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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집중해서 한 가지 주제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새로운 글은 아닙니다. 그동안에 쓴 글 중 몇 꼭지를 인성교육의 관점에서 재정리한 것입니다.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수많은 자료들을 바이러스가 한순간에 다 삼켜버려서 애를 먹기도 했네요. 다행히 인터넷 공간에,그리고 그동안 펴낸 세 권의 교육에세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7월 27일 잠정적으로 날짜가 잡힌 교보재단이 주관하는 인성교육 심포지움을 위한 발제문(초고)입니다.)
교육적 상상력과 ‘시나브로’ 교실 소통법
-8가지 실천지침으로 정리한 학생 인성지도 사례
안준철(전 순천효산고 교사)
학교에서 동료 교사들과 학생 문제로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 때가 있다. 책 읽기 모임과 같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자리에서조차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풀어가기가 쉽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동료 교사의 상처를 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서로에 대한 울분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사회의 성과 위주의 경쟁 문화가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학생 인성지도는 부적응 학생 지도와 개념이 다르지만 어차피 완성된 인간이 아닌 결핍을 가진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겹치는 면도 없지 않다. 아동의 결핍은 인성교육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그 결핍이 교사에게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 또한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상황에서 교사가 이런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의 경우는 완전한 성인인 교사가 미완성의 존재인 학생을 교화하거나 지도하는 식이 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런 착각이나 오류의 과정에서 교상처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발표문은 인성교육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보다는 지난 30년간의 교직생활을 통해 실제 경험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학생들에게 진실을 가르치고 인격을 키워주는 일이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할만 했던 것은 나름대로 교사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으뜸 치유법이 다름 아닌 ‘시나브로’ 교실 소통법이다. 일종의 느림의 미학이랄까? 인간성을 말살하는 과열 경쟁시대가 교사와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 적대시하게 만들었다면 이제 그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1. 허리 숙이기, 혹은 차별하지 않기
주번교사 하던 날이었지
흰 종이 쓰레기 한 점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었어
누군가 손에 쥐었다가
무심코 버렸으리라
생각하며 허리를 굽히는데
세상에, 그게 흰 장미인거야
이슬 같은 물기를 머금고
생글 웃고 있지 않겠어?
자세히 보니 제 몸에 가시를 박은
한 줄기 초록빛 가녀린 선이
측백나무 울타리를 속을 비집고 올라와
흰 장미 한 송이를 후끈 피워놓은 거야
나는 생각했지
처음에는 그 쓰레기가
정말 흰 종이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린
찢겨진 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허리를 굽혀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지.
-졸시, <하얀 장미>
해마다 첫 담임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2와 60의 차이는 몇 배입니까?"
학생들은 어려운 질문인 줄 알았다가 긴장을 풀고는 쉽게 대답을 합니다.
"30배요."
저는 잠시 기다렸다가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그럼 20조 2와 20조 60의 차이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해줍니다.
"차이가 거의 없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2와 60 앞에 붙어 있는 20조라는 숫자가 너무 큰 숫자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앞에 있는 큰 숫자를 '생명 값'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뒤에 붙어 있는 2나 60이라는 숫자는 공부를 좀 더 잘하고, 얼굴이 좀 예쁘고 하는 여러분의 조건을 의미하지요. 그 조건의 차이가 30배가 된다고 해도 그 앞에 붙은 여러분의 생명 값이 너무 크기 때문에 거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하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누가 좀 더 예쁘고 누가 공부를 좀 더 잘하고 하는 것은 선생님에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생명 차제가 저에게는 너무나 크고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첫 담임 시간에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학기 초라 반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조사를 하기 위해 한 아이와 면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작성하여 제출한 가정환경 기초조사서에는 부친의 직업이 '사업'이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하시느냐고 물으니 그 아이는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걸 왜 물으세요?"
너무도 당돌하고 예기치 못한 반응이어서 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그 아이의 상기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 담임이니까 묻는 거야. 널 알아야 하니까. 알아야 널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러자 그 아이는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절 사랑해야 하는데요?"
전 잠시 생각을 모아 다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잘 모르겠다. 왜 널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그런데 난 이미 널 사랑하고 있는 걸."
