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 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비디오-TV는 나의 눈 / 하재봉
TV는 나의 눈
섹스 거짓말 그리고
사회적 폭력 및 성적 불안을 조성하는 혐의로 체포된
통제불가능한 상상력
내 어머니 자궁 속으로 나는 60년간의 여행을 떠난다
뒤엉킨 세상으로 나를 돌려주는 것은
암시장에서 사온 불법
비디오 테이프
비누왕자 / 장정일
그녀는 자신의 몸에 비누칠하는 것을 즐긴다
일주일에 몇 개씩 장미비누를 물에 씻어 없앤다
어쩌다 조카가 누구 만나냐고 물으면
그녀는 묘하게 웃음짓는다. 코끼리같이 듬직하게
멋있는 그 아저씨.
그녀는 자신의 몸을 하루종일
욕탕에 담그고 비누칠하기 일쑤다
철벅철벅 물을 끼얹으면서
그 남자 생각을 한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자
그녀는 그 남자를 매일 만난다.
매일 밤 그는 자동차를 몰고
그녀 창 밖에 와 있다. 그녀가 낮은 허밍을 하며
욕조 속에서 비누거품을 날릴 때
코끼리처럼 중후한 그 남자는 미리 자동차 왼 켠의
도어를 열고 거기 비스듬히 기대 서 있다.
붉은 장미 한 다발을 한 손 가득 들고서
이 밤도 그녀는 자신의 젖가슴과 허벅지를
장미비누로 만진다. 비누가 닳나, 내가 닳나?
분명 오늘은 와 있겠지? 그러나 비누왕자님은 오지 앟았네.
씨에프 대로라야 이모가 행복할 텐데
씨에프 대로 되질 않아 이모는 매일 닳아지며 줄어든다.
광고의 나라 / 함민복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가득 찬
저기, 자본의 에덴동산, 자본의 무릉도원,
자본의 서방정토, 자본의 개벽세상-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휴먼테크의 아침 역사를 듣는다 르네상스 리모컨을 누르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휴먼퍼니처 라자 침대에서 일어나 우라늄으로 안전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토피아의 전등을 켜고 21세기 인간과 기술의 만남 테크노피아의 냉장고를 열어 장수의 나라 유산균 불가리~스를 마신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누군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는, 드봉 아르드포 메이컵을 하고 함께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꼼빠니아 패션을 입는다 간단한 식사 우유에 켈로크 콘프레이크를 먹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명작 커피를 마시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할말은 하고 쓸 말은 쓰겠다는 신문을 뒤적인다 호레이 호레이 투우의 나라 쓸기담과 비가 와도 젖지 않는 협립 우산을 챙기며 정통의 길을 걸어온 남자에게는 향기가 있다는 리갈을 트럼펫 소리에 맞춰 신을 때 사랑하는 여자는 세련된 도시감각 영에이지 심플리트를 신는다 재미로 먹는 과자 비틀즈와 고래밥 겉은 부드럽고 속은 질긴 크리넥스 티슈가 놓여 있는, 승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제3세대 승용차 엑셀을 타고 보람차고 알찬 주말을 함께 하자는 방송을 들으며 출근한다
제1의 더톰보이가 거리를 질주하오
천만번을 변해도 나는 나
제2의 아모레 마몽드가 거리를 질주하오
나의 삶은 나의 것
제3의 비제바노가 거리를 질주하오
그 소리가 내 마음을 두드린다
제4의 비비안 팜팜브라가 거리를 질주하오
매력적인 바스트, 살아나는 실루엣
제5의 캐리어쉬크 우바가 거리를 질주하오
오늘 봄바람의 이미지를 입는다
제5의 미스 빅맨이 거리를 질주하오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느낌 새로운 경험
제7의 라무르 메이크업이 거리를 질주하오
나의 색은 내가 선택한다
제8의 주단학세렉션의 거리를 질주하오
나의 색은 내가 선택한다
제9의 캐리어가 거리를 질주하오
남자의 가슴보다 넓은 바다는 없다
제10의 마리떼프랑소아저버가 거리를 질주하오
거침없는 변혁의 몸짓
제11의 파드리느가 거리를 질주하오
