(서여진)의 족적은 흑수말갈의 남하 세력 이었을까?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후 서희는 거란과 고려가 국교를 맺지 못하는 사유를 압록강 연안에서 가로막고 있는 여진인 때문이라며 이를 정벌하고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약조하자 거란이 물러갔다. 그리고 1년 후 여진을 물리치고 강동6주를 설치하였다.
압록강 연안의 발해 부흥국인 정안국은 986년 멸망하였지만 991년에도 대씨 중에 정안국의 왕임을 자처한 자가 있었고 그 이후 정안국인임을 밝히고 고려에 내투한 자도 있었다. 거란의 정안국 점령과 고려 침략은 동시에 감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서희가 정벌한 여진인은 틀림없이 정안국의 잔류민 이었지 흑수말갈의 남하인이 아니었다.
정안국의 규모는 어느 정도 였을까?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되고 거란은 동단국을 설치하였지만 서경압록부에서 대씨의 후발해가 건국 되었고, 동단국은 발해 유민의 저항 때문에 928년 동단국을 요양지역으로 옮기게 되었다. 서경압록부의 후발해는 압록강 중하류의 열씨 정권인 정안국으로 넘어가고 열씨 정권은 또 오씨 정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부여부에서는 연파가 봉기 하였다가 975년 부여부와 인접한 올야성의 오사국과 연합하여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안국은 981년 송나라에 국서를 보내서 부여부가 잠시 거란에 반기를 들었다가 정안국으로 들어 왔다고 하였다. 975년 부여부의 연파가 인접한 올야성(상경) 오사국과 연합한 것을 정안국으로 들어 왔다고 한 것을 보면 정안국이 오사국을 포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외교술이라 할지라도 연합전선 정도는 구축하였을 것 같다. 정안국이나 오사국 모두 오씨 정권의 나라 였으므로 정안국이 발해의 중심부로 영역을 확장하지는 못했을 지라고 오사국과 공동 연맹의 형태는 충분히 갖추었을 것 같다.
압록강 연안을 중심으로 발해 부흥 운동을 벌렸던 정안국의 발전은 거란에게 위협이 되었으므로 거란은 정안국을 제압하고 곧이어 고려로 쳐들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 고려가 정벌한 여진은 틀림없는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정안국 유민이었다. 고려는 정안국의 멸망을 관망하다가 세력의 공지가 된 정안국의 유민을 정벌하였던 것이었다.
물론 오씨 정권을 흑수말갈의 나라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깔끔한 역사전개가 되겠지만 정안국은 틀림없이 발해 부흥국으로 출발하였고 정안국 뿐만 아니라 발해의 중심부에서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 하였던 정권도 오씨 정권이었고 부여부의 발해 부흥민도 오씨정권과 결탁하였다. 그들의 족적은 틀림없는 한민족이었고 한민족에서 벗어난 역사를 이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사국은 흑수말갈 일대의 족적들이 세력 확장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이제 눈을 돌려 여진의 또 한 무리인 동여진을 살펴보자
926년 발해가 멸망했을 때 두만강 북류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928년 거란의 동단국은 발해 유민의 저항이 극심하여 요양으로 이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부 발해 유민을 끌고 갔을 것이다. 일부 유민이 끌려가서 발해 중심부가 공지가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틈타서 흑수말갈이 남하 하였을까?
전시대 부여 멸망시 물길이 남하하여 전 부여지역을 장악하더니, 잔류민이 얼마나 많았기에 또 남하하여 발해 영역을 뒤덮었을까? 흑수말갈의 원지역은 남하하고 또 남하하여도 사람이 솟아는 혈의 자리 였던가?
두만강 북류는 거란과 발해의 전쟁터가 아니었고 동단국 건국 2년만에 요양으로 이동해 들어 갔으니 두만강 북류는 발해내지에서 거란의 피해가 별로 없었던 지역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발해부 북류를 지탱하는 부여부와 올야성 등지에서 발해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두만강 북류의 동여진 또한 여전히 발해 유민임을 짐작할 수 있다.
