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좋은 땅이 되고 싶지 길가, 돌밭, 가시떨기 같은 땅이 되길 원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원한다고 해서 좋은 땅이 되지 않는다.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은 기름진 논을 만들기 위해 자기 아버지가 한 일을 소개한다. "가을철 깊은 산골짜기 하나를 모두 차지해서 놉을 얻어 칡넝쿨을 몽땅 베어 산 아래쪽에다 쌓아두었다가 10리도 넘는 길을 멀다 않고 그 마른 칡덩굴을 논까지 져 나르셨다. 산에서 징검다리까지 짊어져다 쌓아두었다가 징검다리에서 내집평 들까지 져 갔다. 두세 번씩 그렇게 반복을 하며 그 많은 풀을 논으로 가져가 보말 어머님과 썰어 놓에 깔았다." 좋은 땅이 되는 것은 논밭이 아니라 오직 농부의 수고를 따라 된다.
하나님도 같은 수고를 하신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2)
오병이어의 비유는 흔히 작은 것을 드리고 큰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처럼 좋은 땅이 내는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기대하는 마음이 앞설 수 있다. 하지만 밭은 스스로를 가꿀 수 없다. 밭은 농부의 일터다. 가만두면 금새 거친 풀이 덮이고 말 것이다. 밭은 농부가 가꾸고, 심고, 키우고, 수확하는 곳이다. 많은 소출을 냈을지라도 밭이 취할 영광은 없다. 밭은 죽은 사람처럼 말이 없다. 돌을 제하고, 굳은 땅을 기경하고, 쓴뿌리를 뽑아낸 농부에게 돌아갈 영광만 있다.
우리는 버려져서 황폐해진 땅과 같았으나 하나님은 정성으로 보살피셔서 쓸모있게 만드셨다. 우리가 내는 것은 가시떨기와 엉겅퀴 뿐이었으나 하나님은 좋은 땅으로 만들어가고 계시다. 스스로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고 남들도 그렇게 여겼으나 하나님은 성실하심으로 일구셔서 누구나 보기에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소출을 내게 하신다.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 계신다.
욥이 얼굴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통한 열매를 수확하신다. 다윗도 철저히 무너졌으나 그를 통한 열매는 계속 맺히고 있다. 하나님이 거두시는 열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실패나 성공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리고 못 누리고에 대한 것도 아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 열매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상관이 없다. 내가 아는 한 선교사는 선교지에 도착한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스데판이 죽은 자리에서 많은 열매들이 나타났듯, 그를 통한 열매는 지금도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아무 일도 안 하는가? 아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을 본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그대로 지나쳐간다.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닫아버린 마음은 하나님의 만지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닫음으로써 그 마음은 돌처럼 단단하고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다가간다. 마음을 연 것이다. 그 열린 마음을 하나님이 만지신다. 열려진 그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졌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은밀하게 숨은 야심과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서운한 마음이 점차 단단해져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가오신다. 마음을 가인처럼 닫을 수도 있고, 좋은 땅을 만드시도록 대문처럼 활짝 열어드릴 수도 있다. 수술대 위의 환자처럼 누워 그 손길을 순히 받을 때 나로써는 어찌할 수 없었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해 주신다. 바로 그 자리에 부드러운 살을 채워주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
열어드린 마음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자유와 평강이 임하는 것을 볼 것이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열매들이 30배, 60배, 100배로 나타난 것을 아버지께서 보시며 즐거워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