그렇게 말해놓고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데, 의외로 아이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더니 입에서는 이런 말을 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빤 무직이에요. 엄마는 재혼하셨구요. 전 할머니하고 살고 있어요. 선생님께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너무 차별만 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고백하자면 저는 한 때 학생들을 심각하게 차별하는 교사였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그나마 덜 차별하게 된 것은 학교라는 곳이 차별이 구조화된 곳이라는 자각이 있고난 뒤부터였습니다. 물론 교사도 인간인데 공부 잘하고 인성이 좋은 아이들을 편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는 학생이 생깁니다. 따라서 이런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역행하여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이 교사의 전문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 값’ 이야기는 학생들을 생명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하거나 차별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인 셈입니다. 다른 어떤 것 속에는 학생들의 외모나 성적뿐만 아니라 인성도 포함됩니다. 인성이 부족한 아이들은 가르침의 대상이 될지언정 비난이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성교육의 시작은 한 존재 앞에 허리를 숙이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 오른 편 그림 그리기
점심시간에 철조망을 넘어 무단 외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운동장에서 풀을 뽑고 있던 세 명의 여학생들이 저를 보자 우르르 달려왔습니다. 그 중 목소리가 유난히 큰 아이의 입에서 발음된 저에 대한 호칭은 이랬습니다.
“자기야!”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교장 선생님께서 먼발치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는데 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철없이 희희낙락하는 아이들을 저는 급하게 수습하여 땅바닥에 쪼그려 앉게 했습니다. 제가 먼저 반 무릎자세로 앉은 다음 아이들을 앉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어떤 절박한 생각에 사로잡혀 땅바닥에 큼지막한 네모를 하나 그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동안 우린 이 왼편 그림만 그려왔어. 너희들이 담배를 피우면 피우지 마라. 화장을 하면 화장하지 마라. 치마 입고 철조망 넘어가면 넘어가지 마라. 너희들은 그리고 나는 지우는 그런 불행한 그림만 그려온 거야. 오늘도 너희들은 이 왼편에 그림을 그렸고, 나는 그것을 지웠어. 그리고는 끝이야. 사랑으로 지웠지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이제 이 오른편 그림을 그려보자.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명 깊은 책을 한 권 읽는다든지, 아무도 줍지 않는 저 교정의 휴지를 줍는다든지, 직장 일로 힘드신 아빠 어깨를 한 번 주물러 드린다든지 하는 거 말이야. 그것이 오른편 그림이야. 아무도 지울 필요가 없는. 이제 선생님은 너의 오른 편 그림을 보고 싶다.”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두 아이가 멀리서 저를 보자마자 손에 무언가를 든 채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더니 이렇게 외쳐대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저 오른편 그림 그렸어요. 여기 휴지요.”
“저도요. 저는 어제 아버지 어깨도 주물러 드렸어요.”
저는 이 사건을 ‘오른 편 그림 신화’라고 부릅니다. 저로서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지요. 이 오른 편 그림의 효과는 그 후 다른 학생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한 번은 흡연을 하는 학생에게 적용시켜 보았는데 곧바로 금연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를 가꾸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삶을 사는 태도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보였습니다.
“인간은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한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뭔가 허를 찌르는 묘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말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는 인성교육을 인사지도나 예절교육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인간에 대한 예절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학생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배려하고 지원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금지하고 관리하는데 주력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학생들을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닌 삶을 준비하는 존재로만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성교육의 핵심은 학생들을 자기 삶의 주체로 세워 주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시간을 스스로 계획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하고자하는 교육선진국 중 하나인 핀란드는 중고생들도 대학생들처럼 수강신청을 합니다. 이공계를 원하지 않는 학생들은 수학 과목을 신청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가하면 독일은 "일제고사가 시행되면 학교 간의 경쟁이 치열해져 교육은 사라지고 점수만 남게 된다."라는 이유로 일제고사를 폐지합니다. 이 두 나라는 왜 이런 정책을 쓰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명합니다. 학생들이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야 행복한 삶을 누릴 테니까요. 정상적인 어른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데도 우리의 귀에 이런 말들이 낯설게, 혹은 현실성 없는 낭만적인 수사로 들리기도 하는 것은 우리가 비정상적인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성교육도 오른편 그림 그리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흡연학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금연지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아리방이나 체육관 시설 등을 확충하여 예술과 운동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근본적인 처방일 것입니다. 금연지도가 왼편 그림이라면 이런 근본적인 처방들이 오른편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오른편 그림의 정신은 자율과 책임입니다. 강제적 야간자율학습이란 형용모순의 용어가 엄연히 존재하는 학교 공간에서 인성교육은 죽은 언어가 되고 맙니다. 인성상실의 시대, 교육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학교환경부터 개선해야하는 이유입니다.
