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어느 날 새벽, 이광순교수님의 새벽 기도회 설교 본문이 특이했다. 요한복음 7장의 마지막 절과 8장의 첫 절이었기 때문이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요 7:53-8:1) 졸린 눈으로 모인 채플에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강단을 가득 채웠다. 단아한 체구에서 나오는 그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구절도 목소리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니 내 영혼에 깊이 새겨진 것이 틀림없다. 어떤 놀라운 기적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산상수훈처럼 심오한 진리를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본문이었다. 하지만 그 울림은 너무도 커서 모든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가슴에 녹음하듯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을 죽이려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역을 마치신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도하시러..., 아버지를 만나시러..., 가셨습니다."
그분은 물으셨다. "주님의 종으로 훈련받고 사역하기 위해 모인 여러분, 우리의 자리가 어디여야 합니까?" 설교를 듣는 내내 독신으로 살아오신 분이 평생 거처로 삼으신 곳이 어딘지,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오셨는지를 보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그녀를 통해 물어오고 계셨다. "너희의 자리는 어디냐? 어디여야 하느냐?"
신학교에 들어오면서 가졌던 비장한 결심들이 그 말씀 앞에서 차분해졌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불렀던 찬송도, 틈만 나면 기도탑에 올라가 "나를 사용하소서", 외쳤던 기도도 내가 있을 곳, 내가 있어야 할 곳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았다. 사역의 현장에서나 사역이 끝난 후에나 아버지를 바라본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탈무드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에게 시험관이 물었다. "왜 이학교에 들어오려고 하죠?" 학생이 대답했다. "이 학교가 좋아서요." 그러자 시험관이 말했다. "만약 공부만 하려고 한다면 도서관으로 가는 편이 나을거요.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오." 그러면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학생에게 시험관은 대답했다. "학교에 가는 것은 위대한 인간 앞에 앉기 위해서요. 살아있는 본보기에서 모든 것을 배워야 하오. 학생은 위대한 랍비나 교사를 지켜봄으로써 배우는 것이지요."
우리가 매일 성경을 펼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앞에 앉아 그분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분을 만나기 위함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렇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무엇'이 아니라 그의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어떤 설명을 기대했다. 결국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진리에 대해 아는 것과 우리 삶 가운데 일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하신 주님은 매인 자들을 풀어 자유케 하는 그 진리이시다.
주님은 기도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미래에 주어질 어떤 축복이 아니라 지금 경험하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다. 모였던 사람들이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간 후 아버지에게로 아들이 나아간다. 그 자리를 우리에게 보이신다. 들의 백합화처럼 주님이 지정해 주신 자리, 그곳이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