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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일차/스웨덴1> 2012년 4월 26일(목) 스톡홀름, 흐림, 최고 부자나라의 행복은 어디에
'북유럽의 베네치아' 스웨덴 스톡홀름.
발틱해의 해안선이 내륙 깊숙히 들어와 있고,
여기에 연결된 운하가 독특한 정취를 자아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돌아본 다음, 야간열차를 타고 덴마크를 거쳐 독일로 향하는 날이다. 스웨덴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체류해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여유가 없었다. 사실 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일주일 갖고 충분할지도 의문이다. 어차피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아쉽지만 핵심적인 곳만 들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아야 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유럽 여행 가이드북은 스웨덴에 대해 스톡홀름과 웁살라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웁살라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스톡홀름만 하루 동안 돌아다니기로 했던 것이다. 수박겉핧기 스웨덴 여행인 셈이다.
그런 만큼 스웨덴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수적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북유럽 복지국가의 모델 스웨덴은 어떤 나라인가. 스웨덴은 이웃 덴마크와 서유럽이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던 1800년대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만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1800년대에는 매년 인구의 1%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850년에서 1910년 사이 60여년간 약 100만명이 미국으로 떠났다. 20세기 초 미국 시카고에 사는 스웨덴 사람의 숫자가 스웨덴 2대 도시인 고텐버그 주민보다 많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네소타를 비롯한 미국 중서부에 몰려들었다.
스톡홀름 중앙역. 보수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스웨덴 각 지역과 노르웨이로 연결되는 기차가 출발하는 곳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스웨덴은 농업 혁신이 계속적으로 이뤄졌다. 정부 주도의 농지개발(인클로저)과 적극적인 농토개척, 감자와 같은 새로운 농작물의 보급 등으로 1910년대 중반엔 농업 분야의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서유럽이 전란에 휩싸인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서유럽보다 한참 늦은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들도 공장이 세워지는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적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스톡홀름의 '세계무역센터' 건물.
중앙역과 가까이 있는데, 무역센터는 몇 개의 대형 건물로 구성돼 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스웨덴은 중립노선을 유지했다. 스웨덴이 독일과 접해 있고, 독일에 의해 서유럽과의 교류가 단절돼 있어 2차 대전 중에는 독일의 영향을 받아 중립국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기조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며 경제 및 사회개발에 진력했다. 독일에 철강과 기계류를 수출하는가 하면, 노르웨이의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고 덴마크 유태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에는 유대인 피난처 제공 등 인도주의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중립국을 자처하며 서유럽 중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소련 및 동유럽 중심의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Pact)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스웨덴의 정치지도부는 미국과 서유럽 정부와 강력한 유대를 유지하면서 경제 및 사회개발을 추진했다.
1,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을 초토화시킨 전쟁에서 비켜 서 산업시설과 사회적 안정 및 자연자원을 보존했던 스웨덴은 전후 유럽의 재건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면서 본격적인 도약의 길에 접어든다. 스웨덴은 전후 유럽 재건계획인 마샬플랜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전후 복구기간 동안 스웨덴은 스웨덴사회민주당의 집권 아래 있었으며, 노동조합 및 산업계(재계)의 협조를 받아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부와 노동조합, 재계, 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사회협약’을 통해 경제개발과 사회통합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큰 역할을 했다.
지구상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웨덴은 1970년대 중반과 후반의 오일쇼크로 산업계에도 엄청난 타격을 받아 전반적인 구조개혁에 들어갔다. 1980년대에는 스웨덴 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조선업은 급격히 사양화했고, 목재펄프업은 근대적 종이생산으로 통합됐다. 철강산업은 통합과 전문화가 이뤄졌다. 기계 엔지니어링 분야는 로봇화됐다. 1970~1990년 사이에 전반적인 조세부담은 10% 이상 높아졌고, 성장률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았다.
무분별한 대출로 인한 부동산 버블과 국제경제의 위축, 실업 축소정책에서 인플레 억제정책으로의 변화가 1990년대 초 스웨덴의 재정위기를 불러왔다. 스웨덴의 GDP는 1992년 5% 감소했고, 중앙은행은 금리를 한때 500%로 높이기도 했다. 경제위기에 직면해 정부는 정부 지출을 억제하고, 스웨덴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다. 복지 지출을 축소하고, 공공서비스와 공공자산을 민영화했다. 그리고 1995년에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스웨덴이 복지를 축소하고 민영화를 추진했지만, 공공부문의 역할은 여전히 전체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강하고, 경제개발을 하거나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기업 위주가 아니라 노동자와 구조조정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배려하는 정책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높은 복지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도 높은 세금은 내고 있다. 1990년 스웨덴의 조세부담률은 무려 52.3%에 달했다. 의회에서 세금감축을 시행했지만 2010년 전체 국가 GDP의 45.8%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것이며 미국(24.8%)이나 한국(25.1%)보다는 거의 2배나 높은 것이다. 이러한 높은 조세부담을 통해 분배 정의를 극대화해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낮은 나라가 됐다. 결국 스웨덴이 최고로 행복한 나라를 만든 데에는 국민들의 참여와 고통부담이 있었던 셈이다.
