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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 있을 뿐만 아니라 비룡폭포(飛龍瀑布)와 같은 이름난 폭포도 있다. 송광사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로서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 등과 함께 삼보사찰에 해당하는 승보사찰(僧寶寺刹)로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다. 조계산이라는 이름도 조계종(曹溪宗)의 중흥도량 산으로 되면서 송광산에서 개칭된 것이다. 6·25 전에는 80여동 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60여 동이 있다. 큰 가람답게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43호)·송광사국사전(국보 제56호) 등 3점의 국보, 송광사경패(松廣寺經牌, 보물 제175호)·송광사하사당(보물 제263호)·송광사약사전(보물 제302호)·송광사영산전(보물 제303호) 등 12점의 보물, 8점의 지방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88호인 곱향나무 쌍향수가 천자암 뒤쪽에 있다. 송광사 일대는 연산봉을 비롯하여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송광사 내팔경(內八景)과 외팔경이 정해져 있을 정도이다. 송광사 부근에는 말사(末寺)인 광원암(廣遠庵)·감로암(甘露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있다. 산 남쪽에는 높이 800m의 선암(仙巖)이 있다. 동쪽 사면에는 선암사를 중앙에 두고 주위에 향로암(香爐庵)·선조암(禪助庵)·대각암(大覺庵)·운수암(雲水庵)·청련암(靑蓮庵)·대승암(大乘庵) 등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6·25 이후 대부분 소실되거나 폐암(廢庵)되었다. |
송광사의 세가지 명물은 이것!! 송광사에는 국보급 유물들도 많이 보관되어 있지만 그보다도 꼭 보아야 할 명물 세 가지가 있답니다. 그 첫번째가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밥통이래요. 밥통도 그냥 밥통이 아니에요. 일단 그 크기가 보는 이를 압도하지요. 얼마나 크냐면, 쌀 7가마분 그러니까 총 4천명분의 밥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밥통이라고 하네요. 두번째 명물이 '능견난사' 라고 하는 그릇으로 사찰 음식을 담아 내는데 쓰입니다.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수공예품으로, 그 정교함이 단순한 그릇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답니다. 놓쳐서는 안될 마지막 명물은 '쌍향수' 라고 불리는 나무에요. 나무가 다 똑같지 뭐 그리 볼게 있나 싶지만 이 나무는 그 모양새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천자암 뒤뜰에 심어져 있는 이 나무는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똑 같은 모양의 향나무 두 그루가 엿가락처럼 꼬여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해 있어요. 800여년 전 보조국사 지눌이 꽂은 지팡이로부터 자랐다는 이 나무는 지금은 높이 약 13m의 거목으로 자라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답니다다 |
조계산 산행지도
산행이야기
홈플 앞에서 TT산악회버스를 기다리다 현암총무님에 등떠밀려 어떨결에 탑승한 조계산행
이번 토요산행은 마땅히 갈만한 산행지가 없어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가 안되면 팔공산이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출발했는데 조계산을 간다기에 송광사가 보고싶어 얼른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안에는 모두 낯선 산꾼들이지만 반갑게 나를 맞이해준다
산이 좋아 혼자 이산 저산을 기웃거리면서 산을 즐기고 있지만
회원제로 운영되는 버스를 처음 타보니 비회원제로 운영되는 버스완 분위기가 사뭇다르다,
가족처럼 따스함이 느껴온다
조계산은 선암사로 시작해서 송광사로 끝나는 산행이지만 사찰(선암사,송광사)로 유명한 산이다
조계산은 고즈넉한 사찰을 보기위한 덤이라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보리밥집은 지나가는 산객들에게 쉬어갈 수있는 멋을 주어 멋진 산행이 기대된다
섬진강 휴게소 준공기념탑(잠시 휴식을 취하는동안 한컷, 명판에는 박정희정권때 김재규가 세운거란다)
단체사진(현암산악회) 선암사 입구 주차장에서(펌)
꽃무릇
버스에 내리전에 베낭을 정리하고 신발끈을 조이고 스틱길이를 조절하고
버스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내달리던 산행 습관은 오늘은 예외다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버스에 내려 신발끈을 조이고 체조로 간단히 몸을 풀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리고 같이 출발한단다
이렇게 시작된 조계산 산행(10:30분)
선암사 입구에는 꽃무릇이 고운자태를 뽐내며 우리를 맞이해주고 있다
<선암사삼인당>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꽃무릇 외떡잎식물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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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교
1963년9월2일 보물400호로 지정되었다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선암사 일주문
요즘 지어지는 절은 거대한 대리석으로 조형물을 만들고 콘크리크로 절간을 짓고 도로를 포장해 절다운 참맛이 떨어지지만
선운사와 송광사는 때묻지 않은 고풍스런 멋이 물씬 풍기는 절이라 오늘은 절 기행 온 기분으로 걷고싶다
얼마걷지 않으니 승선교가 우릴 맞이하고 있다
승선교는 아주오래된듯한 돌로 아치를 만들어 멋을 주어 강선루와 함께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강선루
선암사 대웅전
선암사에서 유명한 해우소
어떻게 읽어야 하나 ㅅ간뒤, 뒤깐
뒤깐치고는 외관이 멋스럽다. 수세식변기에 적응된 어린애들은 신기해할 전통(?)뒤깐이다
내부는 나무판으로 바닥을 깔았고 편안하게 볼일을 볼수 있게 나무판으로 벽을 막았다.
