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는 세 마리의 견공이 살고 있다. 편견,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견, 고정관념의 관도 볼 관이니 볼 견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어찌나 지독한지 한 번 물면 놓지 않아 자주 회의와 후회를 오락가락한다. 다행히 마음공부와 명상으로 저들의 이빨을 무디게 했지만 오래된 업業과 습習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타투에 대해서도 그랬다. 거부감과 불쾌감을 앞세워 으르렁거렸다.
운전을 좋아하는 대가로 왼쪽 손등에 검은 점들이 피었다. 햇빛이 주범이긴 해도 요리하다 튄 기름, 뜨거운 국물도 공모를 했다. 몇 년 전 피부과에서 레이저로 그것을 제거했다. 마취를 해도 살 타는 냄새만큼 아팠고, 몇 날 며칠 불편도 감수해야 했다. 돈 들이고 고생한 결과는 희끄무레한 레이저 자국에 잡초를 닮은 거무스름한 흔적까지, 후회막급이었다. 하긴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할 기사도 없으니, 대충 살기로 했다.
그러나 팔뚝은 달랐다. 소매가 길면 속이 답답해 걷어붙이는 습관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전생에 쌈질을 즐기던 점방 아낙이었는지 겨울에도 툭하면 소매를 추켜올렸다. 드러난 팔뚝에 생긴 검버섯이 하나 둘 늘더니 급기야 북두칠성이 되었다. 감춘다고 소매를 내리지만 어느새 습관이 가동, 드러난 팔뚝이 시선을 탔다. 보통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등처럼 시행착오를 할 수는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 묘수가 떠올랐다. 북두칠성 위로 살짝 타투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깍두기 형님들이 몰려왔다. 전신에 새긴 무지막지한 용과 호랑이, 섬뜩한 글자가 생각의 싹을 잘랐다. 힙합전사나 로커, 헤비메탈 뮤지션의 목덜미와 어깨, 팔 다리를 점령한 국적불명의 요괴스런 것들도 거들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량 행위였다. 그게 묘책이라고 동안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 해 여름 방학 때 늦둥이가 한국에 들어왔다. 허기진 회포를 풀며 맛집을 전전하던 어느 날, 디저트를 먹는 중에 무심코 얘기가 나왔다.
"엄마 말이야, 이 북두칠성 위에 타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엄마, 기가 막힌 아이디어야. 당장 알아볼까?"
순식간에 뒤집기가 들어왔다. 불량 행위, 한심, 이런 단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말꼬리가 붙기도 전에 일사천리로 상담을 예약했다. 마침 가까운 거리에 있다며 당황해하는 발설자를 다독거렸다. 조선팔도에서 유일한, 막강한 나의 우군다웠다.
"당장 하는 게 아니니 안심하셔."
"그래, 정말 상담만 하는 거다."
큰 사거리를 지나 뒷골목을 따라 허름한 건물 이층으로 끌려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새 마리 견공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쩌려는 거냐? 음침한 공간에서 눈빛 게슴츠레한 아저씨한테 돈만 뜯기는 거 아냐? 나이가 몇인데 지금?
