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동 이야기
7부두는 아직도 우암부두라고 부른다. 초등학교시절 그곳에 군인초소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으로 놀러가 가끔 ‘건빵’을 얻어먹기도 했다. 군인아저씨들은 건빵을 경품으로 내 걸고 어린 꼬마들에게 권투시합을 시키기도 하였다. 몇 놈은 마치 검투사들처럼 건빵을 위해 친구들과 싸웠다. 코피가 터지도록... 7부두를 ‘석탄부두’라고도 했는데, 우암동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7부두 근처에 ‘제일제분’이라는 밀가루 공장이 있었는데, 역시 우암동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했다. 퇴근할 때 옷과 얼굴의 색깔을 보면 그 사람이 석탄부두에서 일을 하는지 제분회사에서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7부두는 그 후 현대식 항구로 바뀌었다. 그런 공사를 진행하는 틈새 기간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기도 했는데, 그곳은 당시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놀이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개방 되었다기보다는 공사가 중간 중간 지연되어, 방치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우리 할아버지는 7부두 방파제로 나가셔서 '숭어‘ 낚시를 하셨다. 나도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낚시라는 것을 해 보았는데, 이태호라는 친구와 할아버지께서 아끼시던 낚시장비를 몰래 가져가 7부두에서 낚시를 하였다. 당시 7부두는 항구의 암벽에 해당되는 부분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임시로 보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 모래주머니에 낚시 줄이 걸려 고기도 못 잡고 낚시 줄만 잃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버지는 투망(投網--일명 ‘초망’이라고 불렀다.)으로 고기를 잡으셨다. 내가 알기론 당시나 지금이나, 투망은 불법으로 알고 있다. 낚시로 고기를 낚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투망으로 7부두에서 고기를 잡았던 것이다. 특히 ‘꼬시래기’를 많이 잡으셨는데, 꼬시래기는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다. 정확한 명칭은 ‘망둑어’다. 조선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보면 망둑어의 눈이 망원경같이 생겼다고 해서 담수에서 노는 것을 ‘망동어’라 했고, 바다에서 노는 것은 너무 잘 뛰며 돌아다닌다고 해서 ‘탄도어’라고 했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경거망동’이라는 말이 생겼나? 꼬시래기는 식성이 좋아서 낚시하기도 정말 쉬었다. 특히 초가을에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 많이 살았는데, 7부두의 오른쪽으로 ‘동천’이 함유되는 지점이다. 아버지는 하루에 30kg 정도는 잡으셨던 것 같다. 투망을 이용하여 일망타진 하신 것이다. 그때마다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잔치가 벌어졌다. 그냥 밀가루에 묻혀 튀겨 먹기도 하고, 작은 것은 머리만 자르고 통째로 된장에 찍어 회로 먹었다. 아저씨들은 꼬시래기의 대가리를 칼로 가볍게 쪼아서 회로 드셨는데, 그 부분이 진짜 꼬시래기의 참맛이라고 입을 모았다. 어린 나는 ‘바보들 살도 없이 뼈만 있는 것이 무엇이 맛이 있다고 저럴까?’하고 생각하였으나,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니 그런 맛이 좀 새롭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천(東川)은 지금 너무 심하게 오염되었지만, 내가 중학교 시절에도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나는 당시 26번 버스를 타고 부산중학교(초량중학교)로 등교하곤 했는데, 그곳을 지나칠 때, 냄새가 너무 나서 숨을 잠깐 참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냄새는 순전히 동천의 냄새라기보다는 동천의 하류에 있던 막걸리 주정 공장에서 나는 냄새였다. 고구마 썩는 퀴퀴하면서도 구린 냄새. 중학교 때 동네 아이들과 그곳으로 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말린 것(‘빼때기’라고 불렀다.)을 훔치러 가기도 하였다.
꼬시래기는 수질오염에 대한 내성이 아주 강한 물고기다. 하지만 동네 아저씨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았다. 어디서 얻어 들은 정보인지는 몰라도, 된장에 참기름 듬뿍 넣고, 소주와 함께 먹으면 어떠한 독성도 제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 땐 그런 믿음에 대한 반박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환경오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했을 뿐 아니라, 그만한 먹꺼리를 내치고 따로 더 나은 먹꺼리를 구할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른들은 가끔 꼬시래기를 먹는 아이들에게도 소주를 한 잔씩 마시라고 권하셨다. 산동네(장고개)에 사는 사람들도 꼬시래기를 얻으러 저녁이면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와 친분을 밝히면서 얻어 가려는 사람,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꼬시래기를 사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수렵을 좋아 하셨다. 특히 토끼사냥, 산중턱에 그물 쳐 놓고, 사람들이 밑에서부터 요란하게 떠들면서 토끼를 몰았다. 초등학교시절, 사냥 나가시면 보통 2마리 이상은 잡아 오셨다. 그때도 역시 동네잔치가 벌어졌는데, 고기를 잘게 잘라서 탕을 해먹었다. 지금의 닭 도리탕(도리탕은 잘못된 말, 닭곰탕이라고 해야 옳음.)과 같은 요리를 해 먹었다. 나는 토끼의 생간도 먹었다. 역시 강한 해독제(?)인 참기름을 듬뿍 넣은 소금에 찍어 한 입에 먹었다. ‘토끼전’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토끼간이 사람 몸에 정말 좋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눈에... 우리는 토끼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가 셋째를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끼 사냥은 계속되었는데, 원래 임신 중에는 ‘태교’를 위해 좋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먹고, 마셔야 했지만, 우리는 토끼고기를 끊임없이 먹었다. 남동생 별명이 ‘희토’가 되어 버렸을 정도다. 나도 그 희토 때문에 학교에서 희토와 관련된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은 정확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희토는 토끼고기를 많고 낳아서 그런지 몰라도 짜식이 눈이 크고, 겁도 많았다.
