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는 중에 아내가 말한다. “비가 오는 거 아녜요?” 맞다. 비가 내리고 있다. 사실 아내가 말하기 전부터 빗소리가 들렸었다. 그런데 아내가 말한다. "빨래!!" “아, 맞다. 아침에 옥상에 빨래를 널었었지!"
한달음에 옥상으로 달려간다. 젖기 시작한 빨래를 걷으며 생각한다. 나도 빗소리를 들었는데… 아내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내는 말린 빨래를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소리가 들린 것이지 빨래를 걷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은 것이 아니다.
하와이 코나에서 경험한 일이다. 필리핀에서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도마뱀을 부띠끼라 부르는데, 하와이에서는 게코라고 불렀다. 필리핀 도마뱀과 크기는 비슷하지만 선명한 초록색에 붉은 반점이 찍혀 있어 화려한 옷을 잘 차려입은 깜찍한 모습이다. 필리핀의 아침은 닭이 깨우지만 하와이의 아침은 이 게코가 깨운다. “게코~ 게코~ ”하며 아침마다 멀리서도 들리게 우는 것이다.
그런데 더크라는 미국인 친구는 그 소리를 단 한 차례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운다며 "게코~" 하고 그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내일 아침에는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 날 아침 그를 만났는데 못 들었다고 한다. 그럴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몇 주가 흘렀는데도 그 친구는 듣지 못했다. 못 들을래야 못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아닌가? 색맹이 있듯 사람에따라 소리가 안 들리는 어떤 음역대가 존재하는가? 두 달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못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칠 때마다 미묘하고 어색한 웃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는 정말 못 들었을까? 아니면 많은 소리 중에 그 소리를 분별하지 못했던 것일까?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그것이다. 비 내리는 소리는 분명히 듣고 있는데 빨래 걷어야 한다는 소리로는 듣지 못하는 것이다. 가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뚜렷이 듣고 있는데, 가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은 못 듣는 것이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하루가 지나고, 몇 주나 몇 달이 지나고, 심지어는 수 십년이 지나도 듣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내 마음이 무엇에 점유되어 있느냐에 달린 일일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이라고 한다. 마음이 너무도 빠르게 하나님 외의 것으로 점유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내 것이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더크처럼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소리를 매일 들으면서도 끝내 못 들을 수 있다. 주님을 향해 의지적으로 눈을 들고 생각을 모으다보면 빗소리를 들으면서 ”빨래!“를 외치는 아내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주님!”을 인식하고 감사하는 일을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