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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동양일보 수필 당선작
지저깨비 / 조현태
웅장한 조각품 앞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간단하게 구경만 하기는 너무 미안한 작품들이었다. 책 속에서 흑백사진으로 보던 얼굴을 화강석 조각품으로 마주하니 더 그러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 중에 훌륭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은 국내외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얼굴전시장이었다. 그토록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남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다듬었으며, 추잡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버렸을까 싶었다.
내게는 석수장이 친구가 있다. 그 엄청난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친구가 조각하던 현장에서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채석장에서 나온 원석이 작게는 몇 톤, 크게는 수백 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고 했다. 원석에다 쪼개고 싶은 부분에 먹줄을 놓고 정으로 작은 홈을 여러 군데 팠다. 그 홈에다 ‘야’라고 이름하는 쇳조각을 하나씩 끼워놓고 큰 해머로 차례차례 번갈아가면서 두들겼다. 신기하게도 집채만큼 큰 돌이 맥없이 쩍 갈라졌다.
조각품을 다듬기에 알맞은 크기로 쪼개졌을 때 모서리와 면을 뜯어내고, 파내고 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더 세밀하게 다듬고, 갈고, 광택도 내고 해서 거의 실물에 가까운 형상을 갖추어갔다.
석수장이가 돌로 조각하는 과정을 보면 쪼개고, 뜯어내고, 파내고, 갈고, 광내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바꿔 말하면 어떤 형태로든 뜯겨 나가기만 했지 덧대거나 붙이는 일은 없었다. 정과 망치로 모양을 잡아가는 작업은 대단히 많은 날 동안 계속되었다. 서두르지도 않았고, 실수하여 재 작업하는 경우도 없었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쪼아내고 갈아야 할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행하는 것이 곧 조각하는 과정이었다.
완성된 조각 작품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 부스러기와 가루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이 모든 부스러기들을 일본식 명칭으로 ‘곱바’라고 했다.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들었으나 이제 다시 생각난 이 외래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었다. 비슷한 의미의 우리말을 찾아냈다. 지저깨비. 그것은 조각품을 이루는데 전혀 쓸모없는 부분을 뜯어내 놓은 허섭스레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네 인생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올바른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 삶을 결정지을 분야가 설정되기에는 거대한 꿈으로 획을 긋고 그 선을 따라 생의 갈래를 정할 것이다. 획에서 빗나가지 않게 열과 성을 다하여 꿈의 테두리를 만들고 미리 그려둔 투시도에 맞춰 열심히 인생을 조각할 것이다. 생채기가 나고 헐어진 자국에 크나큰 충격도 받아가며 한사람의 바탕이 마련될 것이다.
삶을 다듬기 위하여 쪼아내고 갈아야 할 인생조각 작업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쓸모없는 부분을 뜯어내고 후벼 파는 일이다. 게다가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 위해서 갈고 닦는 훈련은 물론이요, 필요에 따라서 반짝반짝 광택도 내야 한다. 방망이에 맞은 충격이 큰 공을 홈런볼이라 했던가. 이 모든 과정들은 결코 아픔이 없이는 불가능하리라.
나도 아파하며 몹쓸 것을 떼어낸 경험이 있다. 언젠가 나를 찾아온 손님에게 불쑥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농기계를 가지고 와서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농기계 수리점에 와서 농기계를 고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왜 할까 싶었다. 나는 슬며시 화가 났다. 하찮은 기술로 수리하다 망가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투로 들렸던 것이다. 더 세밀히 말하자면 경운기 같은 소형 기계나 고치는 실력으로는 대형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기계를 재대로 정비하지 못하리라는 의구심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렇게 기술이 못미더우면 시내 믿을 만한 전문 정비업체로 갈 일이지 여긴 무어하러 왔느냐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손님에게 과민반응을 보이며 대드는 태도는 영업에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니 당장 고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솔직히 고칠 수 있느냐는 질문도 할 수 있고, 내 기술을 믿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뭐 그리 대단한 기술이라고 목을 곧추세웠는가.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다. 또 앞으로 이런 태도는 보이지 않겠노라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화가 났을 때 아팠고, 부끄러우면서 아팠고, 빌면서 또 아팠다. 아파서 버리지 못했다면 조각되지 않은 생에서 오점으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내가 지니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알량한 자존심을 떨쳐버리도록 손님이 나의 지저깨비에 정을 들이대고 과감한 망치질을 했는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쓸모없는 부분일지라도 스스로는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쁜 것은 자신에게 붙어 있지만 좋지 않은 것인 줄 모르는 점도 조각품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누군가가 판단하여 흉한 점이나 못된 습관을 지적하고 버리기를 강요하면 상처받아 아파하고 속상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허접한 모습을 버리지 않고서는 좋은 삶으로 평가받지 못할 것이다.
