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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알아주는 것'이다(박한표)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2024년 8월 20일)
아침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를 기를 위해, 나는 낮에 온갖 사물과 세상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관찰과 발견이 주는 작은 보람으로 매일의 삶이 더욱 생생하고 창의적인 기쁨으로 물드는 것을 체험한다. 내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구나, 경험한다. 그런데 세상엔 이것저것 배워야 할 것들이 참 많기도 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뭘 알려고 하냐고 한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의 말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특징과 좋은 점을 발견하여 눈여겨보는 일 또한 일상의 삶을 충전하게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특히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나보려고 눈을 더 크게 뜬다. 그런 가운데, 한 단체 카톡에서 만난 글을 갈무리 하여 공유한다.
'주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알아주는 것'이다. 누군 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하다. '알아 달라고 하면' 관계가 멀어지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관계가 깊어진다. '알아 달라'고 하면 섭섭함을 느끼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더 넉넉함을 느낀다. 행복은 '알아 달라'는 삶에 없고, '알아주는 삶'에 있다. 우리가 산에 가면 가끔 한적한 곳에 혼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본다. 그 꽃은 보는 사람이 없고, 사람이 없어도 아름답게 향기를 날리며 피어 있다. 미모 경쟁도 하지 않고, 향기 경쟁도 하지 않고, 그냥 혼자 아름답게 산다. 삶의 목표는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일화를 소개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한 엄마에게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죽은 남편이 가해자로 몰려 그들은 맨몸으로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가까스로 살 곳을 마련하고 변변찮은 이불과 옷 몇 개로 셋이 함께 살았습니다. 엄마는 아침 6시에 집을 떠나 빌딩 청소를 하고 낮에는 학교 급식을 돕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살았고 집안일은 초등학교 3학년 맏이가 맡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냄비에 콩을 잔뜩 안쳐 놓고 집을 나서며 메모를 남겼습니다. '영호야, 냄비에 콩을 안쳐 놓았으니, 이것을 조려 저녁 반찬으로 해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 엄마 -' 그날 하루 종일 시달려 지친 엄마는 오늘은 꼭 죽겠다는 생각으로 수면제를 사 들고 돌아왔습니다. 두 아이는 이불을 덮고 나란히 잠이 들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엄마에게- 라고 쓰인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 엄마는 수면제를 버리고 맏이가 만든 콩자반을 눈물범벅이 된 채 먹었습니다. 이런 편지였습니다. '엄마! 오늘 엄마 말대로 콩이 물러졌을 때 간장을 부였는데 동생이 짜서 못 먹겠다고 투정해서 한대 때렸더니 울다가 잠들었어요. 열심히 콩을 삶았는데.......... 엄마! 용서해 주세요. 내일은 나가기 전에 저를 꼭 깨워 콩 삶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엄마! 피곤하지요? 꼭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엄마! 고생하시는 것 저희도 다 알아요, 엄마! 우리 먼저 잘게요.'
'주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알아주는 것'이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 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아름다움은 나와 떨어진 별도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보는 나의 눈에 있다. 19세기부터 아름다움이 천상에 이데아로 존재하지 않고, 내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그것이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운 대상이 되었다. 아름다움은 내가 확인할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 감금 시키지 않고, 아름다움을 나의 몸, 정신, 영혼으로 느낄 수 있는 실제로 들여왔다.
한 대상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사실 그 대상과 상관 없다.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달려 있다.
1. 내가 그 아름다움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는가?
2. 더 나아가 내 눈에 담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문법이 있는가?
3. 내가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포용할 수 있는가?
그러나 21세기에 우리는 감성계가 아니라 가상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가상세계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 허상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를 진실이라고 신봉한다. 내가 관찰하는 저 꽃만이 진짜인데, 핸드폰 속 은행잔고가 내 삶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관찰을 통한 감성을 점점 잃고 있다. IT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우리는 진-선-미를 확인하고 있다. 원래 감성은 순간적이며 가변적인 감상주의와 다르다. 감성은 시선과 청취의 깊이이며 넓이어야 한다.
내가 하루 안에 마주치는 일상을 숭고하게 심오하게 예민하게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일상은 언제나 참을성 있게 나의 음미(吟味)를 기다리는 선생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 감성을 제거하였다. TV 스크린, 핸드폰 화면 혹은 신문과 잡지가 위대한 자연을 대신하여 우리의 세계관을 장악하는 빅브라더가 되었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내가 마음 속에 축적한 아름다움이란 개념과 조우하여야 한다. 내가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고, 다만 나의 오감을 자극하여 쾌락을 주는 것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다면, 그 대상은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마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 대상이 내가 마음 속에 축적하여 숙성시키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안으로 들어오면, 그 대상은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시선의 높이가 서로 만날 때 쾌락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 때, 그 대상은 상호 작용을 통해, 나에게 일상의 쾌락과 기쁨을 주는 메모가 되고, 기억된다. 산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 안에서 나를 꽃피우는 과정이다.
늙은 꽃/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전설상의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虁)는 발이 100개나 있는 지네를 부러워한다. 그 지네는 발이 없는 뱀을 부러워한다. 뱀은 거추장스러운 발이 없어도 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뱀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을 부러워하였고, 바람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 눈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눈은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을 부러워했다. 그런 마음은 전설상의 동물인 기를 부러워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虁憐蚿, 蚿憐蛇, 蛇憐風, 風憐目, 目憐心, 心憐虁, 기연현(지네), 현연사(뱀), 사연목, 목연심, 심연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한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부러워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모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나'이다. 우리가 살면서 힘들어 하는 것은 부러움 때문일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을 자책하기에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어디서 들었던 말처럼,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보다 더 좋은 것은 다른 이게 그 아름다움은 '주는 일'이다. 그 일은 다른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답고 위대한 사람과 대면할 때 우리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에 이끌린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다고 말했다. 태양이 밖에 있을 때는 반짝이고 빛이 나지만, 어둠이 드리울 때 스테인드 글라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안의 빛에서 나타난다.
폭풍우로부터 골짜기를 보호해야만 할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폭풍우로 인해 생겨난 그랜드 캐년 같은 장관을 구경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란 실패를 알고, 고통을 겪고, 상실을 경험하며, 깊은 구덩이에 빠져 길을 찾아 헤맨 이들이다. 그들은 동정심과 따뜻함, 사랑과 배려로 가득한, 곧 삶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 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에게 들은 말이다. 언젠가 책을 내게 되면, 이런 제목을 선택하려고 생각한다. 『나는 빗 속에서 춤을 추었다.(가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류시화 시인에 의하면,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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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두 번째.보며
다시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