아버지는 사냥할 땐 동네의 작은 지도자(?)가 되셨다. 사냥 가기 몇 일전부터 사냥 갈 장소를 발표하고, 사냥 갈 사람들을 모으고, 복장과 준비물을 지시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시에는 정말 귀한 ‘공기총’도 구입하셨는데, 이 공기총은 나중엔 많은 사고를 내기도 하였다. 먼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리 작은 할아버지께서 공기총을 빌려가, 이른바 ‘영점조정’하신다고 박카스 병 맞추기로 연습을 하시고, 동네에서 비둘기를 잡으시다가 경찰에게 들켜 벌금형을 받으셨다. 물론 작은 할머니가 오셔서 집이 떠나가도록 아버지를 원망하셨다. 또 우리 친구의 아버지는 함께 사냥 가서, 총신 끝에 달린 공기 주입용 페달(손가락 반 정도 크기의 쇠붙이)을 밟고, 공기를 충전시키다가 총알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방아쇠를 잘못 잡아 당겨,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나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의 공기총은 마치 자전거의 타이어에 바람 넣는 펌프처럼 페달을 밟고, 총을 상하로 수 십 차례 움직여 주어야 했다. 아저씨의 부인이 집으로 찾아와 대성통곡을 하면서 집을 발칵 뒤집어 놓으시고, 한 때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오발사고의 근본적인 잘못이 누구이냐에 대한 논평들로... 그런 여러 가지 불운한 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공기총은 집에서도 아주 위험하고, 불길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나는 부모님 몰래 총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산탄총알’을 구슬처럼 갖고 놀았다. 아버지는 발가락에 구멍 난 그 아저씨 아주 훌륭한 ‘저격수’라고 평가 하셨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우암동에선 더 이상 공기총을 동반한 토끼사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는 우암동 사람들과는 사냥을 가급적 피하시고, 당시 아버지가 사진사로 다니시던 혜화여중 직원들과 구포 쪽으로 사냥터를 옮기셨다. 물론 가족과는 심각한 갈등 구조를 만들면서, 아버지는 꼭 사냥 뿐 아니셨다. 여름이면 천엽을 통해 자신이 세상의 어떠한 속박에서도 벗어난, 아주 자유스런 인간임을 증명하셨다. 중학교 여름 방학 때 우리는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만나러, 지금의 구포다리 밑으로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아버지는 온전히 수영복 차림으로 그곳에서 신선(?)처럼 노숙하고 계셨는데, 우리는 만남의 기쁨도 잠시, 비가 억수같이 오는 여름날, 아버지의 권유로 낙동강 바닥에 살고 있는 재첩을 손으로 더듬어 잡기 시작 하였다. 등을 따갑도록 때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아아, 그 때 우리 가족 모두는 일상의 어떤 억압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황홀감 같은 것을 느꼈었는데, 삶이 고(苦)란 걸 이미 아신 아버지가,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는 기쁨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었다. 그건 '얼음의 도가니' 같은 역설의 세계였다. 그 이후는 나는 매우 낭만적으로 단련되었다. 아직도 그 단련의 흔적들이 내게 남아 있다고 믿는다. 아버진 스스로 참으로 자유스런 인간이면서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게 자유스런 인간들의 독성(?)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린 스스로 그 자유에 대해 저항하거나, 미쳐 줄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어떤 차이를 생산내는 것이니까. 비록 그게 아주 조금씩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문제의 공기총은 중학교 시절 ‘불법무기 자진신고 기간’에 아버지가 자진 신고 차 파출소가 갖다 주었는데, 그이후로 감감무소식이다. 원래자진 신고하면 등록 후 주인에게 돌려준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 하시는 아주 지당한 말씀, ‘순사 새끼들 순 도둑놈’ 그땐 워낙 실업자가 많아 동네사람들을 쉽게 사냥에 동원할 수 있었다. 동네 사람치고 아버지와 사냥 한 번 안 따라가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농경, 수렵시대와 산업시대의 중간을 사신 분이다. 아, 불현듯 아버지가 보고 싶다.
첫댓글 어릴 땐 난 얼굴이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성년이 되어서도 생각하는 것조차 엄마를 닮았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내 나이 마흔즈음에 알젠틴에 장기출장중 어느 교민의 이발소에서 문득 거울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오래도록 미워했던 그 아버지가 비로소 무척이나 그리웠고 은연중 나의 생각과 행동이 죄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 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왜 아들들은 아버지를 늦게 알아채는 건지요...
그저 알아채는 것만 그렇겠지... 실은 모두 뒤섞여 있는데...