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명절, 고모네 형제 다 모인 자리에서
이제 말 배우는 다섯 살 막내가
거드름 피우는 아부지 어깨 너머로
똥삼봉 들었다고 했다
아랫장 빈 공터로 끌려나와 울던 막내
그래서 사형제는 따로 놀기를 좋아했다
생각하니 아직도
다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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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넷이다. 명절에나 한번씩 만나는 사이. 가끔은 곁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한때 가족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적이 있다. 스무살 적인가는 혼자 동사무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호적을 파버리겠다고. 독립호주가 꿈이었다. 지나간 과거는 모두 모멸에 찬 것들이었다. 노름에 빠져든 아비의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다. 삼일에 한번씩은 부서지던 그릇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들, 어머니의 눈은 종종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밤새 이어지던 그 곡소리를 피해 담 밖으로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쯧쯧거렸다. 날이 밝아 햇볕을 쬐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새벽부터 이어지던 일들, 그 악다구니와 같은 삶. 아부지에게 배울 수 있는 거라곤 가난한 시골 장터 장사치의 세 치 처세술과 세상에 대한 굴종 밖에 없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방법만 있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습기와 구김살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만 서도 괜시리 얼굴이 빨개졌다.
언젠가 엄니가 집을 나갔다. 엄니가 없다는 것보다 더 이상 싸움이 없는 고요가 찾아 왔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차라리 그 억척스러운 엄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고 바래보기도 했던가. 그렇잖아도 노름쟁이 새끼들이라고 친척들에게조차 눈총받는 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는데, 어느 명절 양념딸이라는 다섯 살 짜리 막내가 아부지의 패를 보다가 아부지 똥쌈봉 들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싸늘해지던 친척들 어른들의 눈빛.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이 죄인이라도 된 양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구박을 받으며 울던 막내. 30년이 근 되어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영상들.
대부분 민초들의 삶들이 그러했듯 그래서 우리 4형제도 여러 삶의 굴절들을 경험해야 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성인이 되면서는 더 심해졌다. 구부러진 못처럼 꼬이고, 깨진 유리파편처럼 날선 우리 가족들의 모임은 늘 고성과 핏대와 오기와 깽판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엄니도 아부지도 자식들에게 권위가 없었기에 우리 여섯 식구는 모두가 수평적인 적이 되어 위아래 없이 싸우기도 했다.
그나마 세월이 가면서 차츰 차츰 안정이 되어 갔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그나마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관계는 가족뿐이므로 서로서로 연대하기. 제발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기.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연대감들도 생겼다. 특히 형제들 간에 우애가 조금씩 돋아났다. 세월에 치이고, 세상에 치이며 그래도 동기간 귀한 줄을 알게 된 탓일 게다. 이 험악한 세상에 서로를 지켜줄 관계는 그리 많지 않은 탓일 게다. 동지도 벗도 나중엔 아무것도 챙겨줄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되기도 하지 않는가.
