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의 종교
숱한 서사가 채워지듯 수면의 배들이 직선과 나선을 그린다. 바다로 나서는 걸음마다 나직한 독송이었다. 등대의 속살은 사시사철 치성하는 느티나무의 줄기이다. 높이 솟은 그 모양은 우미한 촛대이거나 돌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도색한 이국의 기념품이다. 높은 등탑은 가뭇한 바다 수면을 명랑하게 일깨우는 청동의 종탑을 떠올리게 한다. 남해 바다로 낚시를 갈 때마다 등대는 비린내를 휘감고 어촌의 사절인듯 감읍하며 반겨준다. 방수의 페인트로 겹칠 된 탑실을 들여다보면 바깥의 사정과 무관한 침묵과 평온이 곤곤하게 공동을 채운다.
단단한 육지를 밟고 선 여행자의 깜냥에 등대는 볼거리를 풍요롭게 북돋는 조형물이거나 내해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보이기 쉽다. 바다 등롱이 내뿜는 절실함이 도보하는 행인의 심중으로 와 닿기는 퍽 어렵다. 본디 빛은 간절할수록 강렬하게 비추는 법이니, 안온한 도시인의 구두가 언제 노도의 망망대해, 그 차가운 격랑 속에 흠뻑 젖어 들어 보았을까.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생판 사정이 다르다. 등대의 본질을 알려면 물길 속으로 가야 한다. 어둠의 포자가 수변 가득히 번식한 야밤에 일순 바다는 매섭게 표변한다. 암흑은 석관의 뚜껑으로 둔중하게 해면을 덮고, 노련한 선원의 눈동자조차 송연묵 적신 필묵으로 덧칠한 듯 깜깜해진다. 매복한 암초의 무서움과 치받는 조류의 사나움이 언제 생명을 들때릴지 모른다.
이때 깜빡깜빡, 빛의 수화로 말을 거는 등대가 있다. 물길의 독법을 알려주는 광파 표지는 늘 고정된 자리에서 고유의 신호로 점멸한다. 선원의 머릿속에 추측만으로 무성하던 해도는 등대 불빛을 기점 삼아 비로소 완성된다. 속삭이는 귀뜸이라도 답을 아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반딧불만한 빛살이라도 식별만 해낸다면 시야는 수십 개의 전구를 밝힌 듯 개안한다.
굳이 자글거리는 야간의 선박에 탑승하지 않아도 도시인들이 등대의 씀씀이를 대리 체험하는 시간이 있다. 살아가는 와중에 암전된 듯 도통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다. 양수의 바다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은 개개가 선원의 핏줄을 타고나서인지, 인생사의 매 순간을 거친 항해로 인식하곤 했다. 여로에서 길을 잃거나 좌초의 위기를 만난 때에 냉랭한 물살이 시
시꺼먼 어둠과 뒤섞인 채 스며든다. 혼곤한 미망으로, 조난의 절망으로 도시살이의 무게를 실감한다.
‘답을 알려 주세요’, ‘길을 보여 주세요’ 깎지 끼고 바닥에 엎드려 본 사람은 안다. 기도란 불안을 심지 삼아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두려울수록 가열해지는 서원으로 마룻바닥이 흥건하게 매달린다. ‘왜 저를 시련 가운데 던지십니까?’, 육지에 살면서도 갑판과 선창 바닥에 무릎 대고 웅크린 선원이 된다.
비로소 빛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뱃사람이 등대의 광원을 감지하듯 암담한 현실에 한 줄기 희망이 내리쬐길 간구한다.
치열하게 답을 추구하는 소시민의 응집된 눈길이 바로 어부가 등대를 찾는 열망이다. 애틋한 실마리, 그것이 등대의 정체이고 씀씀이였다.
눈앞의 너른 든바다를 훑어본다. 방풍림 끝 해무는 흩어지지 않고 둥지를 틀었다. 분주한 조각배들이 진자처럼 점점이 왕래한다. 너울을 헤집으며 사는 저들의 뱃일은 가장 험난한 생애로 손꼽히곤 한다. 지치고 상처받은 어부들은 때론 피난처와 산성으로 도피해야만 할 것이다. 질박한 시민들이 종교에서 마련한 예배 공간에 모여 쉼을 얻고 도피하듯이 말이다.
기독교의 교회와 성당, 불교에서 마련한 절과 암자가 대표적인 성소다. 유교의 서원과 사림의 학당도 마찬가지고, 기복신앙이라 일컫는 민간신앙도 서낭당과 소도를 영묘하게 펼치고 번민하는 민초를 위로하곤 했다.
바다의 종교는 ‘무사항해’다. 격랑이 들이치는 이곳의 절대 교리는 ‘바다를 건너는 모든 이들의 안녕과 평안’이다.
뱃사람들 서로 부대끼는 삶의 터전이 종잡을 수 없는 물결 위다 보니, 그들의 안식처와 도피성은 내륙과 섬 같은 단단한 뭍일 수 밖에 없다. 땅은 바닷사람의 고향이면서 희원하는 성지이다. 휴식과 평안, 식량이 담보되는 곳. 견실한 기둥 세운 돌집처럼 결코 요동치거나 뒤집어지지 않는 성채, 육지.
