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심폐소생술)
“당신이 옳다.”
정혜신의 견해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져간다.
사람은 옳기도 하지만 잘못 판단하고 행동할 때도 있는데 어떻게 늘 옳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당신이 옳다’는 말은 그런 현실적 수준의 잘잘못이 아닌 더 근원적 차원에서의 명제다. 무슨 말인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열일곱 살 A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날이면 밤거리를 배회하며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그럴 때 친구들에게 흔히 이런 소리를 듣는다.
“거리에서 웬 청승이냐. 집에 들어가, 븅신아~.”
맑은 공기가 절실한 순간에 매연으로 꽉 찬 지하주차장에 갇히는 느낌일 것이다.
이럴 때 A에게 산소 공급이란 "집에 또 못 들어가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같은 말이다. 이 말은 '이 시간에 네가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해다. 네가 이상한 애라서 달밤에 체조하고 있는 게 아닐 거라는 무조건적 믿음과 지지다. 그 말은 A를 절대적으로 안심하게 해준다.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살다 보면 주변에서 죽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긴장하게 된다. 그런 경우에도 ‘네가 옳다’고 해야 하나. 그럴 수 있나. 물론이다. 그럴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죽여버리겠다, 죽겠다’는 극한의 감정 상태도 햇빛 아래서는 아침 이슬처럼 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속마음을 듣는 현장에서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다. 사람의 분노나 억울함, 상처의 감정이 하찮아서가 아니다. 천천히 정확하게 햇빛을 쬐어주면 그것들은 대부분 사라진다. “집을 나가겠다, 일을 때려치우겠다, 죽겠다, 죽이겠다”는 말에 “네가 그러면 되느냐, 그러면 안 된다”는 류의 말들은 절박한 사람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의 반응이다.
나는 그런 때 언제나 “그렇구나,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쳤구나, 다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구나,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보구나”라고 온 체중을 실어 말한다. 그 다음에 “그런 맘을 들게 했던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뭔데?”라고 묻는다. 그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의 하소연이든 예외 없다.
사람은 괜히 집을 나가지 않으며 괜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물며 괜히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다.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백 가지 이상은 찾아본 이후다.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 ‘너는 옳다’라고 지지해 주면 상대가 오판하지 않을까. 자만심에 빠져 결국 잘못되지 않을까. 쓴 약처럼 따끔한 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게 어른다운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니다. 그건 사람을 어리석고 표피적인 존재로만 상정하는 틀에 박힌 생각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오만한 시선이다.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 자체를 메시지의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제를 더 근원적인 메시지로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너는 옳다"고 해주면 A는 지금 집 밖을 배회하는 내가 참 잘하고 있구나라고 믿는 게 아니라 찌질하게 구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안심하게 된다. 산소가 희박한 순간에 고농축 산소를 들이켜는 것이다. 사람은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정서적인 존재다. 어른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호흡이 가빠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념치킨을 시켜준다면 고마운 일도 아니고 도움이 될 리도 없다.
열일곱 살 A도 생각한다. ‘이 추운 날 나는 왜 거리에서 이러고 있을까.’ 집을 뛰쳐나왔을 때는 나올 만한 명백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자기도 자기를 다시 추궁하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옳다’는 타인의 확인이 필요한 건 이렇게 자기 자신도 전적으로 자기 편이 돼주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러고 있나. 도대체. 매번.’ 대개의 사람들에겐 이런 식의 자기 분열적 사고가 습관이다.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어’라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조차 실제로는 그렇다. 인간이 본래 그런 존재이니 우리에겐 일상을 지탱해 줄 최소한의 외부적 산소 공급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A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는 건 조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서적인 내 편이 필요해서다.
“부모님이 그랬으면 당연히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A는 그 밤의 분노와 억울함에서 순간적으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배회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는 말은 A를 계속 집 밖으로 나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린 게 아니구나. 내가 잘못된 게 아니구나. 내가 비정상이라서가 아니구나’ 안도하게 해서 그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지 쉽게 결정하게 한다. 십중팔구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A가 밤거리를 배회한 것은 춥지 않아서도 걷기 위해서도 아니다. 밤거리를 배회하는 행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복잡한 마음이 정돈되는 순간 그 행동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 행동은 혼란한 마음의 2차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웬 청승이냐, 달밤에 체조하냐”는 식의 반응은 아침 이슬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일이다.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저절로 사라진다.
사람은 괜히 집을 나가지 않으며 괜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물며 괜히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다.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백 가지 이상은 찾아본 이후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마땅하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다. 사람 마음을 대하는 예의이기도 하다.
‘네가 옳다’는 확인을 받으면 “집을 나가겠다, 죽겠다, 죽이겠다”는 따위의 말들은 이내 아침 이슬이 된다. ‘당신이 옳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으면 아침 이슬과 멱살잡이하는 허무한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당신이 옳다'-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인용>
(202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