995년 부여부의 연파와 올야성(상경)의 오사국이 연합하여 흑수말갈 이남에 있었던 철려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여전히 발해의 중심부 이남으로는 철려 북방의 흑수말갈이 남하하여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여진 발흥과 금나라 건국 과정의 여진 동태를 살펴 보자
1029년 거란 동경도에서 대연림 흥요국 건국(1030년 멸망)
12세기 초 동여진 완완부 실체 파악한 고려가 완완부 정벌 계획
1107년 윤관 완완부 정벌 - 동북 9성 설치
1109년 완완부 우야소의 요구로 동북 9성 일부 반환
1114년 오사국 멸망
1115년 완완부 우야소의 아구타 금나라 건국
1116년 거란 동경도에서 고영창의 대발해국 건국
1125년 거란 멸망
거란은 정안국을 제압하여 발해 부흥민을 일부 와해 시켰지만, 고려정벌에 실패하여 동북아시아를 군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발해 부흥 운동은 이제 거란 본토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거란이 혼란기를 겪었을 때 발해 유민의 또 한 부류인 동여진의 완완부가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동여진은 발해유민이었고 완완부 추장은 고려 유민이었지만 완완부는 거란의 비호아래 성장한다.
두만강 북류의 동여진은 분명 거란의 피해를 받지 않았던 발해 유민이었고 그 피해를 방어해준 세력이 오사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여진의 완완부는 오사국이 아닌 거란에 협조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완완부의 성장을 주목한 고려는 윤관을 장수로 삼아 완완부를 격파하였는데, 윤관이 완완부를 격파하고 동북 9성을 설치한 8년 후에 금나라가 건국 되었다.
완완부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발해 멸망 초기의 발해 부흥운동은 발해 내지에서만 발생하더니 발해 유민을 거란 내지로 이동시키고 나서는 거란 내지에서 발해 부흥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발해 중심부의 오사국은 골칫거리 였을 것인데 오사국의 영역속에 있었던 동여진의 완완부가 거란에 예속적인 관계를 취했다.
거란은 오사국의 정벌을 몇 번 시도 했지만 결국 실패 하였고, 이러한 오사국의 강대함을 알았기에 송나라는 오사국과 연합하여 거란을 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송나라가 군사를 일으키지 않자 오사국과 송나라는 등을 돌리게 되었고 오사국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송나라는 동여진을 회유하여 오사국을 공격하고자 했다.
오사국은 안타깝게도 송나라, 거란 모두와 적대관계가 되었고 완완부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신속하게 성장하였고 마침내 오사국을 멸하고 1년후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당시 발해의 중심부와 압록강,두만강 연안, 그리고 한반도에서 전개 되었던 역사는 모두 한민족의 역사였던 것이다. 물론 한민족의 일원중에 역사의 승리자는 역사 앞에 비굴하였던 고려와 금나라 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의 선조가 아니될 수는 없다. 비굴하였던 웅비하였던 간에 우리가 모두 받아 안아야 할 선조 분들의 발자취 이다.
고려와 접하였던 서여진, 동여진은 흑수말갈의 남하 세력이 아니라 고구려, 발해의 유민이었고 그들의 지배자는 발해 부흥운동의 담당자 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일으켰던 압록강 두만강 북류의 모든 국가도 한민족의 족적을 담고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금나라가 세력을 형성하고 나서는 거란과의 관계를 끊고 발해 유민의 주도자가 되고자 했고 발해 유민들도 마침내는 금나라와 협조하게 되었고 발해 멸망후 지속적이었던 발해 부흥운동도 중단 되어 갔다.
발해시대 지배층의 대부분은 금나라의 지배층이 되었고 발해유민은 금나라 백성이 되었지만 금나라는 성장 과정에서 발해 부흥을 천명하지 않았다. 금나라는 몸으로 발해를 계승하였는데 입으로 천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한민족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금나라 건국전 고려와 접하여 다투었왔던 여진의 역사는 한민족의 족적속에 포함되어져야 한다고 사료되어 지는 바이다.
압록강, 두만강 일원의 고려시대 여진인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족적을 유지하였던 백성들이었고, 발해 부흥민이었고 발해부흥 운동이 실패하자 일부는 고려로 내투 하였고 일부는 잔류하였는데 고려와 투쟁하였던 잔류민은 고려와 투쟁하였다는 이유로 몰지각한 오랑케로 취급하고 있으나 그들은 몰지각한 오랑케가 아니라 고려와 이해관계가 달랐던 지역에 거주민이었다. 고려와 여진의 투쟁은 민족내부 문제이지 외적 문제가 아니었다.
(금나라 건국시 까지 살펴본 간도 일원의 한민족 점유 역사)
첫댓글 정안국=서여진 설이 그래서 나온 것이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발해부흥전쟁과 여진 문제는 흔히 따로 다루는 이상한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시기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겹치는 점을 보아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이 시대에 나오는 여진 세력들에 대한 부분에 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