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의 순정
그곳에는 사람이 누우면 갈대도 눕는다. 한낮의 따가운 태양 볕이 무섭지 않다.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다 다정한 얘기꽃도 피운다.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여자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고 남자는 조급해진다. 붉게 타는 석양도 청춘들의 마음을 읽었을까. 불타는 청춘의 열기를 묵인하듯 강너머 고개를 떨구고 모른 척 눈감고 누워버렸다.
땔감으로 재어둔 장작이 화목난로 안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멋으로 가져다 놓은 중고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타와 여러 현악기가 무대같이 확보해놓은 흙 땅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이름도 옛시인의 제목 따라 강나루다.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술집이자, 찻집이다. 광고한 적 없어도 연인들은 잘도 찾아간다. 그곳은 연인이 되기 전 구애 장소로도 적당한 장소였다. 대낮에도 을숙도 갈대밭에는 중간중간 움푹 파인 갈대가 눌린 자국이 있다. 데이트할 때도 은근히 생긴 불문율이 있다. 갈대가 파이고 누워 낮아진 곳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곳에는 반드시 한창 물오른 연인들이 누워 사랑하는 장소인 까닭이다.
을숙도 갈대밭에서 온갖 관심을 끌며 여자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남자는 어둑한 갈무리를 이용해 가진 재주를 총동원해 여자 환심을 사려 애쓴다. 거의 목적에 도달하여 갈 무렵이면 들려보는 곳이 그 강나루다. 강나루에는 정해진 주역이 없다. 누구나 한 번씩 흥이 오르거나 낭만에 취하거나 프러포즈를 하고 싶을 때 적극적으로 나가서 무대에 설 수 있다. 기타로 노래를 하기도하고 피아노 연주하기도 하고 다른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 다른 악기들이 실제로 연주 가능한 것인지 모양만 갖춰 놓은 것인지는 확인해본 적은 없다.
을숙도에선 아무리 얌전한 샌님 남자 대학초년생이라고 해도 갈대밭을 거닐다가 늦은 밤 깊어가는 흥취에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 속에 취한다면 마음이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상대가 마음에 든 여자였다면 통금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쉬워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그 날 저녁 통금시간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바랐을 것이다. 찻집에서 넋을 빼놓고 즐기도록 시간을 보내다 운이 좋게 통금시간이 다가오게 되면 남자는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 느직느직 버스를 태워 주려고 애를 쓰는듯한 행동을 한다. 최소한 그래야 여자에게 최대한 미운털은 박히지 않는다.
통금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가지 않으려면 아무리 얌전한 처녀도 여관 앞에선 문을 열고 얼른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문안을 들어서면 사정이 또 달라진다. 남자와 여자는 실랑이를 한참 동안 벌여야 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니 다투고 실랑이를 한참 동안 주고받게 된다. 남자는 지치지 않고 여자를 설득하려 애쓴다. ‘손끝도 안 건드릴게’ ‘손만 잡고 잘게’. 순진하고 경험 없는 처녀들은 대체로 이런 말에 대부분 넘어간다. 어차피 여관 복도에서 밤을 하얗게 셀 수는 없으니까. 그날 밤 크레믈린같은 성벽은 무너지고 역사는 생겨났다.
청보라 색으로 밑칠을 해놓고선 손도 대지 않은 채 놓아둔 캔버스가 아뜰리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덩그러니 버려진 채 내버려 두고 있었다. 버려진 채 이젤 위에 있는 그 캔버스의 주인이 궁금했던 건축가 청년은 편지를 보냈다. 글자의 모음마다 또박또박 점을 흘려 찍은 정성이 가득 들어 있는 독특한 필체였다. 때로는 촛불에 그슬려 멋을 낸 편지지로, 혹은 말뚝을 그려놓은 팻말 같은 그림편지지로. 시적인 은유로 문학적 화법으로 여자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다.
