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성경에서 가장 긴 책인 시편은 거의가 기도문이면서 동시에 찬양입니다. 어떤 학자 역시 시편에서는 “과연 무엇이 기도이고 무엇이 찬양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곧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의 영혼을 쏟아 놓으며 하느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 또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찬양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찬양은 하느님을 칭찬해 드리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전 국민이 한 달 동안 축구 열기에 휩싸였던 것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선수들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고 고함을 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느님을 칭찬해 드리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칭찬이라고 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칭찬한다”는 표현 자체를 어색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찬양은 쉽게 말해 칭찬입니다.
“할렐루야”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야훼를 찬양하여라”는 의미인데, 이 말의 어근이 되는 ‘할랄’은 ‘아주 크게 자랑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학위나 재산, 외모 같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자랑해야 할 것은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시고 있는 위대한 일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정말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분이십니다. 찬양의 마음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할 때는 축구팬들이 자기들의 연고팀을 응원할 때 뿜어내는 열기와 신바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맥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너무나 습관적인 종교 언어인 ‘할렐루야’라든다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데, 얼굴과 목소리는 매너리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삶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감지하는 영적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이것을 아이가 선생님을 찬양하는 것에 비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좋은 선생님입니다” 하겠지만 이 선생님 밑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아이는 말하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슬플 때는 오셔서 직접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제가 속이 상해 있는 때는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사 주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제가 성적이 떨어질 때는 야단치지 않으시고, 부족한 과목의 공부를 늦게까지 따로 가르쳐주세요. 선생님은 최고에요!” 제3자들이 그냥 “좋은 선생님입니다”라고 하는 것과는 말하는 내용이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섬세함이 다르지 않은가? 이 아이는 관계를 통해서 선생님을 깊이 체험해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선생님을 칭찬하니까 벌써 그 언어가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찬양은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어 왔습니다. 삶의 고비 고비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하느님을 그렇게 깊이 알고, 체험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의 주제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시편 22,26 참조)
음악이 있기 전에 체험이 있어야 하고,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찬양이란 우리의 증언에 음악을 옷 입힌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찬양의 가사가 항상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음표와 박자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시편 전체가 찬양가였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그 삶에 모셨을 때, 그의 영혼은 강 같은 평화, 바다 같은 사랑, 샘솟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찬양은 변화 받은 영혼의 표현입니다.
찬양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히브리어는 “자말”인데, 이것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비파와 수금으로 하느님을 찬양한다고 했고, 또 다른 시편들에서는 북과 다른 타악기들이 등장합니다. 요즘은 전자 기타와 키보드와 드럼과 피아노 등의 다양한 첨단 악기들이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성가대가 음정이나 박자가 조금 틀리면 마치 큰 문제가 난 것처럼 이슈로 삼습니다. 대형 본당 성가대원들 중에는 성악을 전공한 신자가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솔로를 정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잘해도 일주일 내내 그 사람 노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찬양하는 이의 마음의 상태요 영혼의 컨텐츠입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깨끗하게 하시지 않으면 내 속에 있는 것들이 어찌 부끄러워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우리의 더러운 생각과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한 불로 태우시고 씻기셔야 합니다. 찬양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지만, 함부로 막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영은 늘 하느님께 접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로 찬양하기 전에 영으로 찬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게 되면, 우리 주위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저 서해안의 아름다운 석양을 보면서도, 엄청난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을 보면서도, 하얗게 부서지는 남극의 겨울 바다와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위 형제자매들의 변화하는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기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전하면서도, 일하면서도, 집에서 쉬면서도, 단순히 이 순간에 살아 숨 쉰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찬양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도 합니다.
힘 있는 찬양은 대개 고난의 불가마에서 만들어집니다. 우리 인생은 참으로 많은 어둠의 골짜기와 광야를 지나가야 합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많은 곤경과 불행을 겪게 하셨지만 저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땅속 깊은 물에서 저를 다시 끌어 올리셨습니다.”(시편 71,20)
그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뼈저린 체험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시키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오직 하느님께서만이 그 고난 속에서 그를 지켜주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지독한 시련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다윗이기에 가장 위대한 찬양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지독한 어둠을 겪은 사람만이 가장 찬란한 빛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불평불만만 일삼던 우리의 입술이 이제는 영광의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됩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찬양은 최고의 특권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열정과 사랑을 쏟아 고백하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이는 영혼이 살아 있는 자이며, 영혼이 살아 있는 자의 기도는 역사를 바꿀 것입니다.
기도가 답답하고 잘 안 되면 혼자서 조용히 좋은 찬양 노래를 틀어 놓고 잠잠히 들어보십시오. 피아노나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면 본인이 직접 찬양을 몇 곡 계속 불러 보아도 좋습니다. 그러면 막막한 영혼 속에 새로운 힘이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 찬양하는 이는 영혼이 살아 있는 자이며,
영혼이 살아 있는 자의 기도는 역사를 바꿀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