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불, 칼의 음식들
나는 식도락을 좋아한다.
어디 여행을 갈 때도 반드시 맛집을 검색해서 떠나고,
해외 여행을 가서도 현지 음식을 더 찾아서 먹지 한식을 찾지 않는다. 조선 음식은 육십년을 먹었기에 반드시 현지 음식을 물색해서 먹는다.
한번은 홍콩에서 마카오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마카오는 개발이 되지 않아서 빈민촌 같은 것이 볼 것이 별로 없었다. 이미 한번 다녀온 바라, 나는 홍콩에 남기로 했다.
나의 도락 습성을 아는 동료들 네명과 함께 남아서 나머지는 마카오로 떠나고 우리 일행은 홍콩의 맛집을 찾았다.
호텔에서 맛집을 안내를 받고 택시를 타고 그 집엘 가니
오전 열한시쯤 이었다.
아무튼 그 시간에 시작해서 세 시간 동안을 먹고 마시고 했는데, 끝까지 젓가락을 놓지 않은 이는 나 뿐이었다.
음식이 나올 때 마다 허겁 지겁 먹어치우던 축들은 겨우 한 시간을 넘기고는 하나 둘 나가 떨어지고, 나오는 음식을 그저 맛만 보는 시늉만 한 나는 끝까지 버티고 황제의 음식을 다 먹어봤다.
태백에 살 때는 차를 타고 20분쯤의 거리에 있는 석포의 중국집에 가곤했는데, 예를 들면 송이철에는 송이를 가지고 그 집에 가서 유삼슬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중국술과 함께 맛있게 먹곤 했다. 송이향과 중국술의 그 아름다운 조화!
끝에는 꼭 자장면 반 그릇을 시켜서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성씨가 취(翠)씨인 그 집 자장면은 이제 다시 먹을 수 없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한중 수교가 되자 중국 본토로 이주했기 때문인데, 동두천이나 송탄등 유명짜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어봐도 그 집 맛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다만 동해 북평의 덕취원 것은 그나마 먹을 만하다.
일식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일식의 특징은 깔끔해서 좋다.
오도리나 혼마구로 도로도 좋지만, 요즘은 우럭 시오야끼(소금구이)나 도미찜이 좋다. 우럭은 쫄깃한 육질이 소금간과 어우러져서 맛있고, 도미찜은 부드럽고 약간 달콤한 소쓰가 일품이다.
복요리는 또 어떤가?
일식 요리에서 복을 빼면 시체다.
회는 물에 불린 창호지 처럼 얇게 떠서 접시의 문양이 보이도록 진설해 놓아야 한다. 이걸 미나리와 함께 초간장에 찍어서 먹는다.
지리(맑은탕)는 복을 미나리, 무와 함께 심심하게 끓여서 지리쓰라고하는 고춧가루를 갠 소스에 찍어서 먹고 나중에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데, 이건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습성에 맞춰서 변형된 형태의 요리다.
복튀김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음식이다. 식감이 아주 부드러워서 노인들이나 아이들이 먹기에도 참 좋다.
역시 튀김 소스에 찍어서 먹는다.
복껍데기 요리는 또 별미다.
회를 뜨고 남은 복껍질을 살짝 데쳐서 썰고 거기에 미나리와 초간장으로 무친 것인데, 그 맛이 쫄깃하여 술안주에 좋다.
복요리의 마지막은 수놈 복어의 정소(精巢)를 구운 것인데, 그 껍질이 쫄깃하고 속은 부드럽고 고소하다.
다만 나처럼 복을 좋아하고 또 바닷가에 살아야 신선한 것을 구해서, 그것도 12월과 1월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도시 복집에서는 이것을 구득하기가 어렵고 이런 요리도 잘 모른다.
‘참’이라는 글짜가 들어가서 맛없는 것이 없지만, 참복 특히 민물 참복은 그 맛이 뛰어나나 그와 반대로 독성도 가장 높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테트로도톡신은 그 해독제가 없다.
복어를 중국에서는 물돼지(河豚하돈) 이라 부르는데, 식도락가로, 동파육(東坡肉)으로 잘 알려진 소동파(蘇東坡)는 복을 가리켜 사람이 죽더라도 한번은 먹어볼만한 음식이라 했다.