7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여행기를 인터넷 카페에 업로드한 다음, 8시30분에 동희를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자고 있다. 9시20분 동희를 다시 깨워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호스텔 로커에 보관했다. 그런 다음 숙소 옆의 카페에서 샌드위치, 주스, 차 등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간단한 아침식사가 40SEK로 한화로 6800원 정도 했다. 노르웨이보다 훨씬 싸다.
우리가 묵었던 스톡홀름의 시티 백 팩커스 호스텔 입구.
스톡홀름에선 저렴한 숙소였는데, 직원도 친절하고 시설도 깨끗했습니다.
스톡홀름은 유서 깊은 도시지만 그렇게 비대한 도시는 아니다. 시 인구는 87만명, 외곽을 포함한 인구가 137만명으로 도시가 잘 짜여져 있다. 스톡홀름에는 시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청사와, 중세 이후 스톡홀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여행의 필수코스인 감라스탄(Gamla Stan) 구시가지, 스웨덴 경제와 디자인 및 패션의 중심지인 신시가지, 노벨의 업적을 기리는 노벨박물관, 스웨덴과 북유럽의 문화를 보여주는 국립박물관, 민속촌이자 동물원인 스칸센(Skansen) 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며칠 동안 둘러보아도 좋은 곳들이다.
먼저 숙소를 나서 시청사로 향했다. 시청사는 가이드 투어만 가능한데, 11시에 시작되는 가이드 투어는 모두 매진됐다고 한다. 그래서 오후에 다시 들러 시청사 가이드 투어를 하기로 하고 구시가지 감라스탄으로 향했다. 발트해로 이어진 운하가 거미줄처럼 이어진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운하가 거미줄처럼 놓여 있다.
시청사 앞에서 바라본 항구 모습.
시청사 앞 운하에 서 있는 미녀의 조각상.
옛 시의회 건물과 대성당을 거쳐 로얄 팰리스로 갔다. 마침 12시부터 궁궐 수비대 교대식이 진행돼 한참 기다려 구경을 했다. 스웨덴 국왕은 다른 곳에 기거하고 있지만, 근위대 교대식을 통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잔뜩 긴장한 근위병들이 진지하게 임했다. 특히 근위대에는 여성들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키가 190cm는 돼 보이는 훤칠한 북유럽의 남성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교대식을 하는 여성 근위병들의 얼굴에도 진지함이 넘쳤다.
시청사에서 감라스탄 지구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게 되는 구 시의회 건물.
과거 스톡홀름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곳입니다.
로열 팰리스 앞에서 근위대의 교대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과 주민들이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습니다.
교대식에 참가한 병사들의 표정이 진지합니다.
스톡홀름 구시가지인 감라스탄 지구 모습.
그런 다음 1시에 시작하는 시청사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시청사로 돌렸다. 어른은 90SEK, 학생은 70SEK 등 160SEK(약 2만7200원)의 입장료를 지불했다. 시청사 가이드 투어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가이드를 하는 젊은 여직원이 아주 설명을 깔끔하게 했다. 영어 발음도 아주 명쾌해서 이해하기 편했다.
스톡홀름 관광의 기점이자 상징인 시청사 입구 모습.
시청사에선 매년 12월10일 노벨상 수상자 만찬을 비롯해 매년 300회 이상의 이벤트가 열리고, 35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곳이며, 스웨덴과 스톡홀름의 중요한 정치공간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 시청사에 약 2000명의 직원이 근무를 한다고 했다. 매년 300회 이상의 이벤트가 진행된다면 사실상 매일 저녁에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셈이었다.
붉은 벽돌 80만개를 사용해 1911~1923년 완공된 이 건물에 들어가면 먼저 중앙의 블루 홀(Blue Hall)이 나타난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파란 색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 이를 설계한 라그나르 웨스터버그(Ragnar Oesterberg)의 설계 초안에 대한 존경 때문에 블루 홀이란 이름을 붙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한다. 직원은 이런 에피소드까지 재미있게 설명했다. 언뜻 보면 특별한 것이 없는 빌딩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이었다.
시청사의 1층 로비이기도 한 중앙홀. 이곳에서 노벨상 수상 기념 연회가 열립니다.
