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靖齋) 남정호(南廷浩)
樂民 장달수
진주 동쪽 50리쯤에 진성면 두소(杜蘇) 마을이 있다. 여러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가리고 있어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시내가 마을을 안고 맑게 흐르는 곳으로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어 밭 갈고 독서하는 어진 군자가 거처할 만한 곳이다. 이 마을에는 의령(宜寧) 남씨(南氏)들이 지난 500년 동안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두소마을에 은태사(殷太師)인 기자(箕子)를 숭모하며 살아온 선비가 있으니, 바로 정재(靖齋) 남정호(南廷浩)다. 정재가 숭모해 온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기자조선을 세운 중국 은나라 말기 충신이다. 중국 은나라 28대 태정제(太丁帝)의 아들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숙부다. 농사와 상업, 예법 등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조카인 주왕의 폭정에 대해 간언(諫言)하다 유폐되었고, 뒤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창업을 하자 우리나라로 옮겨와 기자 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정재는 어려운 시대를 살며 충언을 서슴지 않았던 은나라 기자를 따르고자 하였으며, 이는 자신이 처한 처지가 이와 비슷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호를 ‘정재(靖齋)’라고 한 것은 의로움을 다하여 마음의 평온함을 구하고자 하는 그의 취향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난세를 살아간 중국 기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할 수 있다.
정재는 1898년 두곡 마을에서 두와(杜窩) 기원(祺元)과 함양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자질이 남달라 부친이 15세가 되기를 기다려 처제(妻弟)인 간암 박태형에게 보내 소학 사서 등의 책을 배우게 했으니, 10여 년 동안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익혀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명쾌하게 분별할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여가로 몸소 집안일을 하며 힘들어도 내색을 하지 않고 어버이 모시기를 정성껏 한결같이 했다. 스승이자 외숙인 간암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모노정(慕魯亭)을 중건하는 일에 앞장섰다. 간암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선비이자 애국지사인 연재 송병선의 제자로 집 근처에 ‘모노정(慕魯亭)’을 세워 제자를 양성하고 벗들과 강학했던 선비다. 1929년 부친상을 마치고 회봉 하겸진을 덕곡서당에서 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스승 간암이 세상을 떠나 배울 곳이 없어 낙담하던 차에 벗인 강성중이 회봉에게 배울 것을 권유해 회봉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회봉을 만난 정재는 매우 기뻐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니 회봉 역시 정재를 아끼게 되었다. 그리고 회봉은 ‘정재기(靖齋記)’를 직접 지어 주며 학문을 면려했다. 1937년 정재는 일제가 만동묘를 훼손하는 것을 항의하다 여러 유림들과 괴산경찰서에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이로부터 정재는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삼갔다. 1939년 양주로 가서 선대 묘소에 참배하고 이해 겨울 집안의 조카들과 글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지곡정(止谷亭)에서 서당을 열었다.
지곡정은 두곡 마을 의령남씨 입향조인 지곡 남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사이다. 지곡은 14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홍문관의 벼슬을 하였으나 세조가 즉위 하자 귀머거리를 칭탁하고 종제인 남포와 함께 밀양으로 물러나 점필재 김종직을 좇아 함께 지내다가 진주의 두곡으로 이사하여 후손이 대대로 세거한 것이다. 1940년 고산서원 향례에 집례로 참여했으며, 향례를 마치고 도산서원, 학봉 김성일 종택 등을 둘러보았다. 이어 회봉 선생을 모시고 통영 등을 유람하고 오는 길에 회봉이 두소동을 방문했다. 정재는 회봉을 모시고 이씨들의 광풍제월정, 정씨들의 제강서당, 구씨들의 창랑정 등을 둘러보고 시를 지었다. 정재는 괴산경찰서 투옥 후 일제에 대한 반감을 거세게 가지고 있다. 의령선비 오당 조재학은 을사늑약을 강력하게 반대하다 일제의 감시를 받자 이를 피해 은둔 생활을 한 독립지사였다. 오당이 남루한 차림으로 정재의 집에 찾아오면 의복을 새로 만들어 주고, 유숙할 때는 최대한 편안하게 대접을 하고 떠날 때는 노자를 넉넉히 해서 배웅을 했다. 광복 후 위당 정인보가 회봉을 찾아 덕곡서당에 왔을 때, 정재를 만나보고 학문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며 미군정이 끝나면 나라를 위해 같이 일을 해 보자고 제안을 했지만, 1948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아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해 보지도 못했다.
정재는 6권 4책의 문집을 남겼다. 1988년 아들 정희(正熙)와 중희(仲熙) 등이 편집, 간행한 것이다. 문집에는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시들이 많다. ‘괴산옥중(槐山獄中)’ ‘원조유감(元朝有感)’ ‘우음팔절(偶吟八絶)’ 등에 망국민의 한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서(書)의 ‘상내숙간암선생(上內叔艮巖先生)’은 스승인 박태형(朴泰亨)에게 올린 것으로, 문목으로 위소(慰疏)·상례·답부장(答賻狀)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에 대해 질의하였다. ‘상회봉선생(上晦峰先生)’은 하겸진과 학문 처세 충의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잡저의 ‘재거쇄록(齋居鎖錄)’은 자신의 행동 규범을 규정한 것이고, ‘구암서원통문(龜巖書院通文)’은 서원 원생들의 임무를 지적, 성현의 도를 높여 바른 길을 잡고 이욕의 마음을 버려 인의의 대도로 향할 것을 촉구한 내용이다. ‘북유기행(北遊紀行)’은 북으로 안동 일대의 선현의 유적을 답사하고 그 여정을 상세히 기록한 글이다. 굴천 이일해는 “옛 친구가 밖에 나가서는 소나무 대나무를 어루만지니 그 정신은 산뜻하고 들어와서는 책을 읽으니 그 뜻은 고상했다. 산뜻하기 때문에 능히 세속에 물들지 않았고 고상하기 때문에 능히 옛날과 맞았다. 대개 소나무 대나무는 실로 옛 친구의 친구였다.”고 하며 정재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