기회가 왔을 때 그도 여자와 함께 을숙도를 찾았다. 그리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쳐놓은 그물망에 눈치 빠르고 약삭빠른 여자는 걸려들지 않았다. 작전에 실패한 그는 그날 이후 몸져누워 버렸다. 그의 어머니가 여자 집을 찾았다. 죽어가는 아들 좀 살려 달라고 했다. 그 밤중의 아찔했던 사건을 알 리 없는 여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상사병이 난 청년이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며 자기 일처럼 설레했다. 여자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남자가 사우디 건축회사에 파견될 때까지만 만나주기로 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누나가 있긴 하지만 실어증에 걸려 말을 잘못하는 가련한 장녀였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술 좋아하는 한량인 아버지를 대신해 술집 작부를 하며 번 돈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누나 덕에 공부했던 건장해진 남동생들은 고마운 누나이긴 하나 창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동생이 장성했어도 여전히 남동생이 귀엽게 느껴진 누나가 남동생의 데이트에 관심을 가졌다. 남동생은 집에 전화하다가 수화기 건너에서 누나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얼른 전화를 끊어 버리곤 했다. 데이트 중인 애인에게 누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동생들의 눈빛을 읽은 누나는 약을 먹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실어증이란 후유증만 남게 되었다.
그런 누나에게 남자가 생겼다. 가난하고 조금 부족하긴 해도 진실한 남자였다. 상견례 날 누나의 남편감은 ‘갈대의 순정’을 불렀다고 했다. 노래 끝 소절에선 누나를 살포시 안더라고 하며 괜스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나의 행복보다는 가족의 행복이 평생 우선일 줄만 알았던 누나의 변심이라고 느꼈던 모양이었다. 누나가 떠나갈 줄은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누나가 있다는 것을 사귀기 시작한 첫사랑 여자에게 고백해야 했다. 가난이 싫다며 그 여자는 떠나 버렸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여자 마음은 모두 흔들리는 갈대라고 생각하며 대했다.
갈대는 억새를 닮았다. 그러나 억새와 갈대는 사뭇 다르다. 양옆으로 마구 흔들리는 의리 없는 억새를 갈대와 비교한다는 건 갈대에 대한 모독이다. 갈대는 흔들리더라도 의리있게 한 방향으로만 흔들린다. 그래서 갈대 바람은 부드럽고 다정한지 모른다. 잠시 스치다 날아가는 철새들을 품어주는 것도 을숙도 갈대 바람이다. 그 바람은 메마르지 않아서 좋다. 유난히 다정하고 운치 있게 느껴진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린다고 해서 뿌리까지 흔들리지는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운명이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살아가는 사정이 부대끼면 부대끼는 대로 그 자리에서 춤추듯 흔들려주는 것이 갈대의 순정이다. 그러나 거친 바람 속에서 마음만은 순정을 놓지 않는 것도 갈대다. 그것이 여자의 순정이든 사나이 깊은 진정이든.
흔들리는 갈대라고 비아냥거려도 좋다. 가슴속으로 몇만 번의 변심을 해놓고선 겉으로 아닌 척 가식을 세련되게 치장하고 사는 이들이 많은 세상이다. 한번 마음 준 사람이 힘들어졌을 때마저도 온몸과 온 마음을 바쳐 헌신해본 적이 있었던가. 자기 몸을 모두 태워낸 하얀 연탄재처럼.
세련되게 단장한 을숙도에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이 잦다. 을숙도 넓은 뜰에서 편안하게 유유자적 거닐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갈대가 흔들리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을 조금도 지니지 못하는 지금의 사랑법.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와 남자들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정. 애정의 의리는 어디 있을까.
광장에서 백발의 노인이 연을 날린다. 바람의 세기에 맞춰 실을 잡아당겼 다 놓았다 한다, 연이 바람을 타고 더 높이 올라갈 때마다 갈대도 바람 따라서 힘차게 흔들린다. 세상 어디에서든지 바람이 없는 마을은 없다. 마음속에 바람 한번 품어 본 적 없는 이가 있을까.
바람의 세기에 따라 흔들리고 있는 갈대의 섭리만큼도 지키지 못하는 순정이 사라진 가벼움을 곡하는 갈대의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갈대가 필 때면 남자는 누나가 생각난다고 했다. 여자는 그가 떠오를 때면 갈대 생각이 피어오른다고 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그 곳 갈대숲에는 철새들만 깃들어 낙동강 물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