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집으로 이사온 지 5년, 그동안 매일 앞집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었다. 평소의 말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놀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는 귀가 먹었다고 했다. 그분의 기침소리는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러다 숨이 넘어가시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불편한 마음을 넘어 안쓰러웠다.
어느 새벽, 산책길에 나선 그의 아내를 만나 내가 아는 한의사가 명의라며 소개해드렸다. 그녀는 남편의 천식은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며 이제는 적응이 돼 괜찮다며 일언지하에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그 태도가 너무 완강해서 더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며칠 전 일이다. 집에 있는 기침약을 전해주기 위해 그 집을 들렀는데 건너편에 사는 딸이 머리를 감다가 달려왔다. 내가 찾아온 사정을 듣더니 자기 아버지는 기관지가 아니라 알러지 때문이며, 오랫동안 살던 미국에 비해 이곳의 공기가 탁해서 더욱 심한 것 같다고 했다. 가족력이어서 삼촌도 같은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특히 심하다며, 여러 의사의 도움을 받았으나 좌절감만 깊었다고 했다. 간단히 줄이면 마음은 고마우나 도움은 필요 없으니 돌아가달라고 나를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전달하려던 약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의료봉사단이 다녀가면서 알러지 약도 주고 가자 다시 그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의사 선생님에게 의논드리니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분께 가져다드릴 약을 준비하면서 그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문제는 그 할아버지의 기침이 아니라 그의 아내와 딸의 방어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십년동안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며 치료나 회복에의 소망을 접었다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백약이 무효라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내가 어찌 흔들 수 있을까? 일단 일주일만이라도 복용을 해보았으면 하는데, 약을 받아줄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문제 해결의 길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 오랜 세월의 고통을 끝낼 수도 있는 열쇠를 건네주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다니.
아침에 쓰레기 수거차가 다녀갔다. 수거 요원은 기사를 포함해서 모두 10명이다. 의료봉사단이 남기고 간 회충약 70개, 면도기 10개, 연고 10개를 전달했다. 수거요원은 자기 의견을 내고 거절하는 대신에 연신 고마워했다. 앞집 할아버지의 아내와 딸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거요원들이 기쁘게 약을 받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잠언의 말씀이 떠올랐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7)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문제 자체의 크기가 아닐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문제 해결의 길을 주셔도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다. 친히 사람을 보내셔서 해결해주고자 하셔도 거절하거나, 오히려 설득해서 돌려보낼 수도 있다. 우리의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처럼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아버지시다. 문제는 그 도움을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가난한가, 일 것이다.
구하면 생수를 주시겠다는 예수님에게 수가성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요 4:11) 경험에서 체득한 체념이 너무 깊어서 나의 샘에서는 누구도 희망의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불신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주님도 하실 수 없을까?
직면한 문제의 버거움을 토로하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을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을 수 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너무커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적을 수도 있다. 체념이 믿음이 되지 않게 마음을 지키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자신의 판단을 주장하지 않을 정도로, 아니 못할 정도로 심령이 가난해진 자는 복이 있다. 자신을 사랑하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을 뚜렷이 보고 감사함으로 예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느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