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한 편)
바다 취조실
송경동(1967~ )
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달래듯 발밑에서 파도가 철썩인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밤에도 도는 라인이 있다고
사방에서 파도가 입을 열고 따져 묻는다
나는 이제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이 밤에도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벌떡 일어서 눈 밑까지 다가오는 파도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나는 이제 모두 잊고만 싶다고 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얼굴을 냅다 후려치는 파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자갈처럼 구르며 울고만 싶다
이십여 년 노동운동 한다고 쫓아다니다
무슨 꿈도 없이 찾아간 바닷가
파도의 밤샘 취조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창작과비평/2016.2./
**그의 시를 읽으면 내 미천한 귀에는 시가 아니라 함성이며 토악질이며 비탄이며 죽비 소리가 들린다. 그의 시는, 시의 아름다움, 시의 노련한 언어질, 시의 빛나는 희망, 내면의 결핍, 그런 나긋나긋한 구조로부터 한참 비켜나있다. ‘그’라고 어디 튕겨져 나간 고공의 크레인처럼 비켜난 비모국어적 아우라를 시의 표현법으로 쓰겠다며 만족해했을까. 아니 만족의 문제조차 이미 내팽개쳐버린 국외자,-‘난 한국인이 아니다’-가 시집의 제목이 될 정도였으니....
**그는 경찰서 유치장 취조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살아왔다. 무슨 일로 그랬느냐고 묻지 말자. 얼마나 많은 쓰잘 데 없는 질문들을 받았느냐고도 묻지 말자. 밤샘취조, 어이없는 취조, 턱없이 말하기 싫은 취조, 무조건적 취조, 밤에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밤에도 끌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왜? 언제? 어디서? 누구랑? 뭐라구??
그런 세월의 저편 이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어느 선일까? 시의 내용 안에 그는 그 엄혹한, 노골적인 부조리를 다 담아 말했을까? 그래서 지금은 세상의 안온한 어느 구석에서 잘 살고 있을까? 바다에만 가도 철썩이는 파도에게 취조 당했던 그 시간들은 평화와 평등과 자유 등등의 거름으로 씌어졌을까?
**우리에겐 분명 느껴지는 어떤 변화가 감지되고는 있지만, 그는 피부에 와 닿는 세상 어둠의 색깔들로부터 벗어나 나부끼는 빨랫줄 아래에서 흩날리는 벚꽃이나마 바라볼 수 있게는 되었을까?
나는 오늘도 조비골 사촌오빠네 오두막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숲길을 걷고,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봄의 흥취를 맛본 하루였는데....그들은, 그는, 고공에 매달린 고공클럽, 허공에 목숨을 던질 뻔했던 허공클럽을 만들어야했던 기막힌 세상으로부터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나 된 것일까? 시는 허허롭다만, 삶은 충만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샘뿔인문학연구소, 빗살문학아카데미 토론용 자료로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함께 가슴에 담았다. 그와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우리가 안일하고 안온하게 내 삶의 우울만을, 얄팍한 행복만을 바라봤을 때, 끊임없이 피 토하듯, 변화를 꿈꾸어온 육체파인 그들, 온몸으로 밀고나가 이 파도치는 구조적 모순에 저항해온 용기에 대하여,
그러나 아직도 깜깜한 민주라는, 자유라는 이루지 못한 연못 속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우리의 노래소리를 응시하며, 허공클럽 회원 고공클럽 회원 그 모두를 위하여, 잠시동안이라도 부끄러운 나태와 이기적인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참으로 왜소하게.... '촛불'을 들어 밖으로 나가 또한 함께 했던 그 햇살의 시간들을 긍정했다. 앞으로도 더 더 그러할 수 있기를....
빛의 물결과, 촛불의 상승 속으로, 무지개 너머에서 만나는 물의 불꽃인, 불꽃인 궁극의 빛을 씨뿌릴 수 있도록...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바슐라르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