나쁜 것을 얼마나 깨끗하게 버렸느냐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얼마나 남았느냐와 같다.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에 있는 그 많은 인물도 지저깨비를 다 떨쳐버리지 않았는가. 작은 흠집까지도 찾아내어 빠짐없이 버리고 다듬어 올바른 면모를 갖춘 조각품들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노려보고 있다. 지저깨비를 잔뜩 붙이고 있는 나를 향해 훌륭한 인물들이 무엇을 버렸는지 깨우쳐 보라는 눈짓이었다.
제16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필 심사평
- 삶의 무게를 느끼는 작품들이 많아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156편의 수필 응모작품들이 대체로 높은 수준이었다. 경박하여 가는 이 세태에 그래도 이런 삶의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는 수필에 천착하는 이들이 많이 있음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간이역(대구·임만빈)’은 작품으로서 짜임새가 있고 수필의 품격도 갖추고 있어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싶었는데 그만 알고 보니 이미 수필집도 두 권이나 발간한 신경외과 의사 수필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이 인기가 있어선지 전에도 대구에서 수필강좌를 열고 있는 기성 수필가가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었으나 신인을 발굴한다는 신인상의 뜻에 걸맞지 않아 당선작에서 제외시킨 적이 있어 이번에도 부득불 뺐다.
‘소금(남원·이순종)’은 저자가 중수필이라고 강조하듯 재미를 주는 경수필과는 다른 중후한 멋을 풍기며 소금에 대한 식견과 철학을 펼친다. ‘소금은 바다의 사리다’, ‘우리 민족이 소금의 문화라면 서양은 설탕의 문화다’라며 나름의 견해를 피력한다. 함께 보낸 ‘씨검사’, ‘비병’도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글로 글솜씨가 돋보였다.
‘풀무질과 담금질(청주·이창옥)’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에서 소재를 잘 소화하여 작품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부상과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는 인생살이에서 슬기로움을 발휘하며 사는 재미를 느끼게한다. 대장간의 풀무질과 담금질을 인생사 시련과 결부시킨 점이 좋았다. 흠이라면 직설적이고 세련되지 않은 문장이 거슬리긴 하나 건강한 삶의 자세가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지저깨비(경주·조현태)’는 돌 조각작품을 보고 군더더기를 깎아내리며 작품을 만드는 것과 인생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을 잘 대비하고 있다. 아픔을 견디고 잘못을 깨우치고 나쁜 점을 고치며 자신을 추스르며 훌륭한 인생을 지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삶을 다듬기 위하여 쪼아내고 갈아야 할 인생조각 작업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쓸모없는 부분을 뜯어내고 후벼 파는 일’이라며.
위 세 작품 중 진지한 삶에 깊은 생각을 기울이며 건전한 삶에다 글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지저깨비’에 있다고 보아 당선작으로 민다.
‘바람이고 싶어라’는 너무 유려한 문장에만 치중하여 알맹이가 좀 부족하고, ‘가마솥’도 좀 더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빛이 난다는 점에 유의했으면 한다.
■ 2010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못/ 배단영 (경주수필 회장)
못을 뺀다. 낡은 벽장을 수리하기 위해 못 머리에 장도리를 끼우고 낑낑거리며 못을 뽑았다. 못은 야무진 벽을 뚫고 들어가 긴 세월 동안 제 역할을 다했다. 제 크기의 수십 배, 수백 배도 더 되는 무게를 견디느라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무엇을 얹거나 걸면 못은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억지로 끌려나온 못이 허리 굽은 아버지를 닮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는 해가 뉘엿할 때 들판으로 논물을 보러가셨다. 아침저녁으로 들판을 돌보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벼들의 성장이 푸짐하게 차려진 잔칫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버지의 다리가 허방을 짚는듯하더니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좁은 논둑은 아버지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흙을 밀어내며 내려앉았고 그 바람에 논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넘어진 아버지가 쉬 일어나질 못하자 동네 친척이 업고 나왔을 때는 사위가 제법 어두워져있었다. 동네 의원으로 모시고 가야한다는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서도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하룻밤 자고 나면 될 것을 무에 번거롭게……”
흙탕물에 젖은 옷은 아버지의 몸에 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았고 머리 밑까지 머드팩을 한 듯이 구석구석이 흙덩어리가 끼여 말끔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픔을 억지로 견디려고 입을 꼭 다물었지만 신음소리는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빨리 약방에 가서 진통제와 파스를 사오라고 대문 밖으로 나를 내몰았다.