중앙홀은 노벨이 사망한 날인 매년 12월10일 노벨상 축하 만찬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상식 만찬에는 각국 대표를 비롯해 1300명 정도의 귀빈들이 참석하는데, 공간이 좁아 참여자들에게는 사방 60cm, 수상자에게는 70cm의 공간이 주어진다. 특히 1300명의 식사를 3분만에 공급하는 게 가장 신경 쓰이는 사항인데, 엘리베이터 2대를 이용해 수백명의 웨이터들이 요인들의 위치와 주문한 음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속하게 공급한다고 한다. 노벨상 만찬의 평화롭고 근엄한 분위기와 달리 뒤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상상이 갔다.
노벨상은 모두 6개 분야에 대해 시상을 하는데 경제, 문학, 물리, 화학, 의학상은 이곳 스톡홀름에서 열리고, 유일하게 평화상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고 했다. 직원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원래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분리되기 이전에 노벨상이 만들어져, 성격이 다른 평화상만 오슬로에서 시상하고 이벤트도 거기서 열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 시 의회장이 나타났다. 매 2~3주마다 월요일 저녁에 회의가 열리는 중요한 정치공간이다. 시 의원 수는 모두 101명으로 여성 의원이 절반을 차지하고, 의장도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남녀의 차별이 없고, 오히려 여성이 주요 정책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스웨덴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방청석과 기자석이 회의장 위쪽에 마련돼 있으며, 모든 회의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돼 주민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했다. 투명성을 확보하면서 시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이 시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도 있는데, 매주 토요일에 36쌍이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신랑이나 신부 한명이라도 시민인 경우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신청자가 워낙 많아 최소한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긴 결혼식 시간은 3분이며, 평균 걸기는 시간은 50초라고 했다. 말하자면 시청사라는 기념비적 건물 안에서 사진을 찍는 정도의 결혼식이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려는 시 당국의 배려인 셈이었다.
이어 왕자의 방(Reflection Room)과 황금의방(Gold Chamber)를 돌아보았는데, 이곳에서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스톡홀름 시청사의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왕자의 방의 경우 미술에 조예가 깊은 왕자가 그림을 직접 그리는 등 실내장식을 맡았는데, 그림과 조각을 대칭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벽면의 그림은 창문으로 보이는 해안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라든가, 조각이 남녀 쌍으로 이뤄져 있다거나 하는 것들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벽면을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한 황금의 방.
황금의 방에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었다. 황금의 방은 벽면이 노란 황금빛을 띠고 있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작은 타일 위에 얇은 황금을 바른 다음 그 위에 유리를 덮었는데, 진짜 황금이 10kg이나 들어갔다고 했다. 이 홀은 시청사의 가장 중요한 홀로,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한 27세의 신예 예술가가 전체 디자인을 맡았다. 그는 2년만에 실내장식을 완공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첫째 실수(?)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모자이크를 완성하지 않고 작업을 서두르다가 그만 모자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 디자이너는 벽면의 아래에서부터 타일을 붙여 올라갔으나, 위쪽의 말 탄 사람의 머리를 조각할만한 공간이 없어 그만 머리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계산을 잘못해 실수가 발생한 것인데, 그 예술가는 스웨덴 신화에 나오는 머리 잘린 신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해 사람들이 실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두 번째는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호수의 여왕(Malaren)의 표정이었다. 이 여왕이 동양과 서양의 평화를 중재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그 여왕의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쁘지도 않고, 머리 카락이 이리저리 구불구불하게 뻗쳐 있는 것이 뱀을 뒤집어 쓰고 있는 메두사를 닮았다. 사람들은 스웨덴 신화와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그 예술가는 당시는 1차 세계대전 때로 호수의 여왕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화난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며, 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나간 것은 호수의 물결을 형상화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황금의 방 벽면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호수의 여왕 모자이크.
동양과 서양의 화해를 도모하는 모자이크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어찌 보면 중요하지도 않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 것들이지만, 이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가져다 주었다. 함께 가이드 투어에 참가한 사람들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건축물에 얽힌 자질구레하면서도 디테일한 스토리를 통해 시청사를 설명하면서, 관람객들에게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스토리들이 쌓이면 앞으로 시청사에 대한 관심이 더 늘어날 것 같았다.
약 1시간 정도 시청사를 돌아본 다음 오후 2시가 되어 또 하나의 볼거리인 스칸센 박물관(Skansen)으로 향했다. 4월까지는 모든 박물관들이 4시까지만 문을 열기 때문에 딱 한곳만 더 갈 수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택한 것은 스칸센이었고, 그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중간의 은행에서 500SEK(8만5000원)를 인출하고, 스칸센 박물관 앞의 간이매점에서 핫도그와 케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콜라 포함해 100SEK(1만7000원)로 노르웨이보다는 저렴하지만,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칸센 박물관 입장료는 1인당 100SEK(약 1만7000원)이었다.