칸칸이 아늑하고(?) 신기할정도로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휴지가 이리저리 흩날릴법도 한데말이다
변을 누고 튀길 높이를 생각해서 인지 깊이가 3미터는 족히 되어보인다
냄새도 생각보다 나질않는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수로를 따라 여유롭게 떨어지는 물이 정겹게 느껴진다
소나무와 잘어울리는 법당들
선암사
마애여래불입상
고풍스런 선암사 경내를 여유있게 둘러보고 산을 오른다
바람 한점없는 잔뜩 찌푸린 날씨에 비가 금방 한줄기 할것같이 무덥다
언제나 산은 오를만큼 많은 땀을 요구한다
편안한 흙길을 밟고 올라가는 산행길,
얼마오르않아 힘들다고 쉬는 회원님들, 언제 조계산을 넘어 가나 싶다
기운을 내 길을 앞선다
오름길은 가능한 쉬지않고 계속 오를려고 노력한다
힘은 들지만 많은 땀을 흘려야만 체력을 보강되고 지구력을 늘릴려고 그런다
게다가 많은 걸음을 걸음으로서 많은곳을 돌아보고 싶어서다
쉬는 회원님을 뒤로하고 깊은 숨을 들이쉬며 산을 오르니
호흡이 가파지고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 온다 온몸이 땀으로 흔근해온다
거친 숨소릴 내 뿜으며 폐 깊숙히 가득 숨을 들여쉰다
그리곤 도시의 찌든 찌꺼기를 모두 토해낸다
삼라만상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낸다
조계산 장군봉
오름길에 지쳐 지겨워져 올무렵 장군봉이다(12:26분)
산 가득한 안개로 조망이 좋지않아 볼거리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비까지 간간히 내린다.
혼자 홀로 산행을 할까 몇번을 망설이다가 현암회원님들이 섭섭해 할것같아 기다린다
땀이 식고나니 온몸이 환기가 돈다.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해 외투를 꺼내 입고 회원님을 기다린다
1시간이 넘어서야 하나둘씩 회원님이 올라온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느라 더 늦은 모양이다.