어둠은 앞산에서 시작해서 마을전체를 상보처럼 덮고 있었다. 개구리소리는 그날따라 더욱 청승맞게 들렸다. 달이 없는 하늘에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멀리서 마주보며 그리움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약과 파스의 효력을 못 본 아버지를 설득해서 진찰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사고로 허리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겨우 통증을 참아냈다. 다친 부위의 검사와 치료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자 아버지는 괜찮으니 주사나 한 대 달라며 말꼬리를 자르셨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자신의 병이 가족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못내 껄끄러우신지 우리를 외면하고 돌아앉아계셨다.
아버지는 부러진 뼈를 치료하기위해 못을 박아 두 개의 뼈를 고정해 하나처럼 움직이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두 개는 그만한 기능을 위해서 필요한 숫자였지만 어느 날부터 하나로 살아야한다는 특명이 내려진 것처럼 항명이 불가능해졌다.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병원에는 아버지와 비슷한 병으로 입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단한 못이라고 생각했던 몸이 나이든 사람들을 배신하는 듯이 보였다. 노년의 서글픔마저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자라는 곡식들이 걱정된다며 몇 번인가 집으로 가자고 입원 중에도 고집을 부리셨다. 병원에서 제시한 퇴원날짜보다 앞당겨 나오셨지만 돌아오신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기 이전처럼 많은 일을 하실 수가 없었다. 어이없이 발생한 사고에 비해 치유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허리뼈가 거의 완치상태라고 생각했는데 꼬리뼈가 다시 말썽을 일으켰다. 휘어진 척추와 금이 간 뼈 그리고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들은 노년의 아버지를 자유로움에서 멀어지게 했다. 신체적인 고통은 너그럽고 이해심 많던 아버지를 사막처럼 건조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작고 사고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사람이 변하면 오래 못산다며 뒤에서 말들이 많았다. 나는 못들은 척 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신 아버지는 땅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논 중에서도 가장 작고 볼품없는 논에 대한 개간계획을 갖고 계셨다. 가족들이 무리한 일이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 논은 구릉과 구릉사이에 끼여 정사각형도 직사각형도 아닌 삐뚜름하게 생겨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다. 양 옆으로는 작은 개울과 구릉이 자리를 잡고 있어 논은 더욱 작아보였다.
아버지는 논을 반듯하게 만들겠노라 선언하시고는 밤낮없이 논에서 살다시피 했다. 거친 자갈밭과 바위들이 아버지의 손길을 거부했다. 굵은 칡뿌리는 잘라내어도 뿌리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땅과 한판 승부를 낼 듯이 곡괭이로 땅을 뒤지고 돌을 주워 버렸다. 바로 옆 개울가는 아버지가 버린 돌들로 흙탕물이 되기 예사였다.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향기조차 아버지의 땀 냄새를 덮을 수는 없었다.
논은 조금씩 넓어졌다. 구릉에는 잡초와 잔 나무들이 사라진 거친 자리를 대신해 모내기한 모들이 푸르게 자리 잡곤 했다. 모내기를 하던 첫 해에는 땅이 거칠어 일을 하던 아낙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수확량은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추위를 이겨내고 거둔 성과는 논이 조금씩 커져가는 만큼 나타났다.
무리한 개간은 오남매의 뒷바라지는 가능하게 했지만 아버지의 몸은 휘어지고 내려앉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가득 짊어진 못이었다.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뼈가 옆으로 휘어지는 통증에 고통스런 시간도 보냈으리라.
