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소설 영역본으로의 초대, 오윤선, 지문당, 2008.
몇 해 전 한국의 소설가인 한강이 노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작품이 세계의 독자들과 만나려면 번역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밸상 수상과 관련한 보도에서 작가는 거듭 자신의 작품을 적절하게 번역한 번역가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었다. 한국어로 작성된 원작의 의도를 외국의 독자들이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했기 때문에, 수상의 공로 가운데 번역가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한국문학을 전공하거나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인이 아니라면, 한국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한국의 문학작품을 외국의 독자들이 더 많이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익숙한 번역가를 양성하는 일이 병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실상 한국의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은 이미 조선 후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의 ‘설화와 고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특히 선교사인 알렌은 1889년에 <흥부전>을 비롯한 고소설과 민담을 번역하여 미국과 영국에서책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저자는 먼저 한국 고소설이 영어로 번역된 시기를 헤아려,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의 시기는 바로 알렌에 의해 처음으로 고소설이 번역된 1889년부터 1950년대까지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의 개인적 관심에 따라 민담과 고소설 등이 번역되었는데, 대체로 낯선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50년부터 1979년까지를 두 번째 시기로 구분하면서, 앞선 시기와 달리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저자는 ‘한국 내에서 고소설 영역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고, 영역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를 마지막 시기로 구분하면서, 그 특징을 번역 작품의 ‘양도 많아졌지만 특히 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의 학자들과 번역가는 물론이고, 한국문화에 익숙한 외국인들이 고소설 번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특히 외국에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개설되면서 현대문학을 비롯한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어 번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을 토대로, 이 책에서는 다양한 고소설 작품들의 영어 번역본들을 소개하면서 그 서지적 사항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목차에 따르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고소설 작품은 <구운몽>과 <홍길동전>을 비롯하여 모두 14종에 이르고, 해당 작품들의 ‘번역 양상’에 대해 검토한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대상 작품들을 ‘국문문장체 소설‘과 ’판소리계 소설‘ 그리고 ’한문 소설‘과 ’궁정서사류‘ 등으로 구분하여 번역에 나타난 특징을 논하고 있다. 아울러 별도의 항목으로 ’고소설 영역본의 문제점과 의의‘를 짚어주면서, 특히 고전문학 작품에 드러난 전고와 관용구 등의 표현이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를 따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소설의 경우 현대의 한국인 독자들도 직접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만큼 만만치 않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마지막 항목에서 저자는 ‘고소설 영역의 과제와 방향’을 제시하면서 연구 결과를 마무리하고 있다. 고전문학 연구자로서 저자는 외국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영어 번역본이 더 많이 출간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을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학을 전공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작품은 외국어 번역보다 원전을 소개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문학을 전공하는 한국 한생이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접한다면, 과연 원작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로 외국문학의 번역은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을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번역 작품의 대상을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자와 다른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만을 제시하고자 한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