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낙랑은 한(漢)나라의 속국. 광무제의 지배하에 한족(韓族) 출신
최리가 왕위에 올라 자명고의 위대함을 만백성과 함께 찬양한다.
고구려는 주위의 군현들을 정복하여 신생 국가로서의 웅지를 펼치니
그가 곧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이다. 낙랑에 신명한 자명고가 있듯이
고구려에는 신마(神馬) 거루가 있어 양국이 똑같이 두 개의 우상물을
백성들에게 주지시켜 단결과 용맹을 고취시켜 나간다. 고구려의 왕자
호동은 후비의 소생, 원비의 질시를 받으매 기인 행세를 함으로써
자신의 야망을 숨긴다. 백성을 현혹시키는 거루는 허상이며 전 백성을
전쟁에 내몰기 위해 조작된 신마임을 역설하다 부친 대무신왕에게
추방을 당하고 광대가 되어 떠돌다가 낙랑 땅까지 숨어 들어오게 된다.
낙랑의 왕 최리에게는 외동딸 낙랑공주가 있는데 그녀는 한나라의 장군
장초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한나라와 낙랑이 군신 관계임을
강요하는 정략적인 약혼이었다.
낙랑공주의 생일 잔치가 성대하게 거행되고 낙랑 전국의 예인들과
광대들이 왕검성의 잔치마당에 초청되어 연회가 벌어진다. 여기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사이에 숙명적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낙랑공주는 광대라고 하는 한 사람의 시인을 만나면서 그녀의 화려한
궁성에서 느낄 수 없었던 진솔한 인간적인 사랑을 알았고 가식없는
남자의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2막
두 사람의 밀애를 눈치챈 한나라의 장군 장초는 호동의 책략을
감지하고 호동을 체포하여 낙랑왕 최리와 낙랑공주 앞에 대령시킨다.
모든 문무 백관들 앞에서 호동이 일개 광대가 아니라 고구려의 왕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무엇보다 배신감과 모멸감이 지금까지의 한갖
순진무구한 공주를 처절한 증오의 화신으로 돌변케 하여 낙랑공주는
직접 호동왕자를 고문하게 된다.
왕자 호동이 참수령이 집행되기 전 날 한가닥 연민의 정으로써
낙랑공주는 감옥에 갇혀 있는 호동을 찾아가 배신에 대한 용서를
해준다. 거기에서 호동으로부터 엄청난 모순, 역사의 아이러니를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낙랑왕 최리는 한나라와의 군신관계를
영속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게 되며,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자명고라는 허구의 우상을 만들어 그 북소리를 울리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공포에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漢)나라는
이민족이요, 고구려와 낙랑은 같은 한족(韓族)이니 통일은 필연임을
역설하는 호동, 외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 나라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독재와 복종의 상징인 자명고가 없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낙랑공주는
비로소 단순한 이념의 늪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며 호동을 탈옥시키고
스스로 자명고에 불을 지르는 거사를 감행한다.
자명고 안에 숨어있던 12명의 타고수들이 불길 속에서 치솟아 오르며
영원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사라지고 만다.
역적이 된 낙랑공주는 최리의 칼에 쓰러지고 고구려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한 왕자 호동은 낙랑공주의 시체 곁에서 스스로 자결을 함으로써
양국의 왕으로 하여금 대립을 극복하고 대화합을 이루도록 한다.
기타의글>(인사말)//((조경희(서울예술단 이사장)))
<<재단법인 서울예술단의 의미>>
새 옷을 입은 우리 모습입니다.
이제 객석의 불이 점점 어두어지면 관객들은 우리의 첫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리에서 눈을 반짝일 터입니다. 나는 개막 5분을 앞둔
무대감독의 설레임으로 재단 법인이 된 우리 서울예술단의 의미를 한번
더 정리해 봅니다.
'91년 1월 3일 법인 설립 등기를 마친 것은 우리의 사회 규법 안에서
공연예술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방법을
사회에 공표한 것이며, 민간 공연 예술 단체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재단 법인입니다.