나를 많이 찾았단다. 점심도 같이 먹고 이바구 하고 싶었단다
보잘것 없는 나를 이렇게 반겨주니 한식구가 된 기분이다
고맙다는 인사나누고 작은굴목재로 내려선다
배바위에서 내려다본 선암사와 순천 상사호
배바위에서 본 장군봉
큰굴목재
보리밥집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시원한 냉수로 씻어내고 편안하게 평상에 걸터 앉아 파전에 막걸리를 주문한다
가격도 5천원씩이면 괜찮은편이다
막걸리 한사발에 파전 한점, 금상첨화다. 게다가 메운고추를 곁들이니 시원한 입안이 매운맛에 얼얼해온다
회원님(수찬?) 한분이 얼린 맥주를 가져와 막사발 가득, 숨도 안쉬고 한잔을 들이키니 속이 후련해온다
맛있다고 서너잔을 마시고 나니 몸이 풀려 나른해온다. 갈길이 아직도 먼데 걱정이 앞선다
보리밥집에서 맛있게 먹고 일어서지만 계산을 하지못해 미안한 마음안고 떠난다(나중에 인사라도 해야지)
산행여유가 있어 산행계획에 없던 송광사 천자암을 들러 하산하기로 한다
빠른걸음으로 오르내림을 몇번하고나니 술이 땀으로 배출되 온몸을흔근히 적시어온다
무거운 몸도 정상으로 돌아와 다시 기운을 낸다
천자암의 쌍향수나무
드물게 자생하는 나무라고 한다
길은 길게 돌아가지만 천자암에 들러 쌍향수나무를 구경하고 시원한 수박도 몇조각 얻어먹는다
천자암
송광사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송광사
송광사 대웅보전
이십여년전에 새로 지은 이 전각은 대단히 크다는것(108번뇌와 108평)
그리고 지붕모양이 다른 전각과 조금 특이하다(亞자형)
여기서부터는 펌글입니다(출처 : 작은 뜰)
조계산 자락에 아늑한 터에 위치한 웅장한 모습의 경내에는
사찰이라면 으례 있을법한 석탑과 석등이 보이질 않는다
송광사는 그 형상이 마치 단아한 연꽃 봉우리같아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 자락은 연꽃의 잎사귀며
이러한 연꽃 봉우리 형상의 지형에 석물인 석탑이나 석등을 올려 놓는다는것은 곧
꽃 봉우리를 가라앉히는 격이되니 석탑과 석등을 설치하지 않은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한가지 이유가 더있다
송광사를 감싸고 있는 조계산이 불의 기운이 흐르는 지형을 하고 있다는것
그렇다보니 절내에 불의 형상인 석등을 세우는것은 있을수 없는 이치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수많은 화재사건이있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도량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는가 하면
1842년(헌종8년)에도 큰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탓다
또한 1948년 여수순천사건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절 주변의 많은 숲이 훼손되고 대웅전이 소실되어
지금처럼 복원되었다
임경당과 삼청교
이곳이 송광사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곳이다.
어디인지 모를게 웬지 눈에 익은 그런 풍경이지 않은가...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선비가 탁족을 즐기듯 두 다리를 물에 담그고 있는 곳이 임경당이고,
그 너머 거울처럼 맑은 계곡물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드리워진 다리가 능허교라고 하는 삼청교이다.
그리고 그 삼청교 상부의 아름다운 누각이
건물이면서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역할을 하고있는 우화각이다.
특히 이곳은 우화청풍(羽化淸風)이라 하여 송광사내 팔경중 하나로 경치가 빼어나고
그 시원한 바람이 일품인 곳이라한다.
유려한 글솜씨로 이 곳의 풍경을 읊은 글로 나의 감상을 대신해본다.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 능허교(凌虛橋).
모든 속박을 벗고 걸림 없이 자유롭게 날아 오르는 우화각(羽化閣)을 지난다...
이 엽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져 내려온다.
옛날 이 능허교를 처음 만들 때 주지스님은 다리불사를 위해
화주(化主. 같은 말: 시주(施主)) 를 시작했다.
무사히 다리불사를 마치고 나니 동전이 세 닢 남았더란다.
이미 다리 만드는 일은 끝났는데 남은 돈이 문제였다.
스님들은 이래저래 고심 끝에 돌다리 아래 손이 닿지 않는 용머리에
철사를 꿰어 남은 돈을 매달아 두기로 했다.
훗날, 다만 다리를 고치거나 다시 지을 때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승가에는 호용죄(互用罪)라는 것이 있다한다.
어디어디에 써달라고 내 놓은 시주를 그 목적이 아닌 다른 일에 쓰는 허물을 이르는 말.
이처럼 오로지 한 목적 외에 쓰면 죄가 되는 '무서운 돈'을 무섭게 지킨 일화는
지금 아침저녁으로 들리는 송광사 범종에도 아로새겨져 있다.
1977년, 송광사에선 깨진 종 불사를 하기로 하는데 취봉 노스님이 뜻밖에 거금 150만원을 내놓으셨다.
6.25전쟁 때 타버린 종고루 중창불사를 마치고 남은 돈을 한푼도 딴곳에 쓰지 않고
본전과 20여년 이자를 고스란히 모아 두었던 것이었다.
온갖 명목으로 돈을 거두고, 그 돈을 대충쓰고, 딴 곳에 돌려쓰고, 제 호주머니에 챙겨버리는
속가의 사람들을 움찔하게 하는 서늘한 죽비소리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대로 조화를 부린다는 여의주에 누구도 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돈을 매달아 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다.
옛 스님네들의 숙연한 정신을 매달고 있는 엽전 세 닢...