말린 복어는 찜을 해서 먹는데, 복이 나지 않는 철에 콩나물과 함께, 또는 댓닢이나 솔잎을깔고 쪄서 밥 반찬으로, 술안주로 참 좋다.
일본음식에 대한 글을 쓰다가 복요리가 다소 옆길로 갔다.
한국음식에 대하여는 구태어 쓰지 않으련다.
이 글의 본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고, 누구나 익히 알고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한중일 음식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위의 제목에 적은 물, 불, 칼이다.
중국음식은 불의 음식이다. 한번은 중국 심천의 딤섬집을 갔는데, 내부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을 정도로 큰 집이었다. 포자(抱子;만두) 종류도 백 여 가지는 되어 보였다.
그래서 호기심 삼아 십 여 가지를 골라서 시켰는데, 정말이지 5분도 되지 않아서 그 음식들이 다 들어와서 놀란 적이 있다.
큰 후라이팬을 흔들어가며 센불로 한꺼번에 요리해내는 기술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육즙이 셀 사이도 없이 단번에 요리하여 소스를 곁들이는 중국 음식은 세계적인 맛이다.
일식은 칼의 요리다.
칼을 유난히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풍습대로 일식 요리는 칼의 요리이다. 요리사는 크고 작은 칼을 한 셋트 씩 갖고 다니면서 요리를 한다. 칼값도 무지하게 비싸지만, 그 날을 숫돌에 잘 갈아서 예리하게 유지한다. 두부나 나물이나 써는 우리네 칼과는 차원이 다르다.
위의 복어회도 면도가 충분히 가능한 일본도가 아니고는 그런 요리를 할 수가 없다.
스시와 사시미로 대표되는 일식은 모두 칼의 요리이다.
거기에 비해서 한식은 물의 요리다.
국물이 있어야한다. 밥을 먹을 때도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하고, 사람을 사귐에도 국물이 있어야 넉넉히 보인다.
‘그 사람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어.’ 하면 관계가 아주
힘들어진다. 사람도 맛을 보고 싱거운 놈, 짠 놈 한다.
탕도 국물이 있어야 밥을 말아먹을 수 있고, 찜도 국물이 있어야 밥을 비벼 먹을 수 있다.
요즈음에 먹는 냉이국, 쑥국은 또 얼마나 맛이 있는가?
된장을 풀어 넣은 냉이국은 그 맛이 달고, 쑥국이나 도다리 쑥국은 봄맛의 압권이다.
남도에 가면 보리앳국을 제일로 치는데, 보리싹을 잘라와서 잘씻고 홍어애(간)를 된장에 버물려서 끓여내는 음식으로,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른다. 역시 이른 봄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숭어 무침으로도 탕을 끓이는데, 이런 음식을 다 열거하자면 한이 없어서 이만 줄여야겠다.
아무튼 한식은 물의 음식인 것이 틀림없다.
그럼 물, 불, 칼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좋을까?
당연히 물이다.
불은 물을 만나면 꺼지게 되고, 칼로는 물을 벨 수가 없다.
얼핏 약해 보이는 물의 위력은 내가 좋아하는 노자의 도덕경에 이렇게 쓰여있다.
이른 바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처 중인지소오 고기어도(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좋은 善은 물과 같은 것이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남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니 그것이 道가 아닌가?
물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며, 다른 물을 만나도 거부하지 않으며(和而不爭) 큰 장애물을 만나면 반드시 돌아서 가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면 제 몸을 나누어서(割水)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반드시 그것을 채우고야 앞으로 나아간다(盈科而進).
이 물의 지혜로움이야 말로 처세(處世)에 가장 훌륭한 요체(要體)인 것이다.
다 같이 물의 지혜로움을 배웁시다.
난 내일 남당항에 새조개 샤브샤브 먹으러 간다.
甲午 3월 29일
豊江
첫댓글 풍강님의 글에 감동입니다. 아무리 상을 잘 차려도 국물이 없으면 꽝입니다.
진즉에 푸른늑대님의 맛집 찾기는 몇 년 전, 강릉 방문했을 때 알아 보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미식가는 누구나 하는 게 아닙니다.
우선 남 다른 미각을 가져야 하고 맛집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글로 표현까지 하시는 진정 타고난 미식가이십니다.
늘 감사합니다. 선배님, 강릉한번 오세요. 돈하고 시간 밖에 없는 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