그나마 허리뼈를 못으로 고정해서 일상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에게 이 막의 인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서 살아온 인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 볼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좋은 것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흙에서만 살던 아버지가 농사를 접고 여가를 보내는 것이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흙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들이 아버지본인의 삶 자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기에.
필요한 것을 걸기위해서 다시 못을 박는다.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이 액자에 담겨져 한 두 개씩 늘어난다. 큰애의 백일사진이 돌 사진으로 바뀌고 둘째가 언니와 함께 찡긋 윙크하며 찍은 사진이 덧붙여진다. 단단한 못에 의지해 가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곳에는 겸연쩍게 물러나계신 아버지, 가족에게는 늘 힘이 되어주었다. 아이들이 든든한 못을 배경으로 세상에 한 발자국을 내디딜 힘을 얻는다.
자신의 책임을 무던히 견뎌주던 아버지는 내게 늘 휘어진 못으로 오래토록 기억에 남아있다.
■ 2010 제주 영주신문 신춘문예 수필당선작
돌쩌귀 / 이윤경
친정집 위채에는 양쪽으로 여는 여닫이문이 달려있다. 격자무늬 나뭇살 위에 한지가 착 감겨있다. 나는 그 문을 좋아했다.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동그란 문고리도 정겹다. 그 문고리에는 오랜 세월 동안 잡고 당겼을 가족들의 손자국이 얼마나 많이 묻어있을까? 어머니가 늦은 밤이면 문고리를 안으로 걸고 구멍 속에다 숟가락을 꽂아 두고 뚫려진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는 했었다. 구멍으로 들려오는 작은 바람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던 유년의 기억이 그 문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문고리를 잡고 당겨보았다. 문이 뻑뻑하니 쉽게 열려지지 않았다. 힘을 주어 억지로 잡아 당겼다. 문은 괴로운 듯 끼익 소리를 내며 조금씩 열렸다.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어디가 문제인지를 살폈다. 내 예리한 눈에 그것이 걸려들었다.
돌쩌귀, 돌쩌귀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대뜸 큰오빠에게 전화부터 했다.
“오빠, 윗방에 문이 잘 안 열려요. 돌쩌귀가 뻑뻑해서 그런 것 같아요.”
큰오빠는 쉬는 날 한 번 다녀가겠다고 했다. 전화를 해 놓고 보니 하루하루 벌어서 사는 큰 오빠의 시간을 빼앗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큰오빠는 시골집의 일이나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이면 열일을 제쳐 놓고 달려왔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도 빗물에 담벼락이 내려앉았을 때도, 어머니가 몸이 아프실 때도 큰오빠는 어머니 곁에 와 있었다.
삐걱거리는 돌쩌귀를 살피다 큰오빠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돌쩌귀는 문틀과 문을 이어주고 고정시키는 장치다. 요즘 만들어진 문에는 경첩을 주로 쓰지만 오래된 한옥 문에서는 투박하게 생긴 돌쩌귀를 흔히 볼 수 있다. 암 돌쩌귀는 문틀에 단단히 박혀서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고 수 돌쩌귀는 문 쪽으로 박혀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침을 암 돌쩌귀에 걸고 문을 여닫을 때 마다 빙그르 돌아간다. 눈에 잘 뜨이지는 않는 구석진 곳에서 육중한 나무문을 짊어진 돌쩌귀는 문의 움직임에 따라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다.
큰오빠의 자리는 문틀과 문짝 사이,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틈새 같은 곳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맏아들인 큰오빠에게는 무거운 등짐이었을 것이다. 젊은 혈기로 큰오빠는 그 무거운 짐을 던져버리고 집을 나갔다. 낯선 주소로 몇 달에 한 번씩 보내오는 짧은 편지로 오빠의 소재나마 알 수 있었다.
몇 년간의 길었던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큰오빠가 결혼을 했다. 야무지고 부지런한 새언니를 만나면서 그제야 집안으로 한 다리를 걸치게 되었다. 그때까지 큰오빠의 빈자리를 형부들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그 시절 귀하던 컬러텔레비전을 싣고 온 것도, 밀린 내 등록금을 내어준 것도 큰오빠가 아니라 형부들이었다. 멀리 떨어져 사는 큰 오빠는 명절이 아니면 얼굴 보기도 힘이 들었다. 자연히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여 왁자한 가운데 끼지 못 하고, 큰오빠는 서성거리며 집 언저리를 맴돌았다.
