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자화상 (외 1편)
정수경
얼룩진 눈물 따는 살구꽃의
오월, 분홍 스란치마 꿈꾸는 열다섯 시라네
저물도록 흐려지는 꽃무늬 지문
검지 꾹꾹 눌러 숨죽인 색 일으켜 소란을 찾아가네
뼛속 깊이 감추었던 예각銳角 불러내어
우물에 빠진 책갈피
짓밟힌 꽃들의 역사를 펼치고
고장 난 시계의 뜨거운 입김으로 세운
푸른 깃털의 파피루스
새벽에서 아침이라는 대사를 남기고 떠나면
고양이 눈동자 닮은 영감靈感이
통유리에 갇힌 밤을 저울질한다네
잊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미세한 몇 줄의 간주와
희미한 청춘의 뒤태를 닮은
푸른 대문 열어 줄 비밀번호, 예언자의 수첩에서 훔쳐도 좋겠지만
목덜미 가느다란 햇살 부여잡고
아직 덜 마른 벽화에 살이 오르면
당신은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빨간 벨벳 화사해라
슬픈 영화 같은 몸들이 다른 제목으로
다시 피어나면
머리카락에 밴 포탄의 비릿한 그림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네
붉은 눈동자를 읽는 동안
모래바람 속에는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날개의 힘줄이
아직 걸어보지 못한 심장이
팽팽하게, 붉은 눈동자로 문득 태어나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바람의 한계를 체험하는
짓무른 과육은 해산의 진통을 침묵으로 품고 있다
쉬 떨어진 잔해들은
떨어져 시들수록 더욱 붉어져, 어둠 속에서도
검은 감옥만은 피하고 싶어했다
펄럭이는 바람을 쪼개는
위태로운 지층은 생의 최고점을 찍을 줄 안다
남동풍은 쉬지 않고 안개를 몰고 올 것이다
한쪽으로 등 굽은 바람
보일 듯 말 듯 좁은 길을 지나가는 숨소리 경건하다
땅을 적시는 완성된 빗줄기 점점 가늘어진다
구름과 빗줄기 이어주는 무지개 너머
풀밭 위 내려앉은 충혈 된 눈물로
다시 심장을 뛰게 하고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거처의 추억을 견디기 위해
수그린 저 공손한 얼굴들,
오늘 밤은 누구도 깊은 잠을 청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