지금 그 남자의 지배가 시작된다
제12의 르노와르 돈나가 거리를 질주하오
오늘, 이 도시가 그녀로 하여 흔들린다
제13의 피어리스 오베론이 거리를 질주하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자연은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이 아니라 후손에게 차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공익광고협의회의 저녁 빰에서 행굼까지 사랑이란 이름의 히트 세탁기를 돌리고 누가 끓여도 맛있는 오뚜기 라면을 끓이려다가 지방은 적고 단백질이 많은 로하이 참치를 끓인다 그리운 사람에게 사랑이란 말은 더 잘들리는 하이폰 전화 몇 통 식후 은행잎에서 추출한 혈액순환제 징코민 한 알 미련하게 생긴 사람들이 광고하는 소화제 베아제 광고가 나오는 대우 프로비젼 티브이를 끄고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고민을 하는 중생들이 우습다는 소설 김삿갓 고려원을 읽다가 많은 분들께 공급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썸씽스페샬을 한잔 하고 그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패션의 시작 빅맨을 벗고 코스코스표 특수형 콘돔을 끼고 잠자리에 든다
아아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행복과 희망만 가득 찬
절망이 꽃피는, 광고의 나라
비디오-퍼스널 컴퓨터 / 하재봉
나의 사유는 16비트 컴퓨터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부터 작동된다
모니터의 녹색 화면에 불이 켜지고
뇌하수체의 분비물이 허용치를 넘어 적신호가 울릴 때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의 손은 검다
부화되지 못한 욕망과 도덕적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할 내 개인적 삶의 흔적은
컴퓨터 파일 '삭제' 키를 누르기만 하면 사라진다
나의 하루는 컴퓨터 스위치를 올리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기록하고 기억을 저장시키는 것
세계는, 손 안에 있다
나는 컴퓨터 단말기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도시와
땅 밑의 태양 그리고 미래의 태아들까지 연결된다
나의 두 눈은 환한 불을 켜고 있는 TV
나의 심장은 거대하게 돌아가고 있는 공장의 발전실
모든 것은 개인용 컴퓨터의 스위치를 올려야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기를 공급하는 것은 그러나 그대의 의지
나는, 내 몸 속으로 힘을 공급해 주는 누군가에 의해 사육된다
내 귀가 섹스 쪽으로 타락하고 있다 / 함민복
잘 벗겨지지 않아요 ─ 제비(?)표 페인트
알아서 빨아줘요 ─ 대우 봉(?) 세탁기
구석구석 빨아줘요 ─ 삼성(?) 세탁기
빨아주고 비벼주고 말려주고 ─ 금성(?) 세탁기
우리는 그이가 다 빨아줘요. 잘 빨아주니 새댁은 좋겠네 ─ 럭키 슈퍼타이
무엇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빼는 이 광고에
우리는 무엇을 꼭 집어넣으라고 욕해야 할지
내 귀가 섹스 쪽으로 타락하고 있다
알레그로 / 이원
종이컵이, 보도 블록 위에서 종이컵이 구르고, 구를 때 세계의 한끝이 도르르, 말린다, 가려져 있던 세계의 담벽도, 드러난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길의 뿌리를 긁는다, 구르던 종이컵이 뒤집어진다 종이컵 안에서 구겨져 있던 울퉁불퉁한 길들이 줄줄이, 풀려 나온다, 소리들은 종이컵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러나, 보도 블록이 깨진 곳에는, 고인다, 고인 물 속에 종이컵이 끌고 와 버린 지평선이 담겨, ……, 사람들은 지평선을 피하며 걷는다, 축축한 그림자만 지평선으로 잠겨, 들어간다 그래도, 사람들이 블록처럼 떨어지고, 붙고, 하는 그 사이로 종이컵은, 여전히 허연 얼굴로 세계의 끝을 도르르, 도르르, 말아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