3. 먼지가 아닌 푸른 종이로 보기
‘클래스’라는 제목의 프랑스 영화가 있습니다. 학교 현장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수작이지요. 그 영화를 보면서 교육은 ‘감정 노동’이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이 감정노동이라면 교사는 감정노동자인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교사가 감정노동자이니 감정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고 말이지요. 어떻게 하면 감정을 상하지 않고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은 오늘의 주제인 학생들의 인성지도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물음이 될 것입니다. 아동의 인성 발달은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태도나 감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의 시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중에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가 있습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푸른 종이 위에 쌓인 먼지가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먼지에 가려진 푸른색에 먼저 눈이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는 학생들을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가 있고, 먼지로 보는 교사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교사들이 둘 중 하나로 확연히 나뉘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학생 편에서 보자면 자신을 먼지로 보는 교사보다는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가 당연히 좋을 것입니다. 그럼 교사는 어떨까요? 감정노동을 하는 교사는 학생을 푸른 종이로 보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리할까요? 아니면 학생들을 먼지로 보는 것이 유리할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 푸른 종이로 보면 푸른 종이와 살게 되고 먼지로 보면 먼지와 살아야하기 때문이지요.
학생을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는 푸른 종이 위에 쌓인 먼지를 없애주려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는 수모와 고통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먼지가 제거되고 먼지에 덮여 있던 푸른색이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에서 교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겠지요. 이때의 기쁨과 보람은 그동안에 생긴 교사상처를 치유해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할 것입니다. 반면에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에서 먼지에 가려진 푸른색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먼지에만 집중하는 교사의 경우는 크게 상처받을 일은 없겠지만 대신 먼지구더기에서 살아야하는 숙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갈수록 묘연해지겠지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습니다. 혹시 이런 식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는 먼지이다.
나는 오늘도 먼지의 보복에 시달린다.
4. 조급하지 않기, 혹은 느리게 다가가기
물론 학교에는 교사의 인격적인 지도를 낯설어하거나, 인격적으로 대해줄수록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으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있을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지요.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억울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일단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와라 잉.”
그렇게 말을 한다고 순순히 내려오는 아이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결국 내려오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행동거지가 굼뜨고 느리게 보이는 것은 교사의 조급함으로 인한 착시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는데 그 후로는 학생들과의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느리게 다가가는 것. 아이들의 행동에 느리게 반응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주는 것. 느린 속도로 아이들의 진실을 채취하는 것. 여유를 부리며 느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느려터진 교사가 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서서의 아이들의 힘을 빼는 것!
이것이 저의 ‘시나브로’ 교실 소통법의 근간이기도 한데, 저에게 이런 좋은 방법을 전수해준 고마운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욱현이’입니다. 교실에 들어가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고 한 단위로만 학생들을 바라보던 저의 고질적인 습관을 고쳐준 것도 바로 그였습니다.
욱현이는 좀 느린 아이다.
평소에는 그다지 굼뜨지 않지만
시험 기간에는
녀석의 느린 동작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흡사 조각가 같다.
OMR 카드에 서른 문항의 정답을
컴퓨터용 싸인 펜으로 옮겨 적는데
오 분 남짓 걸린다.
서른 개의 빈방마다
한참씩이나 고요한 눈길을 주다가
아뿔싸, 실수를 했는지
정답 카드를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또 오 분을 기다리기가 무료해서
시간이 없다고 다그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의 평화로운 눈빛이
다시금, 한 장의 카드가 아닌
서른 개의 빈방에 가 닿고 있었다.
욱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속도를 반성한다.