이야기 끝났어도 그냥 지나가기 아쉽다.
1930년대에 펜화로 그린 그림 한 번만 더 보자...
물과 돌다리 누각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분명 같은 곳을 나타낸 그림이지만
내 허접한 사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나는 틀린 그림 찾기 하듯 두 그림을 번갈아 보며 하나하나 살펴본다.
무욕의 상징 같은 능허교 아래의 돌로 새긴 용머리도 그대로 보이고
거울 같은 물가의 집 임경당은 그 때도 버선발을 담그고 있고.
임경당 맞은편 나무..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려는듯, 임경당 공부하는 스님의 불경소리를 더 가까이 들으려는 듯
물 위로 허리를 구부린 그 나무가.. 70여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자리에 그 모습이다...
손가락을 쫙쫙 편듯한 저 가지의 영속성....
신선이 노닐던 피안의 언덕, 능허교와 우화각...
내 그 곳에 다시 간다면 무지개 다리 아래 엽전도 찾아볼 것이고, 누각에 앉아 시원한 바람도 실컷 맞고 올테다...
‘우화(羽化)'라는 이름처럼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때 까지...
우선 송광사의 명물 3가지 부터 알아가볼까?
길 따라 사람 따라 얼떨결에 들어온 넓은 경내였다.
그 중에서 대웅전 왼편 승보전이라는 건물 한 켠에 커다란 구유같은 것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음.... 카메라를 들고서 무엇을 찍을 것이냐.. 하는 건
부페에 가서 좋아하는 대게만 잔뜩 집어다 먹을 것이냐,
김밥부터 육회까지 샅샅히 다 집어다 먹을 것이냐.. 그런 결정의 차이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날은 한쪽 눈으로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조그마한 네모에 보기 좋은 그림들만 쫓아다녔다.
그래서 송광사 이야기를 하는데 부족한 그림들이 많다.
그런 그림들은 여기 저기서 빌려와 짜깁기 하는 중이다...
다시 승보전.
승보전은 지금의 대웅보전을 새로 짓기 전에 대웅전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한다.
자리를 고스란히 물려주고 옆으로 나앉았는데 그 한 옆에 "비사리구시"가 있었다.
보다시피 아주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로 만든 이 비사리구시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 게으르다 했던가?
게으른 사람들만 들어보시라...
옛날 남원고을에 몇 아름드리 싸리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벼락을 맞아 쓰러진 것을
산에서 끌어내리려고 많은 사람들이 밧줄을 매어 잡아당겼으나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나무를 끌어다 나라님의 궁궐을 짓세 어-허 어-허" 그랬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명산 대찰의 각 절 이름을 다 대어도 역시 움직이지 않자,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끌어다 순천 송광사 대들보를 세우자. 어-허 어-허 "그랬더니
꼼짝도 안 하던 나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송광사로 끌고 가는데, 지금처럼 기중기도 없고 트럭도 없는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몇 달을 끌고 가야 남원에서 송광사로 옮겨지겠다고 걱정하였더니,
원님이 그럼 속을 좀 파내면 가벼워서 운반하기가 쉬울 것이라 하여 파낸 것이
지금의 비사리구시가 된 것이다.
배 같기도 하고 목욕통 같기도 한 이것은 옛날에 송광사에 참배하러 오는 많은 신도들을 공양하기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담아놓는 일종의 밥통인데 쌀 7가마분(4000여명 분)의 밥을 담을 수 있었다하니,
가히 절의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실, 이 비사리구시는 싸리나무가 아니라 괴목이라는 느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한다.
실제로 싸리나무는 회초리나 소쿠리, 사립문을 만들 정도지 아름드리 기둥을 만들 재목이 되진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왜 느티나무를 싸리나무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직 의문이라고 한다.
다만 절에서 사리함 내지 사리용구를 느티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사리'와 관련이 깊다하여 '사리나무'로 불리다가 '싸리나무'로 발음이 바뀐것이 아닐까.. 축측한다고...
또 하나, 구시라는 것은 소나 말의 먹이를 주는 구유와 같은 것인데 밥을 넣어 먹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연구에 의하면 이 구시도 밥을 먹는데 쓴 것이 아니라 절에서 많이 하던 종이만들기와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즉 닥나무 껍질을 삶아서 풀어 놓는데 쓴 것이라는 거~
이리 되면 이야기를 너무 멋없이 현실적으로 파헤쳐놓은 것 같다.
