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韓齋) 정규영(鄭奎榮)
樂民 장달수
하동군 금남면 대치(大峙)마을. ‘한재’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는 예부터 진양정씨 은열공파 후예들이 살아왔다. 입향조인 오봉(鰲峰) 정대수(鄭大壽)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이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곤양을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가도록 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오봉의 후손들이 지금도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앞으로는 탁 트인 남해 바다, 뒤로 우뚝 솟은 금오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부귀와 명성이 끊어지지 않을 마을로 느껴졌다. 마을 가운데 서서 남해 바다를 바라보니, 문득 옛날부터 많은 선비들이 남해 바다와 금산 유람을 할 때 반드시 한번 쯤 들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1877년 가을, 당시 영남학맥을 주도하고 있던 한주 이진상이 만성 박치복, 후산 허유 등 여러 선비들과 남해 금산을 유람하고 이 마을에 머물며 강론을 했다. 당시 한주 일행은 수은(睡隱) 원휘(元暉)의 집에서 강론을 했는데, 그는 행실로 일대 명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한주 일행의 강론 때 수은의 아들이 정성을 다해 어른들을 모셨으니, 그가 바로 한재(韓齋) 정규영(鄭奎榮)이다. 이때 한주 선생이 그의 자질을 칭찬하며 학문의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한재는 1860년 대치마을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모부인 하씨가 세상을 떠나자 형수의 품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부지런히 읽어 문리(文理)를 터득해 나가자 마을 어른들이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안다 칭찬을 하였으나, 부친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학문을 연마하도록 면려했다. 관례를 하는 날에 친척과 벗들이 모두 즐겁게 생각하는데 홀로 벽을 향해 우니 대개 모친 생각 때문이었다. 효성의 지극함을 엿볼 수 있다. 1879년에 장인을 따라 성재 허전을 서울에서 뵙고 경서와 예의에 대해 질정하고 한 달간 머물며 여러 동문들과 공부를 하다가 돌아왔다. 이때 한재를 성재 문하로 이끌었던 장인 죽와(竹下) 조용주(趙鏞周)는 대소헌의 후손으로 문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였다. 성재문하에서 한 달간 머물며 학문을 연마하고 돌아온 아들을 본 부친은 기뻐하며 “이번 너의 소득이 과거 급제보다 낫다”고 했다. 한재는 효성이 지극했다. 부친이 병이 나서 백약이 무효였다. 이때 한 의사가 사찰의 황금탕(黃金湯)이 특효라고 하자 곧 다솔사로 가서 날마다 한 그릇씩 마련해 4년 동안 부친을 봉양했다. 다솔사까지 거리가 30리다. 부친이 임종에 즈음하여 삼종형인 교재 정원항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효자입니다. 형님께서 전말을 기록하여 그의 아우인 해영에게 주십시오”라며 곧 세상을 떠났다. 이후 교재는 유언에 따라 후산 허유에게 ‘효행실록(孝行實錄)’이란 글을 부탁하였다. 후산은 ‘효행실록’에서 한재의 효행을 공자의 제자 민자건에게 비유했다. 민자건은 공자가 그의 효행을 칭찬할 만큼 드러난 효자였다.
1884년 상복을 벗고 서울로 올라가 성재선생에게 문안을 드리고 수개월을 머물렀다. 성재문하에 있을 때 학문과 행실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선공감감역의 벼슬을 제수했다. 벼슬을 받은 한재는 판서 민영익에게 글을 보내 완곡히 사양을 했다. 자신의 부덕함과 시대가 어지러운 점을 들어 사양한 것이다. 한재는 더 이상 서울에 있지 못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명성이 조정까지 알려지자 고을의 군수가 융숭한 대접을 하는 등 삶이 번거로워질 것을 예견하고 이듬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황매산 골짜기로 이주를 했다. 독서와 산수를 벗 삼아 생을 마치고자 해서였다. 벗이 오면 술을 대하고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을 보냈다. 이러한 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배(喪配)를 당하자 이듬해 팔계 정씨를 맞이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가을에 면우 곽종석을 비롯한 명유들이 방문하여 하루를 머물며 강론을 했으며, 함께 배를 타고 노량을 건너 남해 금산 등 절경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당시 면우가 그를 일러 ‘충담아원(충澹雅遠)’하다 했다. 즉 ‘성정이 맑고 깨끗해 아취가 뛰어나다’ 는 의미이다. 이듬해 거창으로 면우를 방문해 심학도설(心學圖說), 사단칠정론 등에 대해 질정을 했다. 1903년 봄에는 마을에 ‘우천정(愚泉亭)’을 짓고 독서를 하며 주위 산수를 즐겼다. 1907년에 조정에서 통정대부 비서감승(정3품)을 제수했다. 한재가 많은 공을 쌓아 조정에 이를 보고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재는 마을에 있는 오산재(鰲山齋)와 우천정에 서당을 열고 두산 강병주를 초빙해 마을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1909년 4월 고향 대치리에서 자신이 운영해 오던 서당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4년제 사립 현산(峴山)학교 (구. 김양분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6년 동안 교장직을 맡았다. 한재는 시대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자신은 뜻을 펴 보지 못했지만, 미래의 희망을 심기 위해 교육 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것이다. 늘그막에 우천정에 기거하며 눈물을 흘리며 비분강개하는 날들이 많았다.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면우에게 글을 보내 춘추대의를 밝히니, 면우가 그의 뜻을 살펴 파리장서에 서명을 권유해 파리장서 서명에 가담했다. 얼마 후 파리장서 일로 면우가 불행히 세상을 떠나자 한재 역시 애통해 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병을 앓아 1921년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재의 나라사랑 정신은 그의 아들 물헌(勿軒) 정재완에게 전해졌다. 물헌은 1919년 백산(白山)상가의 주식회사 전환 당시 주식 500주를 출자하여 백산상회 하동연락사무소를 운영하며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서 오랜 기간 문초를 겪었다. 또,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길은 육영사업에 있다며 전답(田畓)을 팔아서 민족학교 개교 등에 많은 자금을 내어 놓았다. 1923년 일신고등보통학교(현 진주 여자고등학교의 전신) 설립자 총회에서 자금을 출자하여 이사에 피선되며 학교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고, 동래일신여학교(현 부산동래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에도 많은 자금을 출자한 애국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