삐걱대는 문을 들여다보다가 아예 문짝을 빼내었다. 돌쩌귀의 틈새마다 벌건 녹이 앉았고 먼지가 달라붙어 매끄럽지 않아서였다. 먼지를 닦아내고 샌드페이퍼로 녹을 밀어냈다. 문을 빼내기는 쉬웠는데 끼우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겨우 암 돌쩌귀 속으로 수 돌쩌귀를 이를 잘 맞춰 끼우자 덜컥하고 문이 제자리를 찾았다. 훨씬 매끄럽게 움직였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시 큰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내가 문 고쳤어요.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전화선을 타고 오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도 할 줄 아나? 그래 고맙다.”
나는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큰오빠에게는 존댓말을 했다. 열일곱 살의 나이 차이 때문인지 늘 어려웠다. 형부들이 등에 업히기도 하고, 팔을 베고 장난도 쳤지만 큰 오빠와는 그리 살가운 기억이 없었다. 늘 한 걸음 가족들의 뒤에 물러나 있던 큰 오빠가 십여 년 전 가까운 도시로 내려온 후 부터는 부쩍 집에 자주 다녀갔다.
큰 오빠가 다녀간 뒤면 집 주변이 말개져 있었다. 낫을 들고 집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어내고, 오래 된 전선을 새것으로 갈고 낡은 평상을 튼튼하게 고쳐두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제삿장도, 어머니의 생일상도 큰 오빠가 준비했다. 그렇게 큰 오빠는 조금씩 가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일이 터졌다. 도시 사람들이 동네의 집들을 사러 다녔다. 우리 집은 낡고 허술하긴 해도 집과 맞붙은 뒷산과, 동네가 훤히 보이는 전망 때문에 많은 값을 쳐준다고 했다. 가족회의가 열렸다. 다른 형제들은 집을 팔고 그 돈으로 읍내에 깨끗한 집을 사서 어머니가 그리로 이사하기를 원했다.
어머니와 큰 오빠가 끝까지 반대했다. 언니들은 큰 오빠가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생각했다. 집의 명의도 언제 큰오빠 앞으로 해두었다. 어머니를 뺀 모든 가족들은 큰 오빠가 집에 욕심을 내는 거라고 오해를 하기 시작했고 회복되어 가던 관계가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힘든 사람이 어머니였다. 형제들이 손바닥만한 집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 하는 것이 속이 상하셨던지 덜컥 병이 났다. 입이 돌아가고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떨었다. 큰 오빠가 모시고 가서 검사를 했더니 중풍의 초기 증상이라고 했다. 놀란 우리는 무조건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모두가 떠난 병상에서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 큰오빠한테 너는 그라면 안 된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중학교 시절 나는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대도시의 큰 병원에서 한참동안 입원을 했었다. 그때 엄청나게 나왔던 병원비를 큰 오빠가 다 내었다고 했다.
“지가 그때 뭔 돈이 있었겠노. 전세금을 다 빼고 손바닥만 한 산동네 월세 방으로 옮겼지.” 나는 그 방을 기억한다. 서울 구경하겠다고 여름 방학 때 올라가서 며칠을 지냈던 작은 방, 서울에 이렇게 구질한데가 다 있냐며 속으로 투덜거렸던 그 방을 기억해냈다. 어린 막내 동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산동네 좁은 방으로 이사를 한 큰오빠의 새까만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가슴이 먹먹해왔다. 큰오빠와 새언니는 한 번도 내게 그 일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조차도 지금껏 모르고 있다.
돌쩌귀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생긴 모습처럼 투박하고 거칠었다.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마찰의 순간들을 견뎌냈기 때문일까 쇠붙이인데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마치 큰 오빠의 억센 손 같았다. 돌쩌귀 같은 큰오빠의 손에서 가끔씩 아버지가 언뜻 언뜻 비쳤다.
문을 닫고 동그란 문고리를 걸어두었다. 큰오빠가 다녀가고 나면 문이 더 매끄럽게 열려질 것이다.
첫댓글 임만빈 선생께선 오직 신인들의 등용문인 것을 미처 모르고 열고 들어갔을 것인데, 평론이 유감이네요. /수필 다들 잘 쓰네요.
좋은 수필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