남자 삼형제는 일찍부터 노동 현장 판으로 뛰어 들었다. 용접조공으로, 배관조공으로 새벽밥을 먹고 잔업 철야를 밥먹듯이 했다. 서산으로, 제주도로, 서울로, 당진으로, 거제로 일거리를 쫓아 다녀야 했다. 다행히 나만 빼고 형과 동생은 우연한 기회에 고향인 순천 인근에서는 좋은 대우의 공장이라는 LG정유에 들어가 기능공으로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것이 한 6-7년쯤 된 듯하다. 그러고 나서야 형과 동생은 결혼도 할 수 있었다. 형은 서른 다섯에, 그리고 동생은 서른 넷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400만 농민이 뿌리를 잃어가고, 800만 비정규직과 100만 청년실업자가 양산되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안정된 직장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나는 한번도 챙겨보지 못한 효도도 형, 동생이 도맡아 해주었다. 그새 어머니는 백내장 수술에, 고혈압 치료에, 퇴행성 관절염 치료에, 빠진 이 치료까지를 형과 동생 덕분에 받아볼 수 있었다. 없어 본 사람들은 안다. 그만큼 치료라도 받아 볼 수 있다는 것이 고생고생해서 생긴 그 여러 지병들의 고통보다 크다는 것을. 평생 고생으로 생긴 병들에 대한 원망보다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행복에 어머니가 겨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듯 간사한 가 보다. 내가 서울에서 벗들과 후배들에게 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고향의 형제들에게 하지 못했다. 피했다. 그냥 건실한 직장인들로 살아가기를. 제발 집이라도 한 채 장만한 근로자로 살아가기를, 제발 노동자를 배우지 말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형과 동생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어용 현장에 민주노조가 서면서부터였다. 어용 투성이던 여천(여수) 석유화학단지에 민주노조의 바람이 불면서 부터였다. 간간히 노조 이야기를 하던 형제들이 언젠가는 서로 한 사람만 대의원하자고 싸우고 있었다. 너무 나서지 말라고, 가정을 생각하라고 동생은 형을 나무랐고, 내게 지원사격을 요청하기도 했다. 난 다만 충분히 알고 했으면 좋겠다라고만 했다. 자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학습을 하기만을 권했다. 하지만 동생도 천천히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여름, 운동에 지치고, 그 동지라는 것에 지치고, 삶이라는 것에 지쳐 무작정 귀향했을 때, 동생은 오히려 나보다 의젓해져 있었다. 동생의 차에서는 노동가요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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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행운목
햇살 좋은 여름날 고향 내려와
동생은 행운목 사러 나가고
무심코 카테잎을 트는데 뜻밖에
“가 버린 세월을 탓하지 마라,
지나간 청춘일랑 욕하지 마라”로 시작하는
노동가요가 들려온다
서른 넷 노총각 주야 3교대 기능직이지만
재벌기업이니 어디냐고
컴퓨터 들이고 승용차 끌고
야간대학졸업장에 품행도 방정해져
한 세월은 지났나 했는데, 결국
너도 잊을 수 없었겠지
삼형제 한 현장 용접조공으로 다니며
한 명은 사촌간이라 했던 기억
사돈네 팔촌까지 끌어들이는 피라밋으로 가세를 일으켜 세워 보자고
형제들이 내게 한번이라도 해준 게 뭐가 있냐고
겨울 구로공단 육교 위에서
증오로 이글거리던 너의 눈빛
우리는 한번도 서로에게 다정해 본 적이 없지
저기, 파란 행운목을 사서 돌아오는 동생
노래를 끌까 하다가 놔둔다
왜 우린 한번쯤 서로에게 쑥스러워지면 안 되는가
왜 한번 다정히 마주서 보면 안 되는가
왜 한번 꼭 껴안아주면 안 되는가
햇살이 너무 부셔 눈물겨운 어느 여름날 오후
동생의 행운목
그 형제들이 며칠 전 서울 명동에서 모였다. 남한 역사상 처음이라는 정유공장 파업을 일으키고, 공권력 투입을 피해 서울로 상경한 도망자들이었다. 형은 쟁의부장으로 영장이 떨어졌고, 동생은 가장 중요한 생산 공정이어서 이동할 때는 무려 4대의 미행차량이 붙더라는 방향족팀의 파업을 이끄는 핵심 현장 대의원이었다. 노숙을 마친 경희대에서 배낭 하나씩을 곁에 둔 800여명의 시커먼 사내 들 앞에서 ‘투쟁’하며 손을 치켜드는 형을 보며, 빨리 돌아가 봐라고 말을 아끼는 동생을 보며 울컥하는 게 목에 올라왔다. 왠지 서러웠다고 할까. 감격스러웠다고 할까. 머리띠들을 두르고 종묘에 집회에 선 형제들, 침탈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간 형과 함께 앉은 삼 형제. 결국 우리의 지난 삶은 속일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해방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친다. 스스로 나아가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나아가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삶으로, 몸으로, 아픔으로 깨닫는다. 4000도 짜리 용접불똥이 살을 김밥처럼 말아 갈 때, 악을 질러보고, 어디엔지 모를 원한에 찬 비명을 질러본 사람들은 안다. 검게 탄 얼굴이 부끄러워 발바닥을 문지르는 숫돌로 얼굴을 밀고 그 위에 덕지덕지 크림을 발라본 사람들은 안다. 손톱 밑 때가 부끄러워 악수 한번을 하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보고, 버스 전철 손잡이를 잡지 못한 채 손을 웅크려본 사람들은 안다. 그 쓰라린 소외의 자리들을.
