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입력 2023.06.24 12:31 수정 2023.06.24 14:27
[한국전쟁 73주년 특집] "북한 괴뢰군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6·25 발발 긴급방송 목소리"
위진록 원로 아나운서 인터뷰
숙직서다 새벽에 군인 찾아와
쪽지 내밀며 "지금 방송하라"
전쟁후 22년간 대북방송 활동
1972년 LA 이민…식당 운영
지난 7일 가디나 자택에서 위진록씨가 본인이 쓴 수필집 ‘오래된 출장’을 들고 6·25 전쟁 발발 당시 임시뉴스를 보도했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1950년 12월 도쿄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서 대북방송을 하던 시절의 위진록 아나운서.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괴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반복)”
스물두 살 청년 3년차 아나운서 위진록은 몰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숙직실에 느닷없이 찾아온 국방부 한 군인의 요청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73년의 세월이 흘러 원로가 된 위진록(95)씨를 가디나 자택에서 만났다. 구순을 넘어 100세 ‘상수(上壽·병 없이 하늘이 내려준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발음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1보,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월 24일 숙직이었던 위씨는 저녁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새벽방송을 위해 2층짜리 방송국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6월25일 새벽 5시쯤 국방부에서 박 대위라는 사람이 찾아와 다짜고짜 잠을 깨웠어요. 쪽지를 보이면서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며 지금 방송하라고 했지요.”
그는 급히 당시 민재호 국장대리에게 연락했다. 민 국장대리는 용산 국방부까지 찾아가 사실확인을 했다고 한다. 곧바로 “이미 개성이 함락됐다. 방송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제가 원고를 직접 썼어요. 오전 6시30분 아침방송 시작과 동시에 북한군 공격 1보 임시뉴스를 내보냈지요.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일요일이라 휴가나온 군인들은 부대로 복귀하라는 의미도 담았죠.”
‘북한군 38선 전역 공격’이란 엄청난 뉴스가 나갔지만, 전쟁 당일 남한사회는 둔감했다. 1보를 내보낸 위씨도 오전 10시 퇴근 후 서울운동장 도시대항 축구대회 관람에 나섰을 정도였다.
“그 전에도 38선 여러 곳에서 무장 충돌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격이 중지되는 것 아닐까 생각했죠. 축구경기 전반전이 끝나자 장내에서 ‘북한군이 침략해서 오늘 축구시합을 못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야 정말 큰일났구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어요.”
곧 서울은 북한 인민군에 함락됐다. 경기도 문산, 임진강변 고랑포 등에서 두 달여 피신한 위씨는 9월 28일 국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을 보자마자 방송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정동에 있던 방송국은 폭파돼 흔적도 없었지만, 국군 서울 수복 사실을 알려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송신소가 있던 당인리(서울 마포구) 발전소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 기술자들 도움을 받아 송신 장비, 마이크로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역사로 남은 임시방송은 또 시작됐다.
“서울 시민 여러분,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서울이 탈환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유엔(UN)군과 국군은 북쪽으로 도망가는 공산군을 추격하는 중입니다….”
북한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그, 6·25전쟁 발발 1보와 9·28 서울 수복 1보라는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이 기록은 결국 그를 유엔군총사령부방송 심리작전국 소속 아나운서 길로 이끌었다.
서울 수복 후 위씨는 임시방송국을 지키며 전황을 라디오방송으로 전했다. 그러다 방송국을 찾은 유엔 연합군 미 육군 장교 매튜 중령의 눈에 띄었다. 매튜 중령은 위씨의 목소리를 듣고 도쿄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가서 한 달 정도만 대북방송을 하고 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 달 예정이던 파견 생활은 1951년 1·4후퇴로 연장됐다. 그후 22년간 그는 도쿄와 오키나와를 오가는 ‘대북방송 전문가’의 삶을 살았다.
초기 유엔군총사령부방송은 주둔군사령부가 있던 도쿄 NHK 방송시설을 사용했다고 한다. 대북방송을 위한 심리작전국에는 위씨 등 아나운서 2명, 작가 및 번역가, 각계 전문가 등 한국인 10명 이상이 일했다. 대북방송은 ‘전쟁 관련 뉴스, 미국 등 국제뉴스, 스탈린 독재, 세계 공산화 전략, 김일성 부조리’ 등을 다뤘다고 한다.
위씨는 1972년 삼남매 교육을 위해 일본에서 LA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는 허모사비치에서 ‘서프 버거(SURF BURGER)’집을 인수, 위씨네 식당(WEE’S KITCHEN)을 운영하며 제2 인생을 살았다. 대북방송 아나운서였던 그는 1990년 꿈에 그리던 고향 북한을 방문해 형님 가족과 재회도 했다.
한국전쟁 정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마주한 위씨는 자신에게 남은 생이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실상을 꼭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6·25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희미해지고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장 걱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6·25가 이승만과 미국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미국의 모략이다’라고 말해요. 그런 말을 전하는 교과서까지 있어요….”
위씨는 역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견해는 존중했다. 다만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6·25는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 역사적으로 겪은 동족상잔 중 가장 참혹한 전쟁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당시 소비에트연방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입니다. 북한이 T34 탱크와 중화기를 앞세워 남침을 시작한 겁니다. 요즘 이 사실을 인식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져 가는 세태가 슬퍼요.”
위씨는 “한국 사람이라면 지나간 역사를 똑바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외면과 왜곡 없는 자세를 갖출 때 동족상잔 전쟁을 똑바로 평가하고, 남과 북 미래를 새롭게 펼칠 수 있다는 지론이다.
“(전쟁은)‘누구 잘못이다’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당시의 사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편협하지 않게 역사를 인식해야 해요. 그래야 비극적인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고 (남과 북이) 신뢰관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약력: 평양 사범학교 중퇴/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1950~1972년 유엔군사령부방송(VUNC) 대북방송 아나운서/재미방송인협회 고문 및 가주예술인연합회 회장.
▶저서: ‘’오래된 출장’,‘고향이 어디십니까?’
김형재 기자
# 사설 # 위진록 # 당시 임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