종교는 표지를 세워 성소로의 발길을 안내한다. 신성한 장소마다 세속과 구분되는 공간임을 표하며 교리를 함축시킨 표식이 선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첨탑, 종탑이 그렇고, 불교의 만자와 일주문, 천왕문과 불탑이 그렇다. 유교의 서원을 여는 홍살문과 솟을삼문, 태극문양과 돌담 역시 뚜렷한 상징이고, 민족의 염원이 투영된 솟대와 장승, 신목과 선바위, 마을의 안녕을 수호하는 노거수도 마찬가지다.
육지의 입표이자, 안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표식이 곧추선 등대다. ‘바다종교’의 극의이자, 교리의 성상이다. 거쿨진 첨탑에서 어슬한 해면으로 내리쬐는 광명은 진리이고, 명철이다. 잡아끄는 구원이자, 닿고 싶은 법열이다.
때때로 신도가 십자가를 대면할 때의 반가움, 불자가 가붓한 산의 종소리를 들을 때 차오르는 안정감이 깜빡이는 등대에 묻어 있다. 모든 항해란 등대의 축원으로 시작되고 등대의 축사로 마무리되는 한편의 인생살이였고, 출항은 내세의 평안을 고대하는 부침많은 현세였다.
한참 바다 쪽으로 낚시를 던지다 멈추고 대를 곁에 부려 놓는다.
친한 동무인양 가까이 우뚝한 등대의 둘레를 슬렁슬렁 돌아본다.
바닥에 말라붙은 미역치와 망상어, 버려진 어구와 녹슨 철판 따위가 눈살 찌푸려지지만 한편으론 정겹기도 하다.
벽해의 지촌, 소박한 어촌다워서다. 국가에서 건립한 유인, 무인, 방파제 등대의 수효가 일천 개를 웃돈다 하니, 바다 열리고 어부 사는 곳마다 빠짐없이 명촉의 등롱이 굳게 서있으리라, 작은 등대일수록 애틋하다. 소박한 시골교회와 두메의 암자가 호젓하듯 저 혼자 묵묵히 귀한 불을 지핀다.
이러한 벽지의 등대와는 다르게 해상 교통이 복잡한 요충지의 등대는 광파로, 음파로, 전파로 다채로운 신호를 보낸다.
신호란 일종의 계시가 닐 런지. 등명기의 빛으로, 취명기의 나팔소리로, 무언의 전파로 항로를 안내하는 등대의 모습은 환상으로, 음성으로, 영성으로 계시하는 신의 목소리를 닮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 역시 ‘빛의 신’이면서 ‘음악의 신’이며 동시에 ‘예언과 계시의 신’이었다. 등대가 깨우고 계도하는 통로들이 일련의 종교적 상징과 긴밀히 연결되는 건 단지 우연이 아니다.
등대와 선박 사이의 끈끈한 관계는 에로스이기보다 아가페이다.
배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등대는 바라는 것 없이 푼푼하게 시혜한다.
돌아보면 백색광은 늘 그곳에 있다. 성화는 사람을 골라가며 비추지 않는다.
등대의 항구함과 동일성, 그리고 광채에 오롯이 순종하는 어부의 믿음은 그대로 신앙이다. 어두워지면 시선이 닿는 곳에 어김없이 염염한 등명이 점화되므로, 바라보는 눈길마다 휘황하고 거룩한 배화였다.
등대원의 존재를 빼고 등대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을 일컬어 빛을 나누는 사도라 묘사하고 싶다. 희고 마른 수건으로 성상을 닦고 성구를 깨끗이 씻듯이 등대원들은 등명기의 렌즈를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신자들의 번뇌와 희노애락에 반응하고 공명하는 구도의 사제다.
행여 이웃들이 돌아오는 길을 잃을까봐 노심초사, 밤잠까지 설치는 ‘바다바라기’다.
근데 등대가 서기 전까지 항로를 알리려 모닥불을 피웠고 횃불을 밝혔다.
밤마다 마른 장작들이 선원을 위해 소신공양 했고 일렁이는 맹염이 그날 치 안전을 담보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고 첨단의 신호 장비가 발달하면서 일견 등탑의 필요성이 덜해 보일지도 모른다. 실상은 다르다.
정교한 기술 표지는 도리어 고장의 가능성도 있고 항상성이 담보되지 못하는데다 몇 단계를 거치는 번거러움이 있다. 게다가 장비를 갖추지 못하는 영세한 선박도 숱하다.
가난한 자도, 허름한 자도, 부족한 자도 고개만 들면 공평하게 누리는 생명의 빛살, 등대! 종교가 과학과 무관한 영역이듯 양감의 석탑으로 우뚝 선 등대는 시대의 변천과 상관없이 뿌리박혀야 한다. 어둠은 광대하므로 이에 맞설 빛의 현신이 요청된다. 세상이 온통 광명이라면 등대는 굳이 필요 없다. 밤은 어느 때고 숙명처럼 도래하고 짐승 같은 아가리를 벌린다. 시커먼 내장 속을 작은 횃불 하나 없이 건널 수는 없었다. 바다 사람들의 터지고 갈라진 손아귀로 등대 빛이 한 움큼씩 쥐어진다. 그것이 그들을 자유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