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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6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간밤의 숙취로부터 채 헤어나지 못해 머리는 지끈거렸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 날은 모처럼 별다른 약속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 수는 없었다. <한겨레>에 이 연재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시어머니처럼 엄한 원고 마감 시간을 맞추어야 했다. 나는 매주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휴일에 쉬는 일은 접어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맑은 공기로 머릿속을 좀 헹군 뒤에 학교로 향할 참이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나는 숙취에서 완전하게 풀려나지 않으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문득 학교로 가는 것보다 작업실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북쪽으로 가야 학교가 있고, 작업실이라 이르는 전주 근교의 누옥은 남쪽으로 가야 한다. 그 작업실에서 글 쓰는 작업을 하기는커녕 몇 주째 둘러보지도 못했다. 마당에 돋아나 있을 풀들과 툇마루에 쌓여 있을 먼지들을 어떻게 하나? 풀을 뽑고 청소라도 하고 방이 숨을 쉬도록 환기라도 해줘야 할 텐데. 거길 가면 새소리로 내 어지러운 머릿속을 씻어낼 수도 있을 텐데. 돌담 밑에 고추를 몇 주 심고 그 옆에 얼갈이배추 씨를 뿌려놓은 게 생각났다. 그것은 농사도 경작도 아니었다. 해마다 버릇처럼 하는 일이었다. 어설프게 흙을 덮어놓은 얼갈이배추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을 본 게 3주 전쯤이었다. 배추는 이제 잎사귀를 한 뼘 정도는 더 내밀었을 것이었다. 아마 애벌레들이 꼬물거리며 연한 배춧잎에다 마음껏 길을 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동네 노인들이 이를 보면 또 혀를 차시겠다.
〈머릿속 스쳐가는 ‘시상’ 잡아채, 서너 줄이든 한두 단어든 ‘메모'〉
“쯧쯧, 약을 좀 해야지.”
손바닥만 한 땅에 약이고 자시고 할 것 없었다. 두어 번 풋것을 뜯어먹을 수 있으면 좋았고, 나중에 꽃대가 올라와서 꽃밭 삼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여겼다. 자주 들르게 되면 나무젓가락으로 애벌레들을 잡아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별안간 시 몇 줄이 머릿속으로 날아오셨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나는 책상 앞이 아니라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큰소리로 아내를 불러 종이와 펜을 갖다 달라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시가 되는지 <한겨레> 독자들께 낱낱이 보고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떠오른 생각의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메모는 어떤 형태로 남았는지 내 스스로 시작 과정을 한번 기록하고 싶었다. 그 날 아침에 쪽지 위에 적은 메모는 이런 것들이다.
“투기, 재테크/ 한 평 남짓 배추씨를 뿌렸다/ 한 평 남짓… 나비를 키웠다/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했다/ (나비의 생태-얼마나 날까?)/ 앉아라, 물러서라”
배춧잎을 갉아먹고 사는 애벌레를 잡지 않는다면 그 애벌레들은 틀림없이 나비가 될 것이었다. 나는 한 평 남짓한 땅에 배추를 키우지만, 애벌레는 배춧잎의 넓이만큼만 몸을 움직이며 먹이를 구하지만, 나중에 나비가 되면 애벌레는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하고 날아다닐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배추를 한 평 키우는 게 아니라 나비를 한 평 키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갈 수 있는 허공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나중에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키운 나비가 날아갈 그 허공은 모두 나의 것이기도 했다. 이런 욕심이나 호기는 얼마든지 부려도 좋지 않겠는가. 나비를 키움으로써 나는 경계도 말뚝도 박아 놓지 않은 그 허공을 차지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내 소유의 허공! 변기에 앉아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제목을 ‘투기’로 할 것인지, ‘재테크’로 할 것인지는 차차 결정하기로 했다.
나는 시시때때로 메모한 것을 반드시 컴퓨터 속에 있는 ‘신작시’라는 파일에다 옮겨둔다. 그 파일을 열어보면 메모의 길이는 대체로 서너 줄. 단어 한두 개로 된 것도 있다. 어제 아침에 옮겨둔 것도 있고, 조금 전에 떠오른 것을 적어둔 것도 있다. 7∼8년 전에 메모했으나 아직 시로 날개를 달지 못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수백 개의 그 메모가 옆에 없다면 나는 시인이 아니다. 그 몇 줄의 메모 때문에 여전히 시인이라고 어디 낯을 내며 나다닐 수도 있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알 같은 것이다.
〈곰삭아 익을 때까지 기다려라〉
〈‘줄탁동시’ 진통 … 가차없는 퇴고〉
시를 쓰게 되는 날(혹은 어쩔 수 없이 마감에 쫓겨 시를 써야 하는 날), 나는 우선 파일을 열어 메모를 일별한다. 아직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메모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메모도 있다. 컴퓨터 속 메모와 나와의 관계는 ‘줄탁동시’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시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줄탁’은 어느 한쪽의 힘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가 온전히 하나의 생명체로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만약에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 닭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를, 불가에서는 참다운 사제지간의 관계를 말할 때 곧잘 인용하곤 한다.)