-졸시, <욱현이>
6.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신뢰하기
한 아이가 아침 조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교무실로 찾아와 조퇴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너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꾀병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퇴를 허락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돌려보냈다가 점심시간에 다시 아이를 만나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이의 고민은 친구문제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오해가 발단이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진 듯했습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친구 문제에 더 민감한 편입니다. 그것은 항상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길 좋아하는 여학생들의 습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친구 간에 오해가 생겨 우정의 전선에 금이 가면 일단 짝을 지어 다니는 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늘이 없는 아이일수록 단 하루라도 무리를 벗어나 혼자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머리가 터져버릴 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늘이 없는 아이를 좋아합니다. 아니, 그늘이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늘이 없다는 것은 아이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보편적인 생각을 배반하는 일도 종종 경험합니다. 적당한 그늘이 있는 아이들이 비교적 외로움을 잘 견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쉴만한 적당한 그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날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걷는 걸 참 좋아해. 지난 겨울방학 땐 순천에서 여수까지 걸었어. 해안선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는데 참 좋더라. 경치가 좋아서가 아니고 나 혼자라는 사실 말이야. 너도 보니까 글을 참 잘 쓰던데 글을 쓰는 사람은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거든. 혼자 식당에 가고 혼자 하교하고 그런 일들이 많이 힘들 거야. 하지만 이번 기회에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아. 외롭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야. 외로워봐야 외로운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번 기회에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보고 네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도 가져봐. 선생님이 널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야. 중요한 것은 바로 너야. 난 네가 강해졌으면 좋겠어. 친구 문제로 자꾸만 도망치려하지 말고 네가 일이 잘 되도록 한 번 풀어봐. 이번 기회에 다른 좋은 친구들도 사귀어 보고. 알았지?"
이런 말들이 아이의 영혼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한 아이를 신뢰하는 것은 곧 인간을 신뢰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의 변화에 대한 신뢰, 아무리 불확실성 시대라고 해도 이것이 없으면 교육은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 후 그 아이에게서 받은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선생님 컴퓨터시간에 잠깐 틈이 나기도 하고 선생님 생각도 나고 해서 이렇게 편지를 해요. 항상 칭찬해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친구 같은 선생님이 제 곁에 있어서 지금까지 너무 행복했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새 제게 너무 힘든 일도 있고 그랬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이 제 곁에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이젠 다짐했어요. 절대 울지 않기로. 혼자서도 꿋꿋이 당당하게 다니기로요! 힘이 들 때 피하려고만 했는데 이젠 부딪쳐 볼 거예요. 어떤 험한 일이 있더라고요. 전 늘 생각했어요. 왜 힘든 일은 나한테만 찾아올까 하구요. 하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예전에 모습처럼 밝고 활기찬 모습 보여드릴게요. 선생님 항상 걱정해 주시고 문자 보내주시고 다독여주셔서 감사하고 존경해요. 선생님 그리고 사랑해요!!
가만 보니 아이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긴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인가는 예전의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오해가 풀린 거냐고 물어보니 아이에게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냥 잘 지내기로 했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그늘 없이 환히 웃어보였습니다. 친구 문제로 잠시 드리워졌던 그늘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외로울 때 찾아가 쉴만한 내면의 그늘을 소유한 듯, 아이의 거동에 깊이와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다음은 그 아이의 생일 때 써준 시입니다.
사월이 오면
네가 태어난 꽃 피는 사월이 오면
살구꽃 피고 복사꽃도 피고
이름 모를 꽃들도 다투어 피어나는
눈부신 사월이 오면
이제는 가장 먼저
네 이름이 생각나겠다.
사월이 오면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런 멋진 말들이 생각나곤 했는데
이제는 가장 먼저
네 갸름한 얼굴이 떠오르겠다.
발레의 꿈은 허리부상으로 접었고
패션 쪽은 너무나 관심이 가지만
어른들의 시선이 좋지 않아 고민 중이라고
네 꿈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선생님과 함께할 수 있는 1년
정말 뜻 깊고 뭔가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조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넌 첫 편지에 그렇게 썼었지
바로 그 말
변화라는 말, 성장이라는 말이
어찌나 빛나 보이던지
어찌나 가슴에 와 박히던지
이제 사월이 오면
가장 먼저 네 이름이 생각나겠다.
네 예쁘고 갸름한 얼굴이 떠오르겠다.
7. 사색의 힘을 길러주기
달력이 달랑 두 장밖에 남지 않은 11월의 첫 날, 저는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잠깐 학교 뒷산에 다녀왔습니다. 동산을 오르는 제 손에는 조그마한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그곳에 낙엽을 가득 담아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아이들과 가을 수업을 하기 위해 그런 수고를 한 것인데, 예년 같으면 아이들더러 동산에 가서 직접 낙엽을 주워오라고 했을 텐데 올해는 제가 대신 주워온 것입니다.
어느 핸가 동산에 가서 낙엽을 주워오라고 했더니 땅에 떨어진 낙엽을 줍지 않고 나무에 달린 다섯 손가락 단풍잎을 가지째 꺾어온 아이들이 있어서 올해도 그럴까 염려가 되어 그렇게 한 것이지요. 아니,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 낙엽을 주워오라는 말에 행여 싫어하는 눈치라도 보이면 어쩌나 싶어 미리부터 조심을 떨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답답한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밖에 나가 바람을 쐬는 것도 썩 내켜 하지 않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하긴, 휴대폰에 달린 작은 창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들이니 지금도 아날로그 시대를 살고 있는 아버지뻘 되는 늙은 선생의 고리타분한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요.