벨을 눌렀다. 문을 여는데 안을 보니 다행히 갤러리 같았다. 젊은 레이디의 살구 빛 미소가 한눈에도 전문가처럼 보였다. 방망이질하는 심장은 가라앉고 신뢰감은 급등했다. 늦둥이의 설명을 들은 타투이스트는 팔뚝을 진단했다. 그리고 원하는 그림이나 문구가 있냐며 당장 시술을 할 것처럼 말했다. 나는 '상담만 하러 온' 사실은 까맣게 잊고 무언가에 홀린 듯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녀는 컴퓨터로 여러 가지 폰트를 보여주었다. 전혀 몰랐던 신세계가 펼쳐졌다. 다양하고 독특한 디자인과 수많은 글씨체가 서로 뽑히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펄쩍', '도저히', '용납 불가' 따위는 유배 보냈는지, 그래놓고 음흉하게 언제 생각해 놓았는지, 거침없이 북두칠성을 따라 길게 'Hanmaum juingong'를 새기고 싶다 말했다. 누구와도 '한마음'으로, 언제나 '주인공'처럼 살겠다고 폼을 잡았다. 글씨체를 고르자 시술 과정은 일사천리, 끙끙 앓았던 눈썹 문신보다 훨씬 참을만했다. 타투이스트가 요즘은 50,60대 손님이 대세라며 이유는 '더 늦기 전에'라 했다. 혹시 내 잠재의식 속에도 그런 의도가 숨어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어찌 됐던 멋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맘에 들었다. 일곱 개의 점은 사라지고 세련된 사인 sign이 그 자리에 턱하니 들어섰다. 아! 이런 구거나. 이래서 타투를 하는구나. 내 몸의 불편을 감추었을 뿐인데, 마치 어떤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에너지가 충만했다. 겨우 열다섯 글자에 선구자라도 된 양 착각에 빠지다니. 급기야 세기의 여장부 논개, 김만덕, 명성왕후, 유관순, 김마리아 얼마 전 <미스터 션사인>에서 대활약을 한 고애신까지 일렬로 모시고는 맨 끝에 가서 섰다.
사람들 반응도 재미있었다. 팔뚝을 보면 일단 놀라워했다. 어떤 선배님은 "지워지는 거지?" 단정적으로 물으셨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걱정을 덜기 위해 4분의 3은 거짓말을 했고, 4분의 1은 이실직고했다. 소감은 대체로 '미쳤다, 대범하다.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한다.'였고 그중 극소수가 '우와 멋져, 대단하다, 역시 너답다.'였다. 필라델피아와 홍콩의 두 딸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신세대인 녀석들도 카톡에 비명을 질렀다.
"꺅, 엄마 진짜야? 정말 한 거야? 헐, 울 엄마 대박!"
그 일탈은 나에게 큰 의미로 남았다. 노쇠한 견공 세 마리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 것이다. 의외로 가뿐했고 의외로 심플했다. 완고한 일방통행에 노란 중앙선을 하나 추가한 느낌이랄까. 덕분에 의식이 확장되었다.
자유를 향한 갈망,
해방을 위한 저항,
개성을 만끽하고픈 도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든지 용기 내고 도전하자는 결의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노출의 계절이다. 타투는 더 맹렬히 나를 응원할 것이다. 의미심장한 열다섯 레터링을 앞세우고.
첫댓글 버스에서
내 앞자리에 자리잡는 젊은 친구의 긴 팔 가득 수놓인(?) 문신이 어찌나 예술적 감동을 주는지
그때부터 타투에 대한 그간의 거부감을 버리게 되었지요.
역시 '쩐란' 답습니다.
계절 막론 팔소매를 둥둥 걷어야 하는 이 사람도 살짝 맘이 동하지만
아서라 흰머리와 타투라. 쪼매 안 어울리는 듯. 눈썹문신도 못하는 주제파악 하기로 함.
경쾌한 문체와 소재가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지난주 금요일 행사에 다녀왔어요. 원정란선생님이 사회를 하셨고요. 진작 이 수필을 읽었다면 팔을 걷어보시라고 했을지도요ㅎ 유쾌한 수필입니다. 요즘은 타투에 참으로 관대한 시대지요. 저는 아직 적응은 안되지만요^^
@이현영 아직 젊으셔서 Rose Tatoo 라는 옛날 노래 모르시죠?
오래 전에 그 노래를 듣고 타투에 흥미를 가졌지만 타투는 왠지 비밀스러운 퇴폐적 관능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호감은 못 가졌었지만 가끔 아름답다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 한 번 써보고 싶은 소재이긴 했는데...
음악방에 올렸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글이 상큼합니다. 팔을 직접보면 더욱 상큼하겠죠.
이 수필을 읽은 분들은 다음에 원정란 선생님을 뵈면 절로 눈길이 팔로 가겠지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원정란 선생님,
견공들을 물리치고 한마음 주인공으로 거듭나셨네요.
용기와 결단력에 응원을 보냅니다. ^^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