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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과 안경 그리고 돋보기, 성경과 세계관 그리고 영적 맹인
요즘 돋보기를 새로 바꿨더니 이전보다 훨씬 뚜렷하게 잘 보여서 너무나 좋다. 몇 년 전에 맞춘 돋보기를 사용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몇 년 동안에 눈의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시력검사부터 다시 받았다. 그리고 눈의 상태에 맞춰서 돋보기를 바꾸게 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잘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주기적으로 눈에 눈물을 넣기도 하고, 안약을 바르기도 한다. 함께 사는 장모님은 아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안약을 넣어 드리고, 눈물을 넣어 드린다. 라오디게아교회에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예수님께서는 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그래서 “몸이 열 냥이면 눈이 아홉 냥”이라는 말이나 “몸이 100냥이면 눈은 90냥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컴퓨터와 TV, 스마트폰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력이 예전보다 매우 좋지 않으며, 그래서 안경을 쓰지 않는 학생이 없을 정도이고, 렌즈나 시력 교정 수술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눈의 상태가 이전과 다르니 늘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같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그리고 같은 것을 보아도 그 이해와 판단은 다른 것을 생각해 본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So from now on we regard no one from a worldly point of view. Though we once regarded Christ in this way, we do so no longer.)”(고후 5:16)고 말했다. 자기가 과거에는 ‘육신을 따라(from a worldly point of view)’ 사람들을 판단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육신을 따라 세상적 관점으로 판단했을 때에는 그를 믿는 신자들을 심히 핍박했지만,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는 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신이 이 세상 사람들의 표준을 따라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I beg you that when I come I may not have to be as bold as I expect to be toward some people who think that we live by the standards of this world.) (고후 10:2)
그런데 칼빈 선생은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경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명백하게 비취는 광채는 인간들로 하여금 배은 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동일한 죄책하에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게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신의 임재를 그들 하나하나에게 예외 없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리의 창조주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더 첨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모으고자 하셨던 자들을 이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신 후,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둘러싸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지식 안에 우리를 붙잡아 두시는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데 이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곧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노인이나 눈이 흐린 사람, 또는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거의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안경을 쓰면 똑똑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무언의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 외에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더 정확하고 보다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 (제1권 vi.1)
헤르만 바빙크도 비슷한 말을 한다.
성경에 요약된 전체 계시는 특별 계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스도는 낙원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 특별 계시의 중심점이며 내용이다. 이제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심지어 그것을 흡수하여 말하자면 동화시켰다. 기독교인도 그렇게 하며, 교의학자도 그렇게 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 특별 계시의 입장에 서고 또한 거기서 자연과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가운데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알게 된 그 동일한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한다.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이전에 발견할 수 있던 것보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훨씬 더 좋고 분명하게 본다. 육에 속한 인간은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온 우주를 샅샅이 뒤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안경으로 무장하여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하나님 안에서 만물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연 찬미시와 역사관을 성경에서 발견한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 고백으로 세상에서도 올바른 자리를 찾는다. 그는 거기서 결코 낯선 이방인이 아니며, 그곳에서 결코 다른 신(神)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르는 그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을 본다. 이 일반 계시를 통해 그는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자연 세계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 우리 모두는 하나의 특정한 실증적인 종교 가운데 태어난다. 오직 신앙의 눈만이 창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여기서도 적용되는 사실은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의학 I』, 박태현 옮김, 439-440.
이런 점에서 성경관이나 인생관, 세계관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데이빗 베빙턴이 쓴 『역사관의 유형들』에는 ‘순환론적 역사관’ ‘기독교 역사관’ ‘진보 사상’ ‘역사주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관’ 들이 소개되는데 이런 유형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가에 따르는 것이요, 좀 더 나아가면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이러한 차이들이 생겨난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으로’ 역사와 문명을 이해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으며, 『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를 비롯하여 『신앙의 눈으로 본 심리학』 『신앙의 눈으로 본 경영』 『신앙의 눈으로 본 문학』 『신앙의 눈으로 본 사회학』 『신앙의 눈으로 본 음악』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등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와 더불어 다양한 세계관 책들도 읽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적 관점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헤르만 바빙크의 『기독교의학』을 읽으려면 처음 부분에서 큰 어려움을 느낀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 수많은 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부분의 분량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또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보고 종교를 보며, 특히 성경과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소개하기 위하여 이런 방대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해석과 주장을 자세히 소개하다 보니 나같은 사람에게는 심히 어렵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성경에 대하여 비뚤어진 해석을 하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필요한 때에 그 계시를 영감된 저자들에게 기록하게 하시고, 사람들이 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에 조명해 주시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전통이나 경험 혹은 이성을 중시하면서 나름대로 여과한 해석을 하려고 한다. 이 ‘전통이나 경험 혹은 이성’이 하나의 안경이 되는 것이다. 색안경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빨간 색깔의 색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이고, 파란 색깔의 색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파랗게 보인다. 다른 설명을 생각해 보면 안경알에 흠집이 생기거나 때가 묻은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안경이나 돋보기를 살 때는 안경 케이스와 안경을 닦는 천을 준다. 가끔 안경알에 묻는 것들을 천으로 닦아주어야 하며, 안경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안경 케이스 안에 넣어서 보관해야 한다. ‘전통이나 경험 혹은 이성’이 진한 흠이 되어서 안경알의 대부분을 흐릿하게 한다면 아무리 안경을 쓴다고 해도 잘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학』의 앞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사상은 갖가지의 흠이나 때가 묻은 안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눈도 정상이고, 안경도 좋은 상태이지만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이다. 아무리 좋은 공연이나 전시를 하는 자리에서도 눈을 감고 있거나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육체적인 눈은 떴어도 영적인 눈은 먼 경우이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하시는 상황이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0-41) 그러면 이런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이끈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두려울까?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마 15:14)
다시 한번 라오디게아교회에 하신 말씀이 생각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자기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건만 눈 먼 것을 알지 못하는 슬픈 현실에서 주님의 권고하심을 받아들이고 하루빨리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한 시간만 눈에 안대를 착용해 보라. 눈으로 볼 수가 없다면 우리의 생활을 하기에 얼마나 어려움이 큰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눈 건강을 위한 한 마디를 하고 마친다. 최근에는 아스타잔틴과 루테인, 비타민A 등 눈 건강에 좋은 영양성분을 한데 모은 건강기능식품이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으므로 제품 성분과 기능성 등을 꼼꼼하게 따져 구입, 섭취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