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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문예 권두칼럼>
지도자의 덕목(德目)과 시대적 소임
- 상상력의 확장과 공동체의식의 소중함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고문)
1. 암울한 사회현상과 지혜로운 삶의 잠언
모름지기 세월은 강물처럼 덧없이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 채워가는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문화의 21세기, 안타깝게도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그 어느 시간대보다 갈등과 대립으로 혼돈을 겪고 있는 우리사회는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간에 오랜 날 필자 나름으로 힘겨운 삶을 역주(力走)하면서도 몸소 ‘극소수의 창조자임’을 자처하지 않았지만 언어공해의 심각성을 경계하는 한편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 조국(祖國)이 있음”을 일관되게 일깨우면서 ‘공동체의식’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역설하였다.
각론하고 「2018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하여 대학 강단에서 정년을 끝낸 직후, 고등학교의 후배들과 함께 강원도 내 18시군의 2018명으로 조직한 합창단(ABBA, I have a dream, 아리랑)의 공연을 기적적으로 끝낸 그날의 가슴 벅찬 감동은 온통 눈물이었다. 특히 2012년 6월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원으로 남아연방 요하네스버그 여행길, ‘용서의 통 큰 지도자 만델라의 동상 앞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으로 피 얼룩지는 이 나라의 사회현실에 못내 가슴 아파 뜨거운 눈물이 울컥 솟구쳐 올랐던 일은 10여년이 지났지만 결코 지워낼 수 없다. 오늘도 낮은 산자락이 푸름으로 짙어가는 시간, 영혼이 자유로운 바람결에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프란시스코 교황의 “비록 우리는 그분에게 자비를 구하는 일에 지칠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라는 순전한 그 삶의 일깨움이 가슴에 저미어온다. 특히 지난 2014년 8월 4박 5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예방했을 당시『경향신문』의 “교황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저파(低派)”라는 칼럼이나 “살아있는 자만이 춤출 수 있다.”고 생명외경심을 역설해온 교황의 행보와 인품이 더없이 응축되어 있다.
이처럼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인 겸양지덕(謙讓之德)을 새삼 논하지 않더라도 “리더는 대중과 함께 어울리며 때로는 넘어진 자의 손을 잡아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자이다.”라는 교황의 가르침이 더욱 절박한 시간대이다. 또 한편 국가적으로 대다수 국민이 기대하고 소망한 새로운 정권의 탄생과 더불어 이율배반적이랄까? 격화일로로 치닫는 빈부격차와 소통의 부재로 암울한 현실상황이지만, 가까운 시간대에 현 정부의 각계인사들과 여·야의 정객은 이마를 맞대고 당리당략을 떠나 ‘화합과 통섭(通涉), 그리고 공의로운 사회의 지평을 편 가름 없이 활짝 열어갈 일’이다.
그 같은 정황에서 2013년 유네스코가 ‘인류의 정신적 큰 스승’으로 추대한 조선조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몸소 낮은 자를 자처한 프란시스코 교황처럼 다산도 겸양(謙讓)만이 가장 큰 인간의 미덕임을 자의식으로 수용하였기에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끌어 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들어 올려준다.(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는 불변의 일깨움을 아름답고 지혜로운 잠언으로 이처럼 시사(示唆)하였음을 고매한 품격과 강직한 신념, 그리고 빛나는 자존감을 지닌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라면 결코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까닭에 ‘어울림과 상생의 큰 틀’에서 정신작업에 종사하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은 비록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시간대일지라도 일관된 집념으로 존엄한 시대적 소임을 수행할 일이다. 위대한 창조적 영혼은 보다 아름답기에 따뜻한 감성을 지닌 문인이라면 갈등과 깊은 영혼의 상처(trauma)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도 꿈과 비전을 일깨워줄 역사의 정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당당한 자존감을 지니고 미래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그간에 배달족이면서도 친일사관으로 인해 단군(檀君)의 실체가 부정되어 신화로 왜곡된 지난날의 치욕적 역사는 깔끔이 복원되어야 한다. 이처럼 ‘한민족의 피와 혼의 상징인 단군의 존재가 새롭게 조명되고 우리의 상고사(上古史)가 권력의 군림이 아닌 교화(敎化)의 역사’로 입증된 점은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준 사실은 한층 더 뜻깊을 따름이다.
