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플랫폼
요즈음 내 일상의 출구는 좁은 문이다. 그 문밖은 온통 소음천국이다. 그 문을 나서 어디론가 갈 때 나는 거의 지하철을 이용한다. 나에게 플랫폼은 아직 낭만이다. 거기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타고 가는 열차가 마지막 열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진다. 나는 그런 망상에 가까운 잡념이 나를 줄렛줄렛 따라다니는 무료함의 속삭임이라는 걸 안다. 그 무료함이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시간이 물화物化로 산화하여 사라진다.
나의 모든 감각의 촉수는 한 쪽 귀로 몰려가 미세한 한 가지 소리를 잡으려 든다. 열차가 달려오며 내는 소리다. 이윽고 가냘프디 가냘픈 마찰음 쇳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차라리 느껴온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찰나에 어둠속에 불빛이 떠올라 휜 한쪽 벽에 물든다. 열차의 진입방향을 응시하며 일 초 이초 시간을 헤아릴 때 안내방송이 울린다. 이어 암흑 속으로 전조등 불빛이 둥실 실리는가 싶더니 번쩍이며 빛이 달려온다. 난 몇 시 초간의 숫자게임을 즐긴 것이다.
승차를 마치고 출발하자 오늘의 황혼열차를 탔다는 사실이 다시 떠오른다. 그 열차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나의 시간 좇아간다. 촛불 심지가 타들어가듯 내게 남은 시간에서 조각난 시간이 떨어져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을 꺼내 쓰는 게 두렵고 사라지는 시간이 슬프다. 그 시간은 그냥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내 삶의 살점과도 같은 것이다. 그 시간의 주검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성화의 종착역인가.
나는 평생 수없이 플랫폼에 섰었다. 어느 때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어느 때는 전송을 하거나 마중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때는 싱숭생숭한 시간을 동무삼아 여수가 짙게 밴 기차역을 보러 갔다. 기적소리를 앞세우고 들어온 열차에서 내린 여객들이 우르르 출찰구를 빠져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급행열차가 질풍처럼 플랫폼을 통과할 때 침목들이 들썩이며 내는 땅울림이 전율처럼 다리를 파고드는 느낌이 좋았다. 그때 나의 시간은 아무런 고통의 바늘이 솟지 않은 철부지가 잡으러 다니는 카이로스, 호기好期의 나비들이었다.
어느 시인이 시간의 흐름을 말하며, 미래는 주저하며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며,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의 시간은 석화되었고 미래의 시간은 기다릴 뿐 소유여부가 불확실하다.
나는 그때 시간의 물화는 물론 그 성화에도 무관심했었다. 어리석은 착각이었지만 시간은 영원한 나의 시녀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몰입하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현재의 시간만이 소중했다. 비록 허영이 이카로스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추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의 우상이었다. 나의 수중에 있는 시간으로 설혹 모래성을 쌓더라도 현재의 성 안에다 완성하였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 시간의 모래성이 무너지고 과거로 사라지면서 그 공허한 그림자조차 볼 수 없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떠나간 시간의 행적을 들여다보았다. 그 무질서한 물화의 역사에 전율했는데 과연 나에게 시간의 성화가 가능할 것인지 강한 의구심이 엄습했다. 나는 너무 허전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위를 걸어가도 젖지 않는 만월滿月같이,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벗어나라.’ 김재준 님의 시를 읽었다.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 밭을 가꾸는 것이 지혜의 비결’이라 한 철학자의 말로 자위도 해보았다.
시간의 물화와 성화는 같은 맥리에 매어져 있다. 물화의 행적을 따라가면 성화의 플랫폼에 닿을 것이다. 자아가 매일 현재의 플랫폼으로 가서 카이로스 열차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잖아 성화를 위한 고해소가 마치 쉼터처럼 나타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수북이 쌓인 영혼의 눈물자국이며 희열의 온기가 남아있는 시간의 주검들이 보인다. 시간을 허비하였음을 후회하고 함부로 부렸음을 부끄러워한다. 특히 하느님과 불화했던 시간을 통회한다.
용서와 화해를 끝내고 성화의 플랫폼으로 나왔을 때 기쁘게도 나의 시간 열차는 전조등을 환하게 밝힌 채 마찰음 쇳소리를 힘차게 내며 알맞게 들어와 나를 태워 오늘의 종착역이자 내일을 향한 방향으로 떠난다. 나는 무사히 승차하였음에 감사한다. 나의 카이로스 플랫폼은 아직 광명으로 밝고 여전하게 따듯하다.
내일도 난 그 플랫폼에서 나의 시간 열차를 타고 또 어디론가 시간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 아니 축복이 아닐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