그래도 그렇게 속단할 일만은 아닙니다. 낙엽을 한두 장 붙이고 난 여백을 깨알 같은 글씨로 메워가는 아이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날 가을 수업을 시작하는 제 목소리를 사뭇 떨리고 있었습니다.
"동산에서 예쁜 낙엽을 주우면서 좀 덜 예쁜 낙엽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예쁘고 안 예쁘고 그 기준이 무얼까? 여기 이 낙엽을 보세요.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잖아요. 그럼 이것은 안 예쁜 낙엽인가요? 이 구멍을 통해 이렇게 여러분을 바라볼 수도 있고 세상을 볼 수도 있는데요. 그리고 이 구멍은 벌레들이 먹은 흔적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 이파리는 벌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어준 거잖아요. 그럼 참 마음이 예쁜 낙엽 아닌가요? 그러니까 예쁜 낙엽을 고르려하지 말고 그냥 한 장이나 두 장씩 손에 잡히는 대로 정을 붙여보세요."
이런 말을 잘 했다 싶게 상자에서 낙엽을 골라내는 아이들의 손길은 그리 까다롭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기어이 상자를 뒤적여 예쁜 낙엽을 골라가는 아이도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낙엽이 다 돌아가자 이번에는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며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가을 수업의 주제는 '나에게 쓰는 가을 편지'입니다. 나에게 편지를 쓰라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할 거에요. 하지만 이 세상에 가장 사랑스런 존재가 바로 나 자신 아닐까요? 고독을 즐긴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곧 내 자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친구도 소중하지만 그 친구는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 안의 나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지요.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요. 이렇게 소중한데도 그동안 너무 소홀히 해온 나 자신에게 사과하는 뜻에서라도 가을 편지를 한 번 써 보세요."
요즘 들어 이런 말에 귀를 쫑긋하고 듣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하나 둘 팔을 턱에 괴고 사색에 잠겨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아이들에 대하여 너무 쉽게 절망하는 것은 교사로서 절대금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로서 자격미달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완전하다면 우리 교사가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그런 미완성의 존재인 한 아이가 쓴 글입니다. 그날 가을수업 대상작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한테 할 말이 없다니…
너무 아쉽다…
난 왜 이럴까?
왜 아무 말이나 생각이 안 나지?
정말 화가 난다….'
8. 일상적 잔소리에서 ‘행복학 강의’로 전환하기
저녁 산책을 나갔다가 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아이는 점심시간에 저에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조퇴를 시켜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담임을 직접 찾아오지 않고 문자를 보내온 것은 조퇴할만한 사정이 아닌데 한 번 봐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대체로 관대한 편이지만 학교에 있기 싫어하는 마음이 커 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고 안아주되, 근본적으로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신호음이 가고 아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나야, 담임선생님. 지금 어디냐?”
“안녕하세요? 저 지금 집에 들어가는 중이예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응. 그냥 했어. 지금 동천으로 산책 나왔는데 가을바람이 너무 좋다. 너 집에 들어가기 전에 꼭 이 가을바람을 느끼고 들어가도록 해라.”
“예? 예.”
“여름에는 어서 가을이 왔으면 하잖아. 그럼 가을이 왔으니까 가을을 느껴야지. 언제 가을이 왔다 갔는지도 모르게 가버리면 네가 손해잖아. 그래서 전화한 거야. 이 말을 하려고.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예예. 고마워요 선생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조퇴를 청하여 거리를 배회하다가 늦게야 귀가하는 아이에게 가을을 느끼고 들어가라니? 다행히도 이런 위험천만(?)한 말을 듣고도 아이의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맑고 차분했습니다. 마치 무슨 큰일을 치르고 난 뒤 폭풍 성장한 사람 같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해 준 말은 그날 종례 시간에 반 아이들에게 해준 말이었습니다.
“오늘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을 꼭 세 번 이상 쳐다보세요. 요즘 저녁노을이 정말 아름다워요. 그리고 지금 가을이잖아요. 날씨가 추워졌다고만 하지 말고 여러분 가슴으로 가을을 느껴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종례 끝.”