어디까지나 분망하고 불확실한 삶의 일상에서 원로를 자칭한 이들 중, 국가와 민족의 대의를 내세우며 곤욕을 감내했던 과거의 의지를 망각하고 상생의 틀에 위배된 생각의 속도로, 용서의 큰 철학이 배제되어 갈등을 빚는 행위를 응시하면 심장이 저며 오는 아픔을 절감할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점에서 1995년 청각장애자로 미스 아메리카의 영예를 얻었던 헤더 와이스톤이 “이 지상에서 가장 불행한 장애자는 불평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라며 기자의 질문에 답하였듯 명분도 없이 신뢰와 공의를 저버린 행태는 시대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비열한 행위임은 새삼 유념할 바다.
2. 고정인식의 전환과 사유의 깊이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 직후 존재감을 상실한 세대의 작가들은 물질문명이 자리하지 않아 ‘백인의 묘지’로 일컬어진 아프리카로 도피하였으나 그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행위였다. 뒷날 인구의 증가와 함께 세계의 공간이 점차 도시화되는 암울한 환경적인 조짐은 그나마 인류를 절망의 시간대와 접하는 환경조건의 계기로 인식의 폭을 넓혀갔다. 앞서 엘빈 토플러가「미래의 충격」에서 “인류가 가진 과학자의 90%가 현재 살고 있다.”는 기술을 새삼 참작할 일이다. 한편 동일한 시간대에 일부 사회학자들은 “이들의 두뇌와 대량생산수단이 새로운 용구를 무더기로 신속하고 다양하게 쏟아낼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소비자가 왕인 내다버리는 폐기문화를 거쳐 오토바이클, 파도타기, 심해잠수 등 레저와 아문화(sub-culture)에 돌입하며 인문학의 침체로 피폐된 정신문화는 초산업혁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차제에 비록 좌절감으로 세상이 암울하여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할지라도 살아온 날에 관한 자성성찰은 끊임없이 주어져야할 것이다. 그렇다. 격랑의 세월 앞에서 공동체의식(inter-being)에 의한 슬로 라이프적인 여유로움을 체득할 때, 갈등의 매듭이 풀리는 자연의 이법을 체득할 것이다. 증오심은 사랑과 용서에 의해 용해되기에, 자기의 주관에 의한 잘못은 더 이상 반복하지 말고, 불확실한 시간대일지라도 건강한 비판정신과 예지를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비생산적인 행위를 끝내야 한다.
각론하고 오늘의 이 절박한 사회현상에서 사유하는 자의 삶과 의미에 대한 검증이 더없이 요청되는 연유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는 음울하다. 비열한 이기주의 때문에”라며 『쟝 크리스토퍼』에서 로망롤랑이 “죽어야 할 자여, 죽음으로 가리라. 괴로워해야 할 자여, 괴로움으로 가라. 행복하고자 사는 것이 아니니, 나의 섭리를 이루고자 사느니라. 괴로움을 당하여라. 그리고 죽어라. 그러나 네가 되어야 할 것이 되어야 한다-한 인간이.”라고 지적은 유념할 점이다. 이처럼 지식·정보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심리적 병폐성의 치유를 위해 신앙치료를 비롯한 회화 및 음악치료 등이 현실적으로 그나마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놀만 빈센트 필이 "한 순간의 분노나 격한 감정이 치솟을 때, 아름다운 기억이나 좋은 시를 떠올리면 마음에 평정을 얻게 된다."는 시적 치료는 생산적 결과이다. 그렇다. 인간은 삶의 여정(旅程)에서 온갖 고뇌를 겪는 유한적 존재이기에 보람된 삶을 위해 사유의 깊이를 더하되 ‘밤에 입은 잠옷이 한순간 수의(囚衣)가 된다.’는 필연성을 망각하지 말아야한다.
모름지기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물음 앞에 자신을 겸허히 놓아 보는 행위는 더없이 막중하다. “어제는 어떻게 살아왔고, 오늘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내일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생의 종말 뒤에 영혼의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의식은 타당성이 주어질뿐더러 이 같은 논의는 ‘어떤 미래의 지평을 열어갈 것이며, 삶의 가치를 무엇에 둘 것인가?’의 물음과도 직결된다. 비록 고통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낡은 나(眞我)는 죽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기에 주어진 운명에서도, 새로운 것을 점철하는 고뇌의 시간은 보다 절박할 것이다.
까닭에 가치와 의미는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적 행위와 연계성을 지니기에 인류의 시성(詩聖)인 괴테도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여기서 참다운 가치와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생명도 자연의 이법에 거스름이 없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였기에 생체리듬 또한 끝내 정지되지 아니하였다. 한편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긍정적인 삶이 수반되어야할 것이기에 ‘오늘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반문(反問)이 거부감 없이 주어질 때 비로소 당당한 자존감이 작동하는 경이적인 효용성은 빛날 것이다.