처음의 진정한 의미는 선택과 시도에 있다고 봅니다. 선택했으므로
우리는 얻은 것이 있고 한편으론 잃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택엔
의지와 고통이 따르는 법이어서 재단 법인화에 따라 관계 기관과 임직원
일동은 정성과 공을 아끼지 않았고 이종덕 단장을 중심으로 한 단원들은
신뢰와 의지 속에 고통을 인내하며 사랑의 품을 넓혀 왔습니다. 이
선택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과 정성을 쏟아 온 이들께 나는 감사와
사랑의 정을 드립니다.
시도를 했으므로 우리는 지켜봐야 겠습니다.
지켜보되 남의 입장에서가 아니고 같은 소망을 품은 나의 위치에서
내가 할 부분을 찾아 열심히 일하면서 지켜 봐야 할 것입니다. 공연
예술 단체는 흔히 말하는 재정 자립이 불가능합니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매표 수입으로 제작비 등 운영비를 충당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가능할 수도 있다라는 편안한 가정은 이제 버리고 서울예술단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문화 예술의 활화산이 되어 뜻한 대로 사업을 수행해
갈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방안을 강구해 가야겠습니다.
자! 이제 막이 오릅니다.
스탠바이 - 그날이 오면!
((이종덕(서울예술단장)))
<<민족통일의 <그날이 오면!>을 개막하며>>
먼저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感謝)드리며 '91년 눈부시게 열리는
신록(新綠)의 계절에 재단 법인으로 거듭 태어난 서울예술단이 의욕적인
첫무대 <그날이 오면!>을 개막하게 된 것을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서울예술단은 '88서울예술단이라는 이름으로 1986년에 창단되어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등 역사적인 국제 행사에 참가 우리 문화
예술의 면모를 선양한 바 있으며 계속해서 국내외 무대를 통하여 우리
예술의 참모습을 보여왔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고유의 우수한 예술 작품을 다양하게
정형화(定型化)함으로써 무대 공간을 입체적으로 조형(造形)하는 창작
뮤지컬을 창출하는 작업에 힘써 왔습니다.
무대 예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하리만큼 중요한 예술의 한
분야입니다. 그러므로 무대 예술은 그 나라의 얼굴이요, 가슴이요,
자랑스런 민족의 삶의 현장입니다. 무대 예술인의 의무와 사명이 크고
막중한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금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개성과 힘있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우리
예술의 내실과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연극.영화의 해입니다.
이렇듯 범국민적으로 힘을 모으는 '연극.영화의 해'를 맞아 특히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된 '유치진의 달'에 그의 창작극 <그날이
오면!>(원제(原題) 자명고(自鳴鼓))을 뮤지컬로 무대화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원작 <자명고>는 두 나라로 갈라져 있던 한 민족의
통합을 기원하는 작품으로서 2천년의 세월이 흘러간 오늘의 우리에게
새삼 심금(心琴)을 울려주는 주제입니다.
아무쪼록 저희 서울예술단은 앞으로도 우리의 창작 무대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남북의 문화 교류에 대비하고 국제화 작업에도 적극
분발할 것을 약속하면서 여러분의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평론)//((유민영(단국대 예대학장,, 연극평론가)))
<<유치진과 <자명고> 공연의미>>
주지하다시피 동랑(東朗) 유치진(柳致眞)(1905-1974)은 한국 현대극의
기초를 닦은 거목이다. 그는 극단운동(극예술연구회)으로 연극계에 첫
발(1931년)을 디딘 이후 희곡 창작, 연출, 비평, 연극 교육, 극장 경영
등 여러 면에 걸쳐서 연극이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선구자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 연극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대중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가 끼친 영향이라는 것은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작품을 별로 무대에 올리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가지는
번역극을 선호하는 연극계 풍토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작품이 시공을
초월한 예술성이 부족한 데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그의 재능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독특한 역사 상황과 그의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로 인한 것이다. 즉 그는
식민지 치하에서 연극을 항일 독립의 수단으로 생각했었고, 이는 해방
이후의 굴절된 현대사 속에서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40여 편의 작품들은 역사의 비판적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당 시대 상황에 처해서 민족을 일깨우려는 계도자(啓導者)의
입장에서 살 것이라 하겠다. 이같은 계몽적 작품이 시대가 바뀌면서
오늘의 대중 감각과 괴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연극인들이
그의 작품 취택을 기피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이번에
공연되는 <자명고(自鳴鼓)>(1947년작)만 하더라도 해방 직후의 민족
분열상을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비판과 아픔으로 엮은 작품이다.