저도 종례 때마다 지각하지 말라는 말을 후렴처럼 덧붙이곤 했습니다. 학생들이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해줄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부턴가 그런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대신 무엇을 해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화장을 하는 것을 슬쩍 봐주는 대신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귀찮게 했습니다. 한 아이는 중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는데 담임을 잘못 만나 책도 읽었노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말에는 팀을 짜서 산에 데려가기도 합니다. 사람은 힘든 일을 당하면 자신이 경험한 곳으로 자신을 피신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요. 언젠가 수업을 하다가 공부하기 싫어서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생명이 열 달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커 가면서 엄마의 배도 그만큼 부르게 되겠지요. 그리고는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오는데 나중에 엄마의 배는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푹 꺼지겠지요. 그런데 생명이 커 가면서 뱃살이 늘어난 흔적은 거의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아요. 마치 살이 튼 것처럼 피멍이 진 자국들이 남아 있지요. 그런 고통을 치르고서 여러분을 낳으신 거예요. 엄마가 여러분을 뱃속에서 키운 열 달은 여성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해요. 고통과 행복은 늘 같이 있어요.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수 있어요. 공부하기 싫다고 안 해 버리면 보람이 없고 보람 없는 삶은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교사의 일상적인 잔소리가 아닌 일종의 ‘행복학 강의’를 자주 듣는 아이들은 조금씩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힘을 얻기도 할 것입니다. 교육적 상상력을 통해 잔소리를 지혜의 언어로 바꿀 줄 아는 교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끝)
참고문헌(강사가 쓴 교육에세이)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우리교육)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맗하든(교육공동체 벗)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문학동네)
첫댓글 삼일 글 쓰느라 일 안나갔습니다. 오늘은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또 글이 떠 올라 그거 쓰느라 ..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하루 또 막막함을 어떻게 지날까 그러면서 샘 이 글 읽었습니다 2와 60을 놓고 보니 차이가 어마한 것 같은데 그 앞에 엄청 큰걸 놓고 보니 무의미해 지는 군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제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버스 안에서 두 어르신이 싸우는데 두분이 너 몇살이야 그러더라고요 나 60이다 넌? 어린 세끼가 어디서 까불어 난 80이다 20살이나 차이나는 이 어린세끼가 ㅎㅎ 전 웃었습니다 60이나 80이나 인생 종반으로 가는 것 같고 둘다 다 알것 아는 분이 어린이처럼 뭐 저로고 있다냐 하고
기형도의 저 글은 기형도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샘의 산문집에서 읽었습니다... 그날 또 소름이 돋았죠 샘글이 아니라 인용이어서 암말 안 했습니다... 푸른색 위에 아무리 먼지를 뿌려도 절대 색이 바뀌지 않지요.... 나쁘게 말하면 암만 좋은말 진리를 외쳐도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은 살인을 반드시 하는 성품을 타고 났다는 말입니다.. 암만 죽이고 밟아도 살인할 수 없는 착한 사람은 지 한 목숨 무너지고 만다는 말이죠...... 얼마 살지 않았지만 세상은 그런 것 같아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고... 교육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을 품는 것이 참된 교사겠지요...
그러고 보면 샘도 분명 어느 한 아이에 대해서는 저런 성품이라 암만 짖어도 변하지 않을 것인데 그러며서도 그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남들은 저 헛수고한다 하던 말던 그렇게 참된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처럼 저 또한 저거 또라이 아니야 하던 말던 세상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믿음하나 소망하나를 버리지 못해... 이러고 삽니다...
샘 저 잘 하고 있는 거 맞죠? 제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어쩐지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또 돈
떨어져서 이렇게 자신없이 꼬리 내린가 봅니다 ㅋㅋㅋ
어제 일찍 자서 컨디션 조절 해서 일 나갈라고 했는데 누웠는데 글이 떠 오르는 걸 어쩌라고요 작가가 글에 더 올인해야지... 어찌되던 말던 그냥 일어나 앉아 소주 한 잔 하면서 또 글을 썻습니다...... 구도와 갈등.... 전 하고 다르게 막 조립이 되는 느낍입니다... 모든 것 쉽게 그저 되는 것 없잖아요... 감당해야 할 제 몫은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그리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기꺼이...........
오늘 네 댓글을 읽으니 그동안의 고난이 헛된 수고가 될 것 같지는 않구나. 너무 조급한 마음을 먹지만 말거라. 나도 너억 대해서 좀 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반성하며 네 글을 읽었다. 홧팅하자 우리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