해서 진짜 옛날 이야기 하나 더 늘어놓을까 한다.
전설따라 삼천리...
옛날 승주땅 어느 고을에 70살 먹은 할머니가 점심 잘 자시고 갑자기 죽었는데
죽은 할머니는 저승사자를 따라가 염라대왕 앞에 다른 귀신들과 함께 재판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이중 누가 순천 송광사를 가본 사람이 있느냐 가본 사람이 있으면 살려주리라
하였더니 너도나도 가보았다고 앞에 나섰다.
염라대왕이 맨 앞에 섰는 사람에게 참말로 송광사에 가보았느냐 물으니, 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비사리구시 길이가 얼마며 폭이 어느 만큼 되느냐 하고 물으니 안 가본 놈이 알 수가 없어,
엉터리 답을 하니 염라대왕이 크게 노하여 지옥으로 보내고 다음 또 다음,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할머니 차례가 되었는데, 염라대왕이 비사리 구시 길이, 높이, 너비를 물으니 할머니 답하기를
살아 생전 초파일날도 가보고 보조국사님 제삿날도 가보고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구시를 보고도 재보지 않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더니 대왕은 정직한 사람이라 크게 칭찬하며
좀더 살다 오라 하였다.
해서 눈을 뜨니 어머님 죽었다고 아들딸들이 울고불고 야단들이었다.
놀란 아들을 붙잡고 저승 갔던 이야기를 하며 자를 가지고 즉시 송광사에 가자고 졸라 비사리구시를 재었다.
어머님 길이가 17자입니다. 그리고 높이는 3자입니다. 너비는 4자입니다. 하고 가르쳐 드리고
돌아서서 일주문을 나서니 야야 아까 몇 자 몇 자라고 했느냐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들은 명주실을 길이 높이 너비만큼 각각 끊어 어머님 빨간 주머니에 넣어 드리며
어머님 후에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이 물으면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어 길이는 요만큼 높이는 요만큼
하고 답하셔요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이곳 순천지방에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송광사 비사리구시를 자로 재어 실을 끊어
빨간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어, 송광사에 노인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시 옛날 이야기가 재미나다.
그럼 송광사의 두 번째 명물은 무엇일까?
바로 "능견난사"라는 그릇이다.
이 그릇은 송광사 원감국사가 중국의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가 다시 거꾸로 위의 그릇부터 밑에서 쌓아 올려도
차곡차곡 쌓아지는 신비스러운 그릇으로서,
조선 숙종 임금이 신비스럽게 생각하여 유명한 장인에게 명하여
이 그릇을 그대로 재현해 보게 했는데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능히 보기는 해도 그 이치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어필제명(御筆題名)을 하사했다고 한다.
원래 700여개의 그릇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30개가 남아있어
송광사 경내의 성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같은 모양에 같은 크기의 그릇이라면 포개는 순서가 바뀐들 달라지랴.. 싶었지만
그릇을 실제로 보지 않은 이상 그 속에 담긴 신비한 비밀은 나도 모르겠다.
사진의 그릇의 재료는 놋쇠로서 구경 21.5 cm, 높이 3.3cm, 두께 0.1cm 이라한다.
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육백 칠십개의 신기한 그릇들이여.....
마지막으로 꼽는 송광사의 세번째 명물... 바로 천자암의 "쌍향수" 이다.
조계산 천자암의 쌍둥이 향나무는 나무 종류가 ‘곱향나무’이다.
곱향나무는 잎이 바늘처럼 뾰족한 침엽수로, 잎의 길이가 다른 향나무에 비해 짧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무 전체가 엿가락처럼 꼬였고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하고 있으며.
서로 70cm 정도 떨어진 채, 8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자리에서 살아왔는데,
마치 굵은 한 그루의 나무인 양, 두 그루의 나무가 닮은 꼴로 서있다.
그래서 쌍향수(雙香樹)라고도 부른다.
이 곱향나무는 보조국사가 담당국사와 함께 중국에서 귀국할 때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지금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담당국사는 중국의 왕자 신분이었는데 보조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고려에 와서 천자암을 창건했다고 한다.
높이 12미터, 수령 800여 년의 이 쌍향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안고 산다...
첫댓글 곱향나무가 TV에 나오는걸보고 알아 맞췄어요 이곳 덕분에...ㅎㅎ 아이들도 놀랐죠 와우라고 ㅋㅋ 감쏴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