오히려 아픔을 넘어서 연민과 관용의 마음으로 썼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리라. 다 알다시피 해방과 더불어 두 강대국의 통치
밑에서 정치 사회 세력들은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난투장을
벌임으로써 이 한반도는 그야말로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안개 상황이 유치진에게 매우 우려스럽게
비침으로써 그로 하여금 역사를 빌어 현실을 비판하는 <자명고>를 쓰게
만든 것이다. 환언하면 외세와 분단 고착에 대한 문제를 지난 역사를
빌어서 우회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재를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겠다. 즉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위씨조선을 말살한 후 조선 땅에다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 4군을 설치하고 다스렸는데, 고구려가 일어나 한(漢)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모든 부락을 통합시켰다.
네 군(郡) 중에서 한(漢)나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또 강력했던
낙랑을 통일하는 이야기로서 낙랑의 신고(神鼓)라는 자명고에 얽힌
공주와 호동왕자와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 바로 희곡 <자명고>이다.
그런데 여러 편의 사극(史劇)을 썼던 유치진은 언제나 사실(史實)에
충실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 작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기본 골격을 가져왔고 약간의 허구를 가미하는 방향에서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史實)에 충실하면서도 그가 역점을 둔 것은 분열로부터
통일을 이룩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다른 방향으로 흐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남녀간의 애절한 로맨스를 통해 주체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다 보니 호동(好童)과 낙랑공주 이야기가 기본이 된
것이다. 그가 주인공인 왕자 호동에 부여한 것은 강한 주체의식이고
낙랑공주에게 부여한 것은 주체성과 함께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이다.
물론 이들의 주체성과 애국심은 외세 배격과 민족 단결을 바탕으로 한
조국 통일에 귀결됨은 두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유치진은 <자명고>를 무슨 예술 작품으로 쓴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니다. 그는 해방 직후의 혼란상을 어떻게든지 정화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은 나머지 역시 대중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그는 특히
민족 해방을 위해 피를 흘린 독립 투사들의 빛나는 애국심을 염두에
두고 그와 같은 작품을 몇 편 썼다. 다음 작품인 <별>과
<원술랑(元述郞)>도 그러한 계열에 드는 것이다.
해방을 맞고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사분오열되어 이전투구하고 있는
사회상이 그에게는 안타깝게 느껴졌고 특히 민족 단합만이 조국 통일의
첩경이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자명고>는 바로 그러한 통일 염원의
작품이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 운동이 한창인 때에는 그 작품을
재조명해서 공연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는 의미가 있으며
연극의 해를 맞아 유치진을 기리는 뜻도 되리라 본다.
((이기동(동국대 교수, 한국사)))
<<호동 전설의 역사적 세계>>
고구려(高句麗) 왕자 호동(好童)과 낙랑국(樂浪國) 공주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는 지난 2천년을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 설화의
효시(嚆矢)로, 그 역사성(歷史性)과 비극성(悲劇性)에 있어서 하나의
완벽한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초창기(初創期)의 고구려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호동은 고구려 제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A.D.18-44)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왕의
차비(次妃)로 고구려에 복속해 온 갈사왕(曷思王)의 손녀였다.
본래 고구려는 부여족(扶餘族)의 유이민(流移民)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와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의 산악 지방에서 건국한 나라였다.