3. 삶의 좌표설정과 명쾌한 공감
어디까지나 “신의 나라는 씨앗을 팔지 과일을 팔지 않는다.”는 『탈무드』의 교시는 자아인식의 소중함과 애씀의 땀 흘림을 일깨운 노력의 결과이다.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정진해야 할 이 시대의 우리는 ‘높은 자유와 지성, 진정한 세계의 성숙한 문화시민으로서의 세계고를 함께 절감하되’ 건강하고도 생산적인 정신작업을 올곧게 수행할 바다. 까닭에 저마다 이 유의미한 삶의 공간에서 조금은 여유롭게 서로를 반조(返照)하고 존엄한 민족의 혼(魂) 또한 줄기차게 일깨워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일상의 일깨움을 응당 수행할 일이다.
또 한편 암울한 삶의 현장에서 한 때나마 지난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최 기간에는 필자 나름으로 뜻한 바가 있어 지역의 후배들과 「사단법인 k 정나눔」을 발족시켜 IOC위원들과 선수임원, 또 세계 언론인에게 우리국민이 직접 손으로 뜬 하얀 목도리를 나눠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존엄한 삶을 믿음으로 수긍하며 경계의 벽을 허무는 고독한창조적 행위를 지속한 연유라면, 역사사회학자인 테다 스카치 폴이 “예리한 메스로 상처낸 부위를 잘라내고 토막 내며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라.”며 우리가 직면하는 현상에 관한 몰입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교시한 탓이다.
특히 현재 여러 양상으로 어려운 사회현상에서 지극히 사적인 관계이지만 강원도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지니고 “우리는 미완의 존재이기에 함께 간다.”는 특정한 공직자의 일관성을 지닌 통시적 좌표설정과 명쾌한 공감을 일깨워준 까닭이다. 이와 같이 21C 문화의 지역구심주의의 시간대에서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갖춘 지도자라면 상생을 위한 서번트 리더십으로 대립과 갈등의 역겨운 증오심을 말끔 씻어내야 한다. 비록 불확실한 상황일지라도 동서양을 융합하는 지구상의 가장 이상적인 문명창조국가로 거듭나 눈부신 르네상스의 지평을 열어 끝내 낡고 그릇된 고정관념을 청산하는 극명한 삶의 지혜로운 잠언을 필히 대륙의 심장에 깊이 간직하여야 한다.
각론하고 ‘사유하되 멈추지 말아야하는 것은 보편적 이치이지만 ‘날아가는 새도 지나치게 생각하는데 열중하면 추락하는 것’처럼 냉소적인 이기주의로 치닫는 시간대에서 지나친 편 가름은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감으로 결집력을 다잡을 일이다. 또 하나 비록 예기치 못했던 불확실한 일들일지라도 최소한 덕망 있는 참다운 지도자라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소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미더운 자세로 국가적으로 겪는 총체적 어려움에 슬기롭게 대처해서 현실상황을 합리적으로 풀어나갈 때 조국의 건강하고 밝은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그간에 대다수의 우리는 안타깝게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상실한 체, 비굴하게 현실에 안주했던 부끄러운 행위는 뼈아픈 자기성찰을 통해 극복할 일이다. 차제에 인간은 가치 있고 정의로운 삶의 명백한 목적 아래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표출할 타당성을 지니기에 오마를 이븐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네 가지>에서 ‘흘려버린 시간과 놓쳐 버린 기회임’을 제시하였듯, 존엄한 삶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지나치지 말아야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땅의 국가안보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현상에서도 당리당략에 이끌려 위기에 처한 국가의 관리를 철저히 망각한 공직자나 정객들의 적폐는 더 이상 용납되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서 ‘비록 푸른 도끼날(刃)에 향나무는 찍히면서도 향 내음을 뿜어내듯이’ 고귀한 품격을 지녀야한다. 차제에 민족의 큰 스승 도산(島山)이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담당하는 것이기에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지니라.”는 그 가르침을 끝내 망각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이처럼 옛 성현의 얼굴에서 추상같은 근엄함과 온유함이 조화된 표정을 접할 수 있듯 미래지향적인 비전이 제시된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명쾌한 공감을 불러내야 한다. 까닭에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들어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잠언 29:11)”라는 말씀을 성정(性情) 다스리기로 몸소 깨닫고 아름다운 삶의 동행을 통해 불멸의 예술혼을 ‘뜨거운 대륙의 심장’에 각인시키되 그 존재감을 눈부시게 피워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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