6월 어느 일요일 변기 위에서 한 메모는 두어 달 컴퓨터가 품고 있었다. 박제천은 “작품을 써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달려들어 퇴고를 하는 일은 어리석다.(…) 작품을 써내고 난 뒤에는 일단 눈앞에서 치우는 일이 중요하다”(<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문학아카데미)고 했다. 즉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메모는 비교적 일찍 알을 깨고 나온 편에 속한다. 아래는 완성된 시이다.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두었다
한 평 남짓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
또 스무 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한 편의 시를 고치는 동안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쩨쩨하고 치사한 사내가 된다. 창피할 정도로 별의별 짓을 다 한다. < 나비도감>을 들추고, 포털사이트에서 얼갈이배추에 대해 알아본다. 행을 한 번 바꾸는 데 열 번 정도는 이리저리 붙였다가 뗐다가 해본다. 중간 부분 이후에 ‘─것’이라는 어조는 스무 번 정도 썼다가 지웠다가 가까스로 택한 것이다. 왠지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제목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투기>보다는 <재테크>가 시의적절해 보였다. 재테크에 목숨을 거는 이들에게 나의 재테크 방법을 자랑하고 싶은 심사도 작용했을 것이다. 수십 차례 고친 뒤에 옆방에 계신 정양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은 중간 행 하나를 지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있으나마나 한 행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어디 숨고 싶었다. 두 말 없이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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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휴전선 / 박봉우
휴 전 선
박 봉 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상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박봉우 시집 < 휴전선 > 중에서
박봉우 연보
1934년 7월14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에서 박병모와 김효정의 3남2녀 중 막내로 출생.
(본관 : 함양, 아호 : 추봉령 秋鳳嶺).
1941 (7세) 광주 서석공립국민학교 입학.
1948(14세) 광주서공립중학교 입학. 문예반에 들어가 시동인 ‘진달래’를 결성.
1951(17세) 광주고등학교 입학. 재학 시 강태열, 윤삼하, 주명영 등과 문예반 활동, 4인시집 <상록집> 간행.
1952(18세) 주간지 <문학예술>에 <石像의 노래> 당선. 전남일보 주최 제1회 학생문예 경작대회 입상.
전남일보주최 제1회 신춘문예에 박성룡, 정현웅 등과 함께 당선.
1953(19세) 서울 희망사 주최 제1회 전국 남고생 문예현상릴레이에서 당선.
서울 수험사 주최 전국 고등학교 문예현상대회에서 윤삼하, 지명수 등과 입상.
전남일보 주최 제2회 학생문예경작대회서 또 다시 당선.
1954(20세) 광주고등학교 졸업 후 전남대 문리대 정치학과 입학.
학과공부에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대부분의 학점이 D 또는 F학점.
그런 관계로 2학년 1학기 때(1955) 휴학했으나 1956년 6월14일 제적처리.
1955(22세) 강태열, 김정옥, 박성룡, 이일, 정현웅, 등과 함께 시동인 ‘영도’를 결성.
‘영도’ 동인지 1집, 2집에 참여하다.
1956(23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
이후 약 2년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전신) 서울주재기자로 재직.
1957(24세) 첫시집 <휴전선>간행.
1958(25세) 전라남도문화상 수상.
1959(26세) 제2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간행.
1962(29세) 제3시집 <四月의 火曜日> 간행. 현대문학상 수상.
1965(32세) 김현승 시인의 주례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이정례씨와 결혼.
1966(33세) 동인지 ‘영도’ 제3집에 참여. ‘영도’ 동인으로 이성부, 임보, 손광은 등이 가세.
동인지 ‘영도’ 4집에 참여. 르포집 <肝이 큰 女人들> 간행.
1969(36세) 김소월 등 작고시인들의 생애와 문학을 다룬 산문집 <사랑의 詩人像> 간행.
1974(41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회원으로 참여.
1975(42세)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시 <서울 下野式> 등을 발표한 이후, 전주에 정착.
당시 전주시장(고교 동창)의 주선으로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근무.
1976(43세) 제4시집 <荒地의 풀잎> 간행.
1985(52세) 제5시집 <서울 下野式> 간행. 현산문학상 수상. 이 해 겨울 부인과 사별하다.
1986(53세) 기존의 산문집 <사랑의 詩人像>를 <詩人의 사랑>으로 제목을 바꿔 재발간.
1987(54세) 제6시집 <딸의 손을 잡고>를 간행.
1990(57세) 3월1일,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별세. 유족은 1남 2녀.
‘민족시인 박봉우 선생葬’으로 전주시립효자공원묘지에 안장.
1991년 시선집 <나비와 철조망> 간행.
1993년 6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박봉우시비 건립추진 위원회’ 발족.
1994년 12월, 광주사직공원에 그의 시 <조선의 창호지>를 수록한 시비 건립.
1996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박봉우시비 휴전선 건립추진위원회’를
‘통일동산 시비건립추진위원회’로 확대개편.
2001년 <휴전선> 발표 45주년을 기념하여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그의 시 <휴전선>을 새긴 시비 건립.
2006년 <박봉우 시전집>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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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화초들의 이야기 / 박봉우
화초들의 이야기
박 봉 우
언제고 간에 우리들이 늘 의논하는 혁명을 위하여선, 잡풀들이여 이젠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밤에 흐르는 수없이 많은 저 별들은 우리들의 가슴에 심어 볼 꽃밭이라면 어쩔까.
하나의 조그만한 화병이 우리들의 마음에 있다고 믿을 때, 몇 포기의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어라 하지 안 해도 절로 죽어가는 것들 앞에.
참으로 맑은 아침을, 우리만이 살 수 있는 옥토沃土를 얼마나 바랐던가 이런 날은 내란內亂이란, 전설같이 먼먼 흰 구름이 아니었을까.
언제고 간에 우리들이 늘 의논하는 혁명을 위하여선, 이젠 잡풀들이여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박봉우 시집 < 휴전선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