국호(國號)인 고구려 자체가 '골'.'굴'이라는 말에서 나왔듯이 고구려는
산골짜기를 무대로 하여 강가를 따라 진출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어났으나,
국초(國初)부터 왕성한 기세로 주변의 여러 세력을 통합해 갔다. 이같은
국가 통합 운동은 주로 무력적(武力的)인 수단에 의존하였으나, 때로는
혼인 동맹의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대무신왕도 부조(父祖) 이래의 정복 사업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당시의 국제 환경을 보면, 고구려 최대의 경쟁 국가는 중국(中國)과
부여국(扶餘國)이었다. 당시 중국은 왕실의 찬탈, 농민 반란을 겪는 등
한때나마 내부적인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윽고 후한(後漢)이
등장하면서 다시금 안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 세력이 동방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은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 낙랑군과 사두(死斗)를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부여국은 고구려의 건국 초부터
종주국(宗主國)으로 자처하면서 때때로 고구려에 대해서 군사적 압박을
가해 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호동 왕자는 부왕(父王) 재위
15년(A.D.32) 4월에 오늘날의 함남(咸南)지방인 옥저(沃沮) 방면으로
유람하러 떠났다가 마침 이 곳을 둘러보고 있던 낙랑국왕 최리(崔理)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 혼인은 최초
고구려쪽의 제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어쩌면 후자(後者)가 옳은 듯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꾀하는 비결로 군사적인 정복 외에 혼인 동맹의 형식을 빌린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동 왕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 낙랑국의 정체는 확실하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낙랑이라고 하면 중국이 설치한 낙랑군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낙랑군의 우두머리는 중국 본국 정부에 의해서 임명되는
군태수(郡太守)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독립된 나라의 왕은 아니었다.
하기야 낙랑군 태수는 당시 한국인 토착 세력에게는 마치
군왕(君王)처럼 비쳤을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 낙랑국이란
고구려의 정복 과정에서 고구려 세력과 맞서게 된 주변의 어떤 강력한
토착 국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후대(後代) 고구려 사람의
기억으로는 중국 세력의 전위(前衛)인 낙랑군이야말로 고구려 초기
역사상 최대의 숙적(宿敵)이었던 까닭에 만만치 않은 이 적수를
낙랑국이라 한 듯하다.
전설에 의하면, 호동 왕자는 낙랑국에 두고 온 공주에게 낙랑국의
무기고(武器庫)에 보관중인 고각(鼓角)(북)을 파괴하도록 은밀히
지시했다. 그런데 이 북은 예사로운 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신비스런 악기였다. 사랑에 눈이
어두어진 공주는 남편이 시킨대로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칼로
찢어버렸다. 공주가 이 사실을 호동 왕자에게 통보하자 고구려는
준비했던 군대를 동원하여 낙랑국을 쉽게 멸망시켰다. 다만 낙랑국이
망하기 직전에 공주는 나라를 망하게 한 죄로 부왕(父王)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 이야기는 공주의 비극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호동 왕자 역시 이 해 11월 부왕의 원비(元妃)로부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결국 자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북이야말로 호동 왕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심 테마가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한국의 가장 오랜 서정시(抒情詩)인 공후인이
공후라는 악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호동 왕자의 비연의 이야기도 이 북을
둘러싸고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호동 왕자의 이야기에서 북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고대(古代)의 사상과 문학, 예술은 그 자체
주술(呪術)(Magic)의 세계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북이나 징은 우뢰 소리를 모방한 일종의 주술이었으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다름아닌 귀신의 소리로 간주했었다. 낙랑국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던 이 북은 적군이 침입하면 스스로 소리를 내는
이른바 자명고(自鳴鼓)였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신(神)의 계시(啓示)를
알려주는 일종 신기(神器)였던 셈이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에 평화와
안녕을 상징하고 있던 것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이름의 피리였던
것과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은 물러가고, 질병은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오던 비는 개고,
풍랑은 가라앉고, 물결은 잔잔해졌다는 것이다.
중국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국초(國初)에 중국의 군현인 현도군을
통해서 중국으로부터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樂工)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일찍부터 '귀신의 소리'를 내는 이 같은 악기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자명고를 둘러싸고 전개된 호동 왕자와 낙랑국 공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초창기 고구려 역사의 한 단면(斷面)을 잘 암시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고구려의 한족(漢族)에 대한 투쟁 의식을 반영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고구려의 국가 통합에의 집념(執念)을 보여주는 역사적 소산(所産)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고 생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