스칸센은 일종의 민속 및 자연공원이라고 할만했다. 넓은 부지에 스웨덴 각지의 민속가옥과 생활공간과 동물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민속가옥은 스웨덴 곳곳에 있는 150여채의 전통가옥과 생활도구, 풍차, 우체국 등을 통째로 뜯어다가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들어갈 때에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들어가면서 입이 딱 딱 벌어졌다. 놀라웠다.
스칸센 민속촌 및 동물원 입구.
거기엔 스웨덴 전통마을이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주점은 물론 빵집, 구두방, 농촉 가옥, 시골의 레스토랑, 전통 목조주택, 금은방, 향신료와 곡물상, 농기구 가게, 풍차, 우체국까지 웬만한 도시에 있을만한 건물들을 통째로 뜯어다가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놓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전통방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심지어 길 바닥조차도 시골에 있는 것들을 뜯어다 갖다놓았다. 우리는 가게에 들르기도 하고, 빵집에서 200크로나를 주고 빵도 사 먹었다.
스칸센 민속촌. 실제로 다른 곳에 있던 거리와 건물을 통째로 뜯어다 만들었습니다.
스칸센의 풍차.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전한 것입니다.
동물원도 흥미로웠다. 곰, 늑대, 물개, 순록 등은 물론 말, 소, 양, 염소 등 가축들을 사육되고 있었다. 특히 그 동안 위험 또는 기피동물로 마구잡이 사냥을 하는 바람에 멸종위기에 처한 여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생물종 다양성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있었다. 곰의 경우도 그 서식지가 1990년대 초 스웨덴의 극히 일부 지역으로 줄어들었지만, 이후 동물 및 환경보호 노력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거의 전역으로 확대됐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멸종 위기에 몰렸다가 다시 살아난 곰.
설명문을 확인해보니 스칸센은 1891년 아르투르 하젤리우스(Artur Hazelius)에 의해 세워진 민속박물관 겸 자연공원이었다. 작은 산 하나를 모두 박물관으로 만들고, 공원과 각종 편의시설을 구축했다. 스칸디나비아 및 스웨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재미있게 이해하는 데 최고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한국의 민속촌과 자연농원을 합쳐놓은 박물관이었다.
옛 우체국 건물. 물론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전한 것입니다.
스웨덴 전통의 목조주택.
눈이 많이 오고, 겨울이 긴 점을 감안해 독특한 형태의 기단부를 만들었습니다.
스칸센을 2시간 정도 둘러본 다음 오후 5시가 돼서 걸어서 신시가지 중심구역을 통해 숙소로 돌아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퇴근을 서두르는 주민과 퇴근 후 동료 또는 친구들과 맥주를 한잔 하며 수다를 떨거나,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
스톡홀름 신시가지의 부산한 모습. 퇴근시간이 돼서 북적이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숙소에서 좀 쉬다가 스웨덴 전통요리를 하는 식당을 추천받고 ‘그릴(Grill)’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쇠고기 BBQ 구이와 양고기를 주문했는데, 총 금액이 603SEK(약 10만2500원)이나 됐다. 북유럽 최고이자 마지막 호화판 식사였다. 서비스도 친절했다. 지금까지 비싼 물가타령을 하면서 샌드위치나 햄버거로 끼니를 때워 온 것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 부자나라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양도 푸짐했고, 맛도 그 어느때 먹어본 음식보다 맛있었다. 동희도 매우 만족하며 뿌듯한 모습이었다. 평소 알뜰하게 식사를 하다가도, 아니 좀 배고프게 다니다가도 한 번 먹을 땐 제대로 먹는 게 필요한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8시에 다시 숙소로 돌아와 맡겨놓았던 짐을 찾은 다음, 로비에서 인터넷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이 스웨덴 호스텔의 인터넷 속도는 지금까지 6개월 이상 여행을 하면서 접한 인터넷 가운데 가장 빨랐다. 스톡홀름의 숙소도 노르웨이 베르겐의 숙소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음에도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특히 스톡홀름에는 자동화가 더 진전된 듯한 느낌이다. 10시(겨울시즌엔 8시)가 되면 리셉션이 문을 닫고 예약자들에게 온라인으로 코드를 알려주어 스스로 문을 따고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어떤 호스텔은 아예 무인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최고 부자나라에서 최고의 음식을 앞에 두고 있는 동희군.
여행 중에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은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죠.
숙소에서 쉬다가 10가 넘어 코펜하겐행 기차를 타기 위해 스웨덴 중앙역으로 향했다. 중앙역에서 마지막 남은 40SEK(약 6800원)로 빵과 물을 사서 챙긴 다음, 대합실에서 기다리다 11시30분 플랫폼으로 나갔다. 기차는 예정대로 밤 11시53분 출발했다. 스톡홀름에서 밤새 남쪽으로 달리는 열차다. 내일 아침 새벽에 남쪽 끝 마을인 말뫼(Malmoe)를 거쳐 북해를 넘어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넘어가는 기차다. 기차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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