어차피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고난은 있겠지만 마음에 안식은 오지 않겠는가. 지금의 나처럼 또 다른 외로움과 번뇌에 시달릴 지언정, 그것은 더 이상 비주체적인 삶만은 아닐 거지 않겠는가.
마침 그날은 학생운동을 거쳐 농민운동을 하겠다는 어느 미친놈에게 시집가 살고 있는 막내 여동생의 남편도 농민대회에 참가차 올라 온 날이었다. 작년 농민대회 때는 죽창을 옮기다 전경들과 맞붙어 콧등이 주저앉기도 했고 남한산성에서 복역을 하고 나오기도 했던 친구였다. 이렇게 해서 정말 오랜만에 사형제 가족들이 서울에서 만났다. 그것도 명동성당 농성 텐트 앞에서.
지금도 별 걱정 하지 않는다. 네 형제가 만나서도 누구 하나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임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 어렵고 힘든 세월도 버텨 나왔기에 이쯤의 고난 쯤이야 하는 마음들이었다.
아마도 형은, LG정유의 파업이 어떻게 마무리 되던 구속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예전 발전노조, 철도 등의 경험에 의하면 핵심대의원인 동생도 해고될 수 있을 듯하다. 정유공장은 한번 가동이 멈추면 하루에도 수십억의 손실이 발생하고, 재가동도 쉽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LG는 이렇게 발생한 수백억, 수천억의 손실을 대신해 이 기회에 민주노조의 모든 싹을 없애려 할 것이다. 이미 직권중재안이 떨어졌고 파업은 불법이 되어 있다. 회사는 29일까지 복귀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전원 해고 시키겠다고 하고, 새 직원들을 채용하겠다고 한다.
그래도 형과 동생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부디 형과 동생의 내일에 이 삶과 사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 넘쳐나기만을 기도해본다.
모레는 그 여천에서 전국노동자대회가 잡혀 있다고 해서 가족대책위의 일원이 되어 내려가보려 한다.
첫댓글 글을 쓴 저는 송경동이라고 합니다. 가끔 까페 들리는데 글까지 올리게 되었군요.
잔잔하게 써 내려간 글과'시'에 이렇게 심장이 격동될 줄이야.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일이 전국노동자대회지요? 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잔잔한 심장에 파동이 일게 하는군요 ........
여수시내에서 엘지정유파업 지지 유인물 선전전을 하고 집회에 결합했습니다. 배냥을 짊어지고 조직적으로 집회에 참가한 엘지정유노조원들이 듬직해 보였습니다. 오늘 싸움에 대해서는 좀 비판적입니다만, 속히 승리하는 싸움으로 결말짓기를 소원했습니다.
여기서 자네를 보니 반갑긴 한데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겁고 착찹하겠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싸움도 결국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니 이번 일들이 자네와 형제들에게 삶의 소중한 가치로 편입되기를 바라고 위기는 기회라는 삶의 낙관을 생각해 보네.
잘 읽었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은 건지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보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혼란스럽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저도 고향이 시골이라 가족들의 삶에서, 사촌들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네요. 좋은 결말을 기대해봅니다. 화이팅!
파업이라..........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