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최재호)
고대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춘추시대의 서시(西施), 한(漢)나라의 왕소군(王昭君), 그리고 삼국시대의 초선(貂嬋)과 당(唐)나라의 양귀비(楊貴妃)를 꼽는다.
서로 간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이들 4명의 절세가인 중에서 후세 호사가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인물이 왕소군이다.
그녀는 원래 전한(前漢) 때 원제(元帝)의 후궁이었으나, 적국이었던 흉노(匈奴) 왕의 첩(妾)이 되어, 한과 흉노 간에 태평성대를 누린, 미모와 지혜를 겸비한 여인이었다.
한나라는 강성한 이웃 흉노에게 매년 여인과 물품을 보내 그들의 침략과 약탈을 막아야 했던 약소국이었다.
이때 아무도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황량한 오랑캐의 땅으로 정략결혼의 제물(祭物)이 되어 끌려갔던 왕소군. 그녀가 적국의 왕과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며, 평화를 유지 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의 운명과 능력을 믿고 사랑하는 열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이야기는 옛 중국인들의 전설이나 구전 민담 등의 좋은 소재가 되었고, 후세의 뛰어난 시인 묵객들이 다투어 시와 소설 등에 다양한 버전으로 각색되었다.
기원전 37년, 한(漢)의 건소(建昭) 원년, 가난한 집안의 왕소군은 18세에 원제의 후궁에 간택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탓에, 5년이 지나도록 황제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흉노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元帝)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며 장안(長安)을 방문하였다. 이때 원제는 궁녀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뽑아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시작되어 한동안 궁녀들의 춤사위를 지켜보던 호한야가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는데, 꼭 공주가 아닌 궁녀 중의 한 명을 아내로 택해도 좋은가.” 하고 원제에게 제안하였다.
원제가 호한야의 제의를 수락했다. 호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진 구석에서 춤을 추고 있는 한 궁녀를 지목하였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자신도 그간에 보지 못하였던 천하절색의 궁녀가 있었다. 연회가 끝난 다음, 원제가 그간 화공이 그려온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살펴보니 왕소군의 실제 모습은 초상화와 크게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초상화의 얼굴에는 실제에 없는 커다란 점까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원제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점이 찍히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원제는 화공을 즉시 참수하였다.
그리고 호한야에게 혼수를 준비한다는 구실을 붙여,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소군(昭君) 칭호를 받으며 흉노의 땅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녀는 출발하기에 앞서 옥구슬이 달린 붉은색 흉노 복장으로 단장하고 말안장에 올라,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비파에 실어 쏟아내었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빼어난 미모와 구슬픈 비파 소리에 날갯짓을 잊고 그만 땅바닥으로 떨어졌다(落雁).
수백 년이 흘러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이날의 정경(情景)을 ‘소군(昭君)이 옥 안장에 옷자락을 스치며(昭君拂玉鞍)/말에 올라 붉은 뺨 위로 눈물을 흘리네(上馬啼紅頰)/오늘은 한나라 궁녀이지만(今日漢宮人)/내일 아침엔 오랑캐 땅의 첩이라네(明朝胡地妾)’라고 읊었다.
또한 시인 동방규(東方虯)는, 왕소군이 흉노의 낯선 풍토에서 망향의 슬픔에 젖어 나날이 수척해 갔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胡地無花草)/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가 않네(春來不似春)/자연히 허리띠가 느슨해지는 것은(自然衣帶緩)/이는 몸매를 위함이 아니라네(非是爲腰身)’.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가 팍팍할 때도 있다. ‘인생의 봄’은 각자의 마음과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 아닐까.
춘풍화기가 가득할 새봄, 우리의 봄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니, 봄이 오고 있기는 한 것인가? 자문(自問)해 본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