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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정치적 상황은 국왕이 서로 다른 당파로 인한 권력 투쟁을 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따라서 영조는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 당파를 가리지 않겠다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하게 실시했으며,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 역시 그러한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실시되었던 탕평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1800) 이후 상황은 급변하여, 다수 정파인 노론이 정계를 장악하면서 몇몇 가문들에 의한 세도정치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수 정파인 남인들이 천주교와 연관되어 있어, 이를 빌미로 중앙 정치에서 대거 축출되는 결과가 빚어졌던 것이다.
남인으로 분류되는 이학규 역시 ‘외삼촌 이가환, 구촌 숙부 이승훈, 인척 정약용 형제 등과 함께’ 1801년에 벌어진 천주교 사건(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후에 경상도 김해로 옮긴 이후 장장 24년 동안 유배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에게 뚜렷한 혐의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지만,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이햑규 역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는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의 죽음을 머나먼 유배지에서 소식만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책조차 쉽게 구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는 다양한 산문을 남겨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그가 남긴 한문 기록들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가려 엮은 결과물이다.
그는 이용휴와 이가환을 비롯한 남인 계열의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당대의 ‘현실주의적 문학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유배지에서의 생활체험에 기초하여 김해 지역의 민간 풍속과 농촌 주민들의 생활상을 밀도 높게 형상화한 다수의 작품을 창작’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용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약용이 농민들의 참상을 한시로 남긴 <전간기사>를 참고하여, 농민들의 고통과 참상을 고발하는 <기경기사시>라는 연작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김해 지역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수용한 <금관기속시> 등의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1부는 가족과 지인들의 죽음에 대해 간절한 슬픔을 표하는 내용의 글들을 모아 ‘만남과 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묶어놓고 있다. 여기에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글들이 2부에 수록되어 있으며, 자신의 일상을 소개하는 내용의 글들이 3부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항목으로 제시되어 있다. 아울러 문인으로서 학문과 글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는 내용들은 ‘글쓰기의 의미’라는 4부에 배치되어 있다. 이학규는 24년 동안의 유배지에서 풀려 평생 처음 대하는 ‘낯선 며느리와 손자들’이 지키는 ‘초라한 집 한 채’에 도착했지만, 고향에서의 차가운 시선으로 인해 이후 충주와 김해 등을 오가며 쓸쓸한 삶을 영위하다가 66세(1835)의 나이로 충주 근처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통해